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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얼핏 들은 이야기(3)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열이 확 올라왔다.
“오디션을 봐서 하면 뭐 하러 DH엔터랑 이야기를 합니까! 그냥 오디션을 보고 말지. 됐어요. 가서 DH 윤 대표한테 이번 일을 없던 걸로 하자고 하세요.”
제작피디는 난감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애원했다.
“대표님, 그러지 마시고…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방송사 임직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이봐요! 헛소리 하지 말고 가세요. 좋은 인상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말….”
더 이상 말해 봐야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제작피디도 축 처진 어깨로 대표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찬물을 들이키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방송사 측에서 욕심을 부리는 것 같은데요?”
“양 국장이 있는 KBC라면 말이 통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요, 거래는 없던 걸로 해야지”
“그럼 CF도….”
“그게 아깝긴 한데…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잖아요? 그깟 CF, 별이가 작품 하나 끝내고 나면 물밀듯이 밀려올 텐데, 거지 적선 받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받겠다고 매달릴 필요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DH 엔터의 윤설아 대표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DH 윤설아예요.”
“아, 네. 아침부터 좋은 소식 보내주셨던데요? 덕분에 아주 상쾌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어서 이거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꼬지 마세요. 저희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DH와 했던 거래는 없던 걸로 알겠습니다.”
“대표님,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봐요. 말로는 오디션이라고 해도 결국 두세 명만 보는 자리예요. 최소한 기본 이상의 능력이 있는지만 평가하겠다는 거예요.”
“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알아요. 화가 나신 이유 충분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방송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결정은 아니잖아요? 제대로 된 필모도 없는 석호를 서브남주로 맡기기에는 방송사 입장에서도 불안함이 컸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 한창 방영하는 ‘물의 연인’ 시청률이 3%로 바닥을 기는 상황이잖아요? 이번에도 그런 시청률이 나오면 아예 금토 드라마를 편성에서 빼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에요.
드라마국에서 그걸 두고 볼 순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당연히 알죠. 그리고 그걸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방송국 사람들이고 또 윤 대표님이죠. 내가 그걸 왜 걱정해야 합니까? 막말로 내가 제작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가만히 있던 우리 석호, 누가 먼저 써주네, 마네 했습니까? DH에서 먼저 이야기 꺼낸 거잖아요? 내가 언제 우리 석호 서브남주로 써달라고 애원했어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화만 내지 마시구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오디션을 두셋이서 본다구요? 그럼 방송사에서 석호 말고 다른 친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겁니까? 아니면 나를 물로 보는 건가요?”
“대표님, 이렇게 흥분만 하고 계시면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거 모르세요?”
안다. 하지만 윤설아 대표는 우현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다.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거래를 하고 싶으면 문제를 해결해가지고 오세요. 말 몇 마디로 때울 생각하지 마시구요.”
전화를 끊어버리니 강상훈 피디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세게 나가신 거 아닙니까?”
“마음 같아서는 더 나가고 싶었는데 참은 거예요.”
“아직 우리 쪽에서는 이렇다 할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그쪽에서 오버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강 피디는 일은 잘 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감각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윤 대표 머리가 딸리는 겁니다. 지금 석호를 MBS쪽에 이미 들이댄 상황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오디션 보기 싫다고 빠꾸하면 방송사측에서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실력도 없는 게 빽만 믿고 들이댔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아…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강 피디는 그제야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알았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게 싫어서 오디션을 본다고 칩시다. 어차피 방송사에서는 석호의 연기가 평균 이상일지, 아닐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정말 평균 이상인지만 확인하려면 오디션이라는 말을 안 꺼냈을 겁니다. 그냥 미팅 잡고 드라마국장이랑 피디가 나와서 개인 연기를 시켰겠죠?
하지만 오디션이라는 말을 꺼냈고, 거기에 둘, 셋이라고 했다면 석호 대신에 대타를 할 남자배우를 어디서 데리고 왔다는 겁니다.”
“그럼 오디션을 본다고 해도…?”
“안 될 거예요. 오디션에서 아무리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다고 해도 안 뽑을 겁니다. 더 이름 있는 연기자를 이미 생각해 놓고 있을 테니까요.”
“와… 진짜 대표님 말대로 더 세게 나가야 할 상황이네요. 아니, 이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 내 마음 아시겠죠? 더 하고 싶은 거 참았다는 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딱 하루만 기다려 볼 겁니다. 만약 하루 이내에 해결해서 온다면 나는 윤설아 대표를 다시 볼 것이고 거래는 예정대로 진행하겠죠.”
“만약 하루가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면 어쩝니까?”
“앞으로 DH랑 엮인 모든 일에서는 빠져야겠죠.”
“그럼 오디션도…?”
“오디션은 예정대로 볼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 피디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방금 전에 오디션을 봐도 떨어질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디션을 보게 하려구요?”
“말했잖아요? 오디션을 안 보겠다고 하면 실력도 없는 게 빽만 믿고 들이댔다고 생각할 거라구요.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습니다. 떨어지면 다른 작품에는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디션을 안 보면 아예 이 바닥에서 인성이 낙인찍히겠죠.”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낫겠어요.”
“지금 석호 뭐하는 중이죠?”
“오늘 ‘변호사들’ 촬영 때문에 서초동에 가있을 겁니다. 자세한 스케줄은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니요, 민주 씨한테 물어볼게요.”
