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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4)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일단 최 상무가 아직 자리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른 척하며 최 상무와 말을 이어갔다.
“석호가 할 드라마는 캐스팅이 진행된 상황인가요?”
“편성을 확정 받은 상황은 아닙니다. 현재 캐스팅 진행 중이고 그게 완료되면 편성이 확정되겠죠. 하지만 반 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하는 걸 보니 방송사 측과 이야기가 오간 것 같다.
“그럼 CF건은 어떻게 진행되는 거죠?”
“광고대행사 측에서 이 달 안에 연락 갈 겁니다. 내년 초에 들어갈 행사에는 모델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늦어도 다음 달에는 촬영이 들어가야 하니까요. 아마 CF와 잡지사에 들어갈 화보촬영까지 꽤 많은 부분을 진행할 겁니다.”
당연히 TV광고만 하는 것보다 다른 것들을 추가할수록 돈을 많이 받는다.
“좋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부산에서 편히 쉬시고 서울에서 언제 한 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럽시다.”
그가 가게를 나가고 나자 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상욱 오빠 소송 취하해 주려는 거예요?”
“응, 상욱이가 간 스카이엔터가 망했다더라. 그 회사를 DH엔터가 먹었다는데, 거기서 상욱이 소송을 취하해줬으면 하네.”
“그럼 아까 석호랑 CF 이야기는 뭐예요?”
“그냥 해줄 수는 없잖아. 소송 취하해주는 조건으로 내년 3월에 저쪽에서 석호를 지상파 금토드라마 서브 주연으로 넣어주겠대.”
“우와! 대박!”
그녀는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같은 반응에 주변에서 모르는 척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일반인들이 흘끔거리며 돌아보았다.
“조용히! 그리고 ck-2 화장품 광고를 넘겨주는 조건도 포함이야.”
“헐… 그거 누구 줄 거예요?”
눈빛을 반짝이며 속삭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탐이 나나 보다. 사실 지나는 이번 ‘미씽유’가 대박나며 이게 아니라고 해도 들어오는 CF건이 엄청나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은하 같은 경우는 누가 일부러 넘겨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은 대타 따위는 안 한다고 거들떠도 안 볼 게 분명하다.
결국 남은 건 소연과 별이인데,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얼마 전에 들어온 소연보다는 별이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하다.
“글쎄다. 뭐, 너 하는 거 봐서…”
“헤헤, 저야 언제나 대표님 바라기죠.”
이미 자신에게 올 CF라 느꼈는지 실실거린다. 아마 주변에 사람들이 없으면 엉겨 붙어서 감사하다며 애교를 부렸을 것 같다.
“그러니 나한테 잘 해라.”
“당연하죠. 그럼 상욱 오빠 소송 취하해 주겠네요? 이야…”
어째 말투가 이상하다. 축하하는 것도 아니고 실망하는 것도 아닌 뭔가 기대하는 듯한…
“왜?”
“솔직히 대표님 배신하고 나갔는데 너무 쉽게 용서해주는 것 같잖아요. 그때는 내가 다 화나던데…”
“오… 정말? 나도 비슷한 생각 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중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밥그릇까지 뺏기에는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그런데 넌 나보다 더 아쉬워한다? 뭐야? 혹시 민상욱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이거 왠지 대표님한테 일러바치는 모양새인데…”
말로는 싫은 것처럼 하지만 눈빛을 보니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게 딱 보인다.
“뭔데 그래? 괜찮아.”
“그게 사실은요…”
별이는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홀짝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상욱 오빠 들어오고 나서 얼마 뒤에 저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전화? 네 핸드폰으로? 누가?”
“네, 글쎄 그 사람이 상욱 오빠였던 거죠.”
파인엔터뿐만 아니라 모든 기획사들은 신인 여배우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걸그룹들은 아예 핸드폰을 못 들고 다니게 한다지만 배우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당연하게도 별이 핸드폰 번호는 몇몇 직원들 빼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상욱이 별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니 기가 막혔다.
“전화해서 뭐라고 했는데? 그리고 왜 말 안 했어?”
“에이, 분란이 생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쉽게 대표님께 말해요. 그리고 전화로는 같은 식구가 됐으니까 잘 해보자, 친하게 지내자 이런 정도였단 말이에요.”
당연히 저 말이 정말 같은 소속사 식구끼리 잘해보자는 뜻으로만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자신도, 별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별이 입장에서는 그걸로 일러바치기가 심히 망설여졌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연락이 왔는데 칼같이 선을 그었죠. 그러니까 이후로 연락은 안 하더라구요. 그런데 얼마 전에 유니한테 들었는데…”
“유니? 설마 유니한테까지 찍접댄 거야?”
유니가 성인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열이 확 받는다.
“찍접댔다기 보단 간을 본 수준? 하여튼 유니는 저처럼 단호하게 대하지 못해서 상욱 오빠가 나가고 소송이 걸린 이후에도 몇 번 카톡을 주고받았나 봐요.”
“흐음… 그래서?”
요즘 유니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조심시켜야 할 것 같다.
“조금 이상하대요.”
“이상해?”
“네. 아무리 소송 걸려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연기연습도 안 하고 맨날 클럽에서 놀고 자기 자랑하는 사진만 보내더래요.”
