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53화 (25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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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 (3)

“그럼 더 들어봅시다.”

최 상무는 팔짱을 끼고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우현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유현이가 하는 ck-2 광고가 올해 말까지입니다. 그걸 드리죠.”

“진심이십니까?”

최 상무가 말하는 ck-2는 일본제 고가 화장품이다. 지금까지 ck-2 광고는 최고의 여배우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DH엔터의 임유현이 광고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광고모델을 마음대로 바꾸는 게 가능하다구요?”

“다른 광고라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ck-2 광고는 가능합니다. 현지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는 업체의 대표가 저희 대표님의 오라버니 되시거든요.”

이래서 학연, 지연이 판치는 걸지도 모른다. 뭘 하나 하더라도 인맥이 많으면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 특히 그 중 제일은 혈연일 테고.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흐음… 고민하실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정도면 저희 입장에서는 충분히 성의를 표시한 것 같은데…”

그건 맞는 말이다. 어차피 2, 3년 일을 못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소송에서 결과가 나올 것인데 만약 파인엔터가 지게 된다면 그 이후부터는 DH엔터 소속으로 활발히 일을 하게 될 거다.

그게 아니라면 파인엔터 소속으로 계약기간을 모두 마치게 될 때까지 손가락이나 빨게 될 것이고.

결과가 뭐가 됐든 파인엔터로서는 어떤 금전적 이득도 볼 수 없다는 건데 그럼에도 소송을 진행하는 이유는 일종의 본보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성의는 충분히 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걸 받으면서 소송을 취하해줘도 될지 고민되는 거죠.”

“이해합니다. 충분히 우려하실 만하죠. 하지만 중국에서 온 연습생들처럼 기획사를 쉽게 배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욱이 같은 경우는 순진했었고 또 그의 형은 어리석었죠.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서야 되겠습니까?”

평소 남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일은 항상 경계하고 있었기에 다른 것보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일단 알겠습니다. 배고프니까 식사부터 하고 내일 다시 만나죠.”

“그럼 그때 결론이 나기를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오래 끌 사안이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석호가 출연한다는 드라마 시놉은 나왔겠죠? 그거 저한테 메일로 좀 보내주세요.”

“어려운 일 아니네요. 직원들에게 요청해놓겠습니다.”

사실 최 상무와 함께 먹는다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별이도 한창 바쁠 테니 누굴 불러서 같이 먹기도 애매했다. 패스트푸드점도 아니고 호텔 식당에서 혼자 먹기는 더더욱 불편했고.

어쩔 수 없이 그와 점심을 함께 하고 숙소로 올라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상욱이 문제 때문에 골이 아파왔다.

똑똑…

이 시간에 숙소에 올 사람은 강상훈 피디밖에 없다. 역시나 문을 열어보니 강 피디가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서 있었다.

“쉬시는 중이셨습니까?”

“아니에요. 방금 점심 먹고 들어왔어요. 식사는 했어요?”

“네, 방금 바이어들과 만나서 식사하고 바로 온 겁니다.”

밝은 얼굴을 보니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왠지 일을 그에게 전부 맡겨버리고 놀고만 있는 것 같아 미안해졌지만 굳이 자신이 끼지 않아도 잘 해낼 친구고 더 불편해하기만 할 것 같아 그냥 이렇게 보고만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진행 상황은요?”

“어제 개막작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진 건 아시죠? 기사 보니 꽤나 잘 나온 것 같더라구요. 대표님은 아직 안 보셨죠?”

포털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놓을 만큼 신경 쓰고 있었는데, 어제 레드카펫 행사가 끝나고 나서 개봉한 ‘28시간’이 엄청난 호평을 받은 것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기사화했다.

“일부러 안 봤어요. 극장에서 개봉하면 가서 보려구요. 그냥 느낌이 극장에서 개봉해야 꼭 진짜 개봉하는 기분이라…”

“하하, 그러실 수 있겠네요. 어쨌든 바이어들 분위기가 좋습니다. 영화도 잘 나왔고 스토리도 너무 잔인하거나 야한 것들이 없어서 어떤 문화권이든 전부 수용 가능한 수준이라 다들 긍정적으로 보고 있구요.”

“잘 됐네요. 수고했어요.”

“수고는 제가 아니라 영화 만든 분들이 하셨죠. 지금 별 씨는 영화 관계자들이랑 홍보하는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제 뒤풀이 행사가 있었는데 대표님이 주의를 줘서인지 딱 한 시간만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고 하네요. 주변에 남자배우들도 없어서 크게 주의할 만한 일은 없었다고 대표님께 잘 말해 달라고 상준 씨가 부탁하던데요?”

아마 전에 주의를 준 게 아직도 마음에 남았나 보다.

“제가 전에 주의를 준 적이 있었거든요. 어쨌거나 별일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물론 감독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어젯밤에 상준 씨가 은밀히 받은 제안만 벌써 다섯 개라고 하네요.”

“그거 다 나한테 보내라고 하세요. 괜찮으면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오늘 저녁 스케줄 있어요?”

“네, 미국 쪽 바이어와 저녁 겸 미팅 있습니다.”

약속 없으면 만나서 한잔 하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다. 그렇다고 일하러 온 사람 붙잡을 수는 없으니 티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시네요. 맛있는 거 드시고 알아서 식대 청구하세요.”

“그럼요. 꼬박꼬박 영수증 챙기고 있습니다. 그럼 쉬십쇼. 저는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강상훈 피디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일을 보냈다고 최 상무가 문자를 보내왔다. 이에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해 메일을 여니 ‘비밀연애’라는 제목의 한글파일이 보였다.