사실 강상훈 피디는 제작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어째 민주가 해야 할 알까지 몇 개를 도맡게 됐다. 민주는 회계와 비서 일에만 집중하기도 힘들 정도로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강 피디가 나가고 민주에게 석호의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역시 강 피디가 아는 것처럼 현재 서초동에서 촬영 중이라고 했는데 두 씬만 찍으면 되기에 오후 2, 3시가 되기 전에 촬영이 끝날 거라고 했다.
“그럼 끝나자마자 사무실로 오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별이 스케줄은 어떻게 되죠?”
“오늘 강남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관객들과 인사 있구요, 끝나고 동대문에서 관객인사 있습니다. 이후 내내 잡지와 영화 프로그램 인터뷰가 있구요.”
“흐음… 지나는요?”
“탄산음료 CF 촬영 중입니다. 아마 오늘 내내 촬영할 것 같습니다.”
요즘 지나는 사무실에 얼굴 한 번 비추지 못할 정도로 바쁘기에 이렇게 하루에 한 번씩 스케줄이나 듣는 정도다.
“알겠어요. 오늘 오전에 유니 음방 사전녹화에 갔다 올 테니까 석호가 점심 전에 오면 밥 먹고 기다리라고 하세요. 혼자 먹을 것 같으면 직원들한테 석호 데리고 가라고 해주시구요.”
“후훗, 걱정 마세요. 설마 혼자 두겠어요?”
“그렇죠? 그럼 저 갔다 옵니다.”
음악 방송 사전 녹화는 가수마다 완벽한 무대를 생방으로 보여줄 수 없기에 각 팬덤을 데리고 따로 녹화를 떠두는 걸 말한다.
팬덤도 별로 없고 보여줄 게 마땅치 않거나 방송사에 그 정도로 요구할 수 없는 신인 가수들은 생방 무대에 나와 별다른 장치 없이 바로 보여주기에 소형 기획사는 당연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기가 밥 먹여 주는 걸. 이래서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
이날 유니의 사전녹화 무대를 충분히 감상(?) 겸 눈도장을 찍어주고 나니 오후 3시가 넘어갔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혼자 대표실 밖에 멀뚱히 앉아 있는 석호를 볼 수 있었다.
“왔어? 언제 왔어?”
“아, 점심 때… 괜찮습니다.”
“민주 누나가 밥 맛있는 거 사줬어?”
“하하, 네. 김치전골 먹었는데 마, 맛있었습니다.”
늦은 걸 미안해 할까봐 얼른 괜찮다고 한다. 아직 둘만 대화를 나눈 적이 많지 않아 어색해하는 게 느껴져 다정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대표실로 이끌었다.
“촬영은 어때? 요즘엔 말을 잘 안 더듬네?”
“노력 많이 해서… 촬영은 다들 잘 해주십니다.”
“그래? 말 더듬어서 NG내지는 않고?”
“더듬대서 몇 번 내기도 하, 하는데 그래도 이해해주서서….”
숫기가 없는 건지, 아니면 자신감이 없는 건지 말끝을 흐리는 버릇은 여전하다. 이런 성격으로 가수는 어떻게 되려고 했는지 참 신기하다.
“너 말끝 흐리는 거 좋은 버릇 아니야.”
“알겠습니다.”
“너 다른 드라마 캐스팅 된다는 이야기 들었어? ‘비밀연애’에서 재벌3세 역인데.”
“네? 네, 들었습니다.”
“어때? 자신 있어?”
“그게… 아직 ‘변호사들’ 촬영 중이라 같이 해도 될지… 아니,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끝을 흐리려다가 이내 다시 정정한다.
“같이 해도 돼. 주연들은 몰라도 조연들은 원래 월화, 수목, 주말 한꺼번에 하기도 하거든. 그래서 월화드라마에서는 가정부로 나오다가 주말드라마에서는 부잣집 사모님으로 나오기도 하니까. 그런 경우 많이 봤지?”
“어?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도 그런 드라마를 봤는지 슬며시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확실히 대놓고 미남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호감을 이끌어 내는 형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그만의 장점.
“어차피 ‘변호사들’ 방영하고 날짜 겹치지 않으니까 문제없고, 또 분량이 적어서 스케줄 빼기도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네? 어떤… 겁니까?”
“원래는 그냥 네가 하기로 했는데 방송사에서 네 필모가 너무 없다면서 오디션을 보자는 거야.”
“아….”
언뜻 지나가는 실망의 눈빛.
“실망하지 마. 누구는 이런 오디션 자리 한 번 만들어 보려고 수백 번이라도 지원서를 내고 연락을 하니까.”
석호는 자신의 실책을 지적하는 말에 바로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오디션 당당히 봐서 합격하겠습니다.”
“잘 하려고 노력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해서 망치지는 마. 그냥 네 연기를 보여준다고만 생각해. 그럼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니까.
방송사에서는 아직 네 연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불안해서 그러는 거야. 기본 이상만 보여주면 문제없을 거구.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를 다독이고 내보내는데 마침 강 피디가 서류 한 무더기를 들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그는 석호가 밝은 얼굴로 대표실을 나가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디션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 안 하셨습니까?”
“안 했어요.”
“흐음… 꽤 실망하겠는데요?”
“아뇨, 실망 안 할 겁니다.”
“네? 아… 석호가 멘탈이 튼튼한가 보군요.”
“후훗, 이제 갓 스무 살 바라보는 풋내기가 멘탈이 강해봤자죠. 아직 애잖아요.”
“그럼…?”
“DH서 해결 못하면 거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순 없죠. 지갑에 어음이 들어왔는데 현금화시키지도 못하고 부도처리해버려야 쓰겠습니까? 오디션 붙게 할 겁니다. 그거 하라고 대표직에 앉아 있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