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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약속 했으니까 지켜야지(1)
시간은 빠르게 흘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일이 다가왔다. 당연하게 모든 스케줄에 앞서 별이를 보좌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별이 일행으로는 매니저인 상준을 비롯해 코디네이터, 메이크업아티스트 등 그녀를 수행하는 인원만 다섯 명이고 우현은 별이 일행과는 따로 움직였다.
“일단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 쪽은 전부 선판매가 이뤄졌습니다. 그쪽은 관객수가 한정적이라 큰 수익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해도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의외로 꽤나 짭짤한 수익이 나오기도 합니다.”
우현은 파인프로덕션의 차에 타서 움직이고 있었다. 차에는 우현을 비롯해 강상훈 피디와 해외 매출을 담당할 직원 두 명이 더 타고 있었다.
“영화제 분위기는 어때요?”
“뭐, 작년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아 흥행에 찬물을 끼얹긴 했지만 올해는 준비부터 개막까지 순조롭고 별다른 잡음도 들리지 않아 흥행을 자신하는 분위기입니다. 당장 오늘 레드카펫 분위기 보면 더 확실히 알겠지만요.”
“끝나고 주변 포장마차에서 뒤풀이가 있을 텐데 그 때는 내가 참석해야 하니까 이후에는 강 피디가 수출 진행하도록 해요.”
“술 좋아하는 바이어들도 꽤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영화제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구요. 저희도 잘 맞춰주면서 노는 거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잘 됐네요. 아, 최 작가가 캐스팅에 대해서 아직 말이 없답니까?”
정윤석 감독이 연출하기로 하면서 제목이 ‘카운터’로 확정됐다. 이후 제작진들이 꾸려졌고 캐스팅디렉터가 최 작가에게 붙어있다시피 하며 캐스팅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자주인공을 선정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일단 캐스팅디렉터 통해서 서브주연과 조연들을 뽑고는 있는데 남주는 최 작가의 머릿속에 누가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입을 열지 않네요. 일단 본인이 직접적으로 캐스팅을 해보고 안 되면 저희한테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투자는요?”
“다음주에 ‘네플릭스’에서 투자문제로 방문한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방영하는 거라 편성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할 일이 대폭 줄었어요. 신경 쓸 것도 없고.”
만들던 드라마가 엎어지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편성이다. 방송사 자체 제작이 아니면 편성이 확정된 이후에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이건 방송사에서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기 때문인데, 실제 편성을 받아놓고 캐스팅 완료 후 촬영을 한창 진행 중인 드라마를 두고 편성을 취소해버린 경우가 있었다. 때문에 제작진들과 배우들은 출연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제작사 역시 큰 손해를 보았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외주제작사 입장에서 편성이라는 건 항상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변수다.
“방영은 언제 하기를 원하고 있대요?”
“올 연말에 촬영 들어가면 늦어도 내년 7월에는 방영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섬머시즌 들어갈 때 거기에 끼워서 광고 내보낼 수 있으니 좋을 거라고 하네요.”
“우리 입장에서는 7월이면 여유가 있는 편인데, 미드 쪽에서 보면 반년 만에 시즌 하나를 만들어 내는 건 무리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알더라구요. 우리나라 드라마 시스템이 워낙 빠르다면서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혹시나 제작 사정 때문에 늦어지더라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고의가 아니라면 충분히 기다려줄 용의가 있다고 확답 받았습니다.”
“걔들이 융통성이 있는가 보네요. 어쨌든 남주 확정되면 바로 촬영 들어갈 수 있게끔 준비 하시고… 보니까 기사가 안 나가던데, 이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강상훈 피디가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기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유은하 캐스팅이랑 ‘네플릭스’ 투자 기사요. 전에 보니까 ‘네플릭스’와 국내 제작사가 손잡고 드라마를 만들려고 한다는 기사밖에 안 나갔던데요?”
