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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얼핏 들은 이야기 (1)
나경민 감독은 잠시 당황하다 이내 차분히 답했다.
“네? 아, 예. 오영진이라고 시나리오 작가 일을 하는 친구가 쓴 겁니다. 혹시 아시는 시나리오인가요?”
시나리오 작가 이름이 따로 쓰여 있지 않았음에도 바로 알 수 있었던 건 아주 예전에 이 시나리오를 본 적이 있어서다.
“네, 아주 인상이 깊었거든요.”
은하가 막 스타로 발돋움 하려던 때, ‘새벽의 그늘’이라는 시나리오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남북한 간의 핵전쟁을 막기 위한 첩보 스릴러인데 상당히 재미있게 봤었다. 이런 비슷한 시나리오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꽤나 설득력 있고 신선했다.
그럼에도 이걸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시나리오를 들고 온 작가가 본인 스스로 감독을 해보겠다고 했었다는 데 있었다.
아직 연출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입봉작으로 제작비 100억이 넘어갈 대작을 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몇 년 전까지 충무로를 떠돌던 시나리오였지 않습니까? 이대로 없어지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라 제가 시나리오 작가인 오영진 씨를 만나서 몇 날, 며칠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승낙을 받아냈구요. 좋은 작품입니다.”
“그렇죠, 좋은 작품이죠…”
시나리오 자체만 보면 좋은 작품은 맞다. 하지만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처음에는 감독의 능력과 스타일을 알지 못했으니 참여할 수 없었고, 이번에는 본인 시나리오가 아닌 걸 들고 오니 더욱 난감했다. 게다가 문제가 더 있다.
“맞습니다. 이대로 사장되기엔 아까운 작품입니다.”
“혹시 시나리오에 손대실 생각인가요?”
이 트리트먼트는 분명 예전에 봤던 그대로다. 워낙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이라 그런지 다시 보니 전부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관객들에게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몇 군데를 손보긴 해야 할 거지만 그래도 이 시나리오의 감성과 의미를 그대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이게 문제다. 감독들은 모두 아닌 척하지만 자신들만의 철학과 감성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자부심(?) 같은 걸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말로는 이 시나리오의 감성과 의미를 그대로 가져간다고 하니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별로 바뀌는 게 없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쉽게 넘어가면 안 된다.
감성과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전부 바꾸겠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고 실제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이 시나리오가 충무로에서 한 때 돌아다녔던 이유가 그만큼 괜찮았기 때문인데 굳이 손대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하하,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용적으로 조금 무겁기도 하고 관객들은 조금만 무거우면 지쳐 나가떨어지거든요. 전체적으로 톤업을 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2명인데 시선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하나로 줄이구요.”
이 말을 한 사람이 다른 감독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전작에서 이해할 수 없는 괴작을 만들어 300억을 날려버린 감독이 이런 말을 하니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특히, 이 ‘새벽의 그늘’이라는 작품은 긴박한 첩보전과 고도의 심리전이 주된 재미인데 여기에다 어설프게 맥락 없는 액션과 가벼운 캐릭터를 집어넣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흐음… 일단 알겠습니다. 서울 올라가서 회의를 거친 이후에 연락드리도록 하죠.”
이 말이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나 감독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대표님, 이거 분명히 되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런 내용의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분명 그런 것들과는 차별화된 내용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인 거.”
“그렇죠? 흥행 실패할 작품이 아닙니다.”
“일단 지금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울 가서 결론을 내린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리니 나 감독도 어쩔 수 없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따라서 일어났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인사하고 나오는데 강상훈 피디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왔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드셨어요?”
“그렇게 보였나요?”
“시나리오랑 감독 둘 중에 하나는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야… 우리 강 피디님 눈치 빠르시네.”
“그럼 혹시 감독?”
“300억을 날린 감독이 남의 시나리오를 들고 왔는데 좋게 볼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그 좋은 시나리오에 칼을 대겠다고 하는데…”
“시나리오는 좋았습니까? 그럼 제가 작가한테 접촉해서 사 올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다. 판권만 가지고 있으면 적당한 감독한테 맡겨 흥행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쓰레기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괜찮아요. 나중에 나 감독이 저 시나리오 포기 하면 그 때 사도 늦지 않아요.”
“그러다 손 타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손을 탄다는 건 투자를 받아서 영화로 제작한다는 말이다. 엎어진다 하더라도 일단 제작을 시작해버리면 다른 쪽에서 손을 대기가 난감해진다.
“그럼 포기하면 되죠. 뭐, 그런 걸 걱정 합니까? 우리 작가 많잖아요? 다 훌륭한 친구들이니 조바심 내지 말죠.”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쇼.”
그렇게 부산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복귀했다. 그리고 나 감독에게는 아쉽지만 같이 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강 피디를 통해 전하곤 잊어버렸다. 유니의 앨범 발매를 비롯해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거 어때요?”
유니는 업체를 통해 제작한 무대 의상을 입어보며 정규앨범 컴백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괜찮네. 너무 무난한 거 아니야?”
검은색 시스루 원피스는 평소 귀엽지만 묘하게 섹시한 구석이 있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런가? 조금 더 짧게 할까요?”
“아주 조금만… 오늘 밤 공개인 거지?”
대답은 유니가 아니라 직원이 대신했다.