“하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웃기죠? 유니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오빠니까 그냥 받아주기만 했대요. 그런 줄도 모르고 유니가 관심 있어 하는 줄 알고 계속 자기 자랑하는 사진을 보냈다는데… 되게 멍청한 것 같아요. 돈은 유니가 훨씬 많이 버는데… 자기가 벌어서 쓰는 것도 아니고 형 돈으로 자랑하기나 하고.”
“그러게…”
이럴 때 자신의 안목이 그 사람의 재능만 볼 수 있고 인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헷갈린다.
만약 인성까지 볼 수 있었다면 상욱을 결코 영입하려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걸 하지 못해 상욱을 영입해서 결과적으로 석호와 별이의 CF를 얻게 되니 좋아해야 하는 건지…
“유니가 첫 정규앨범을 낼 때는 어쩌다 한 번씩 연락하다가 대세 중의 대세가 된 이후로는 연락을 더 자주 하더래요.”
“안 되겠다, 번호 바꾸라고 해야겠어.”
“그렇다고 유니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걔도 나름 잘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 연예인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번호 바꾸는 거라고 하면서 둘러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런 일 있으면 언능언능 말 하고.”
“넵. 아, 저 레드카펫 선 거 보고 그냥 가셨다면서요? 뒤풀이에 한 번 오셨다 가시지…”
“거기에 내가 참석하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 해. 어쨌든 네가 거기서 가장 예쁘더라. 내가 다 뿌듯하더라니까.”
“히힛, 당연하죠. 처음에 대표님이 나한테 연기해보자고 했을 때, 많이 걱정했는데… 솔직히 사기꾼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그런데 왜 계약했어?”
“그래도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빨리 스타가 될 줄은 몰랐어요.”
“말했잖아, 내가 너 스타로 만들어 준다고. 난 약속한 거 꼭 지키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지금은 미니 주연급이지만 이제 톱스타가 돼야지.”
“전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충성 충성!”
별이는 귀엽게 거수경례를 취했다.
“야, 그대로 있어봐. 사진 찍어서 팬카페에 올리자.”
핸드폰으로 별이 사진을 찍으니 그때부터 주변 일반인들이 하나 둘 다가와 같이 셀카를 찍어달라며 부탁하기 시작했다. 몇 명과 사진을 찍고 별이와 점심을 먹고 호텔에 들어오니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전날 밤에는 침대에 몸을 뉘였을 때 마음이 무거웠는데 지금은 날아갈 듯 편했다. 상욱을 보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까운 마음도 있었다. 정신 차리고 다시 노력하면 분명히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하는 꼴을 보니 분명 사고 몇 번 치고 잊혀질 게 뻔하다.
이런 놈이면 소송 취하해주고 보내주는 게 석호를 위해서도 좋다. 단지 이런 놈을 위해 지상파 드라마의 서브 남주와 화장품 CF까지 넘긴 DH엔터가 조금 안쓰러울 뿐.
아무렴 어떠랴? 원래 투자는 본인이 선택하고 결과도 본인이 책임지는 게 당연한 일 일진데.
지이잉…
강승훈 피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당연히 수출에 관련된 일이겠거니 해서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경민 감독? 그 감독이 왜 만나자고 해요? 혹시 하고 싶은 영화가 있대요?”
“아무래도 파인프로덕션이 투자를 잘 끌어온다고 소문이 났나 봅니다. 감독들 입장에서는 본인 시나리오 가지고 어필하는 건 당연하겠죠.”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입장에서야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것을 맞추기 위해 감독과 배우를 세팅하겠지만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들고 각 제작사를 노크하는 것이 일반적인 테니까.
“알겠어요. 저녁에 보자고 해요.”
“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나경민 감독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스포츠 영화로 대박을 치면서 일약 충무로의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차기작이었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망하면서 근 몇 년간을 일 없이 백수로 지냈던 감독이다.
얼마나 크게 망했냐면 제작비만 3백억이 넘게 들어갔던 작품으로 그 당시 작품에 들어갔던 CG에 대한 찬사 외에는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고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았었다.
당연히 관객수는 100만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것 때문에 이 작품에 투자했던 중국 투자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때문에 솔직히 나경민 감독이 보자고 해도 별 기대가 되지 않았다.
이후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고자 호텔에서 나와 해운대 백사장을 거닐며 청승을 떨다 저녁 무렵이 돼서 어슬렁거리며 호텔에 들어가니 로비에 강 피디와 40대 초반의 중년 남성이 우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그 40대 초반의 중년 남성은 나경민 감독이었는데 빼빼 마른 몸매에 머리엔 새치가 가득하고 위아래를 전부 가죽옷으로 입고 있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악수를 건네는 나경민 감독의 손에는 하나의 시나리오가 들려 있었다.
“반갑습니다. 일단 이러고 계시지 말고 앉죠. 저기 커피숍으로 가실까요?”
강 피디와 나 감독을 데리고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가 앉았다. 나 감독은 살짝 긴장감이 어린 표정이었는데 호텔 특유의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부터는 눈에 힘을 주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파인프로덕션이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영화, 드라마 제작사가 될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찬입니다. 아직 보여준 것도 없는데요.”
“이미 ‘네플릭스’와 협업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계시죠. 특히 이번 ‘28시간’을 성공시키면서 모든 감독들이 대표님과 함께 일하는 걸 바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구요.”
“흐음… 그럼 시나리오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트리트먼트를 거친 거라 이해하시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제목은 ‘새벽의 그늘’. 순간 우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거 시나리오 작가가 따로 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