“어디 보자…”

내용은 재벌 3세와 캔디형의 여주,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쉐프와의 삼각관계를 그린 뻔하고도 뻔한 멜로드라마다.

사실 아직까지도 이런 90년대식 멜로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에 의문을 느낄 정도지만 무엇보다도 시청률이 꾸준히 나온다는 것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멜로는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다른 면으로 보면 이런 클리쉐 덩어리인 드라마들이 바로 작가의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면도 있다. 너무 뻔하기에 오히려 작가만의 색을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종합해서 볼 때, 이번 ‘비밀연애’의 시놉은 무난했다. 적당한 클리쉐와 적당한 고구마, 그리고 적당한 밀당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이번에 처음 데뷔하기에 일단 대본이 나와봐야 정확한 사이즈가 나올 테지만 너무 대박 나는 것도 사실 부담스럽다.

첫 지상파 데뷔이기에 가장 중요한 건 석호만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오케이.

서브 주연인 것도 만족스럽다. 오히려 주연이었다면 연기에 많은 부담을 느꼈을 터. 상대 여주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조금 달라지겠지만 베테랑 연기력을 가진 여주라면 환영이다.

이제 문제는 상욱의 소송을 정말 취하해줘야 하는가만 결정하면 되는데, 시놉이 괜찮다는 걸 알았음에도 쉽사리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하루 내내 호텔에 머물며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상욱의 문제를 고민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바로 해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넓은 커피숍에 앉아 최 상무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별이가 앉아 있었다.

“뭐하러 나왔어? 며칠 내내 힘들었을 텐데.”

“별로 안 힘들었어요. 재밌기도 했고… 그리고 아침에 그냥 눈이 떠지길래 전화했죠.”

호텔을 나가려는데 별이한테 전화가 왔었다. 부산에 온 걸 아는데 얼굴도 안 보이고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것 아니냐는 말에 그녀를 최 상무와 만나는 자리로 부른 것이다.

“뒤풀이 때 감독들이 다가와 치근댔다며?”

“하하, 치근댔다기 보다 그냥 좀… 어필을 많이 한 거죠.”

“마음에 드는 감독 있었어?”

“제가 뭐 아나요? 그냥 대표님이 골라주신 작품 하는 거니까…”

혀를 쏙 내밀고 부끄러워했지만 그녀의 연기욕심이 상당한 것을 알기에 조금 더 깊이 물어보았다.

“그래도 조금 관심이 가는 감독은 있었을 거 아니야?”

“흐음… 윤정범 감독님께서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데 여주인공으로 저를 생각하면서 쓰셨대요.”

순간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표정관리에 힘쓴 채 진지하게 경청했다.

“아, 그래?”

“그래서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감독들이 배우를 꼬실(?) 때 가장 많이 쓰는 멘트가 바로 저 멘트다. 마치 ‘손만 잡고 잘게’, 또는 ‘라면 먹고 갈래?’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직 별이가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고 주연급에 올라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선하게 들리겠지만 앞으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듣게 될 거다.

“그럼 내가 윤정범 감독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뭔지 한번 알아볼게. 괜찮으면 같이 진행해보고.”

“진짜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전혀 감사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윤정범 감독은 별이를 맡길 만큼 좋은 감독이 못 되니까. 한마디로 연기 좀 해준 거다.

“어?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김별 씨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저 없다고 생각하시고 두 분 알아서 이야기 나누세요.”

최 상무가 곤란해 할까봐 별이가 먼저 안심시켰다. 조금 불편해 보인다고 해도 별이가 일반인도 아닌데 저기 멀리 떨어져 혼자 있으라고 할 수 없기에 최 상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괜찮아요.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요. 물론 괜찮으시니까 같이 오셨겠죠?”

“그럼요.”

“그럼 생각은 정리되신 겁니까?”

“흐음… 이렇게 합시다. 내년 3월에 취하해줄게요.”

“내년 3월이요? 반년이나 지난 다음에 취하해주겠다는 겁니까?”

“반년은 아니죠. 대략… 5개월 정도 남았나?”

“5개월이나 반년이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취하해줄 수는 없습니다. 소속 배우들 보기에도 회사가 너무 물러 보이는데다가 솔직히 상욱이가 지금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믿지도 않거든요.”

“괘씸죄다 이 말인가요?”

“아니라면 거짓이겠죠. 그러니 최소 1년은 고생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고생해야 DH 쪽에서도 상욱이를 다루기 쉬울 테구요, 아시잖습니까? 한번 배신해본 녀석들은 계속해서 소속 회사 뒤통수치려고 한다는 거.”

“흐음…”

최 상무는 팔짱을 끼고 장고에 들어갔다. 5개월이면 DH에서도 고민이 될 기간이다. 아예 포기하기엔 기간이 짧고 그렇다고 승낙하기엔 굴욕적이다.

“싫으면 이번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해도 됩니다.”

“하핫, 부럽습니다. 대표님은 결국 우리의 도움이 없더라도 강석호가 주연급 배우로 올라설 수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으시는군요?”

“그렇지 않다면 손도 대지 않았을 겁니다.”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라… 그렇다면 민상욱 역시 그런 마음으로 영입했다고 믿겠습니다.”

“제 판단을 믿으시겠다는 건가요?”

“이 바닥에서 ‘미다스의 손’인 대표님을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습니까? 하하! 어쨌든 대표님의 손이 닿은 녀석이니 고생 좀 시키고 우리가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최 상무는 결국 우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옆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던 별이가 우현을 향해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민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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