“네, 오늘 12시 정각 공개 예정입니다. 공식카페에도 이미 공지했기 때문에 12시 정각이 되면 팬들이 화력 집중해서 모든 음원사이트 순위권에 올려놓을 계획입니다.”
“연말 콘서트 준비는 어떻게 돼 가요?”
“올림픽공원 올림픽홀 대관했고 역시 공식카페에 공지했습니다. 11월 초순부터 티케팅 가능하도록 조율 중입니다.”
“수고했어요. 티켓값은 너무 싸지도 비싸지도 않게 조율 잘 하세요. 팬들이 학생들이라 너무 비싸면 오지 않을 거고, 너무 싸면 싸구려 공연 같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너 연습은 많이 했지?”
다시 유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무대의상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제가 언제 연습 안 한 적 있나요? 칫… 요즘 저한테 관심도 없죠?”
“관심이 없긴… 바빠서 조금 못 봤던 거지. 그리고 너야 언제나 잘 하잖냐.”
“칫… 아! 그리고 저 핸드폰 번호 바꿔야 해요?”
민상욱의 일 때문에 직원들에게 유니 번호를 바꾸라고 지시했었는데 아직 안 바꿨나보다.
“응, 아직 안 바꿨어?”
“네. 안 바꾸면 안 돼요? 자꾸 번호 바뀌고 그러면 친구들이 연예인 티낸다고 뭐라고 하는데…”
“안 돼. 혹시 모르기 때문에 1년 단위로 바꿔줘야 해. 그리고 네 번호 아는 사람들은 세동이한테 다 말해야 한다. 사적인 통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생기면 미리 이야기 하고.”
“말 하라고 진짜 말 하겠어요?”
그녀는 입을 삐죽였지만 그래도 아주 안 된다고는 안 했다. 승낙인 셈이니 얼른 세동에게 눈치를 줬다. 세동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아마 오늘 내로 번호를 바꿀 것 같다.
“어쨌든 앨범 만든다고 고생 많았다.”
“제 컴백무대 보러 오실 거죠?”
“당연한 소릴… 너 체중관리만 안 하는 중이면 맛있는 것도 배터지게 사줄 텐데 아쉽다.”
“그거 다 모아놨다가 저 쉴 때 다 얻어먹을 거예요. 다 적어 놔야지.”
“하하, 그래라.”
그렇게 유니의 복귀 준비를 같이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오니 강상훈 피디가 찾아와 민주와 대화를 나누다 우현을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 오셨습니까?”
“무슨 얘기했는데 얼굴이 빨개져요?”
“아… 민주 씨가 소개팅 시켜준다고 하지 뭡니까?”
“뭐야,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요? 잘 해봐요. 강 피디님도 이제 장가가야죠. 데이트 있는 날은 일찍 퇴근해도 됩니다. 저 야근 안 시켜요.”
강상훈 피디는 혼기가 꽉 찼음에도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다.
“네, 꼭 여자친구 만들어서 칼퇴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온 강 피디는 소파에 앉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대표님, 혹시 리쿠르팅 하셨습니까?”
“리쿠르팅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그게… 도마뱀 쪽에 있던 지여울 제작피디랑 ‘변호사들’ 관련해서 이야기하다가 곧 회사를 관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더라구요.”
“그래요?”
“네. 그래서 혹시 대표님과 교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해서…”
“하하, 교감은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만두려고 하지? 뭐,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오신 이유가 ‘변호사들’ 관련된 일인가요?”
“네. 대본리딩 끝나고 이제 제작발표회 일정 잡혔다고 하네요. 곧 촬영 들어간다고 합니다.”
“흐음… 대본은 어디까지 나왔대요?”
“현재 8회까지 완성본 나왔다고 하는데 받아본 사람들은 퀄리티가 상당하다고 다들 기대하는 중이랍니다. 특히 강소연 씨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제작진부터 어서 방영된 걸 보고 싶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하네요.”
“다행입니다. 사실 기대도 됐지만 걱정도 많이 됐었거든요. 스타트가 좋아야 다음 작품도 탄력이 생기니까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예, 그리고 KBC ‘비밀연애’ 캐스팅디렉터에게서 정식으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석호를 서브남주에 캐스팅하고 싶다는데…”
석호의 나이가 어리기에 강 피디도 석호에게 씨나 군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네, 말씀 드렸죠?”
“대표님한테 듣고 설마하고 있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됐네요. 그럼 석호가 이번에 ‘변호사들’에 조연으로 캐스팅 된 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같이 진행하도록 해요. 어차피 같은 요일에 겹치는 것도 아니고, 방영 시기는 ‘비밀연애’가 훨씬 느리지 않아요?”
“현재 진행되는 걸 보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은 차이가 날 걸로 생각됩니다. ‘비밀연애’ 촬영이 늦어지면 더 차이날 수도 있구요.”
“그럼 상관없어요. 오히려 더 좋죠. 급이 달라진 게 확 보이니까. 사람들은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될 겁니다. ‘와… 강석호가 서브남주를 하네…’, 이렇게요.”
“하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네요. 전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서 걱정했는데,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부산에서 만났었던 나경민 감독 말입니다…”
강 피디는 말을 하다 말고 슬쩍 우현의 눈치를 본다.
“괜찮아요, 말해 보세요.”
“정확한 건 아닙니다. 저도 얼핏 들은 거라…”
강 피디가 무슨 술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얼핏 들을 상황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얼핏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데요?”
“영화관계자들한테 대표님 뒷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말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