“아… 죄송합니다. 저는 일단 캐스팅이 완료되면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되구요. 캐스팅 하나 될 때, 촬영이 시작 될 때, 이렇게 소스 하나하나마다 전부 기사 내주세요. 어차피 홍보는 ‘네플릭스’에서 해준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홍보해줘야 할 부분은 홍보해줘야 합니다. 특히 연예인 팬들에게는 일명 덕질을 할 수 있는 소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게 중요해요.”
“아… 그 부분은 생각하지 못 했네요.”
“가수랑 달리 배우들은 팬들 입장에서 속칭 덕질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수들 같은 경우는 공연이나 음악방송 할 때 찾아갈 수 있지만 배우들은 촬영장에 매번 찾아갈 수도 없고 공식 굿즈 같은 것도 팔지 않아 덕질 할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조성될 수 없죠. 특히나 좋아하는 배우가 몇 년 만에 드라마 하나 하는데 시청률이 쪽박에다가 본인이 보기에도 재미가 없으면 팬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최대한 많은 기사를 뿌려주는 게 팬들을 위한 일인 겁니다.”
강상훈 피디는 지금까지 제작 업무와 수출 업무를 주로 해왔기에 연예인 매니지먼트에 관련돼서는 이해도가 부족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렇게 지적할 부분이 있을 때마다 바로바로 지적해줘야 한다.
“아, 그렇군요.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차 안에서 회의 겸 수다를 떨며 부산에 도착한 시간은 레드카펫 행사가 시작하기 10분 전이었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별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놓칠 뻔했으니.
이미 행사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있었고 곳곳에 영화 관계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네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그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며 레드카펫을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는데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언저리 같았고 키가 아주 커서 우현이 고개를 쳐들고 봐야 할 지경이었다. 못해도 190은 될 것 같았다.
“김우현 대표님 되시죠? 반갑습니다. DH엔터테인먼트 최동진 상무라고 합니다.”
DH엔터는 톱배우 상당수가 소속된 큰 매니지먼트 업체다. 강소연이 준비 중에 있는 ‘변호사들’의 남주인 김준현이 소속된 회사로, 이미 대표인 윤설아를 만난 일도 있었다.
“아, 그러세요. 반가워요.”
악수를 나누며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눈도장이나 찍으려고 하는 건지 슬쩍 눈치를 보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서며 은근한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번에 ‘네플릭스’에 드라마 하나 론칭하신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네요.”
“운은요, 이게 다 대표님 실력 아니겠습니까? 저는 파인 엔터에서 그렇게 빨리 제작사를 인수할지도 몰랐고 인수하자마자 그렇게 큰 대어까지 낚을지는 더더욱 몰랐지 뭡니까? 저희 대표님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때 대표님께 더 잘 보일 걸 그랬다고 한탄을 하더군요, 하하하!”
“윤 대표님이 칭찬이 후하신 겁니다. 그나저나 윤 대표님은 참석 안 하셨나요?”
“네, 지금 서울에 계십니다. 직접 참석하신 김 대표님이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저는 설마 김 대표님을 여기에서 뵐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의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이가 레드카펫에 선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내려온 거다.
“요즘 한가해서 겸사겸사 내려왔습니다. 상무님은…?”
“아, 저는 우리 보아 봐주러 왔죠. ‘바보와 여자’에 출연했지 않습니까?”
DH엔터의 소속인 윤보아는 톱 여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미니 주연급으로 인정받는다. 그녀는 데뷔 때, 연기력 논란을 호되게 겪은 경험이 있어 몸값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 독립영화에 출연하고는 했다.
하지만 우현이 봤을 때는 연기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느껴짐에도 실질적으로 연기력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안 느는 거라면 재능이 부족한 탓일 게다.
“아… 기사에서 봤어요. 요즘 해가 갈수록 연기력이 물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연습량이 굉장한 것 같아요.”
“하하, 우리 보아가 원체 연습벌레라서요. 보통 작품이 없을 때면 남들은 놀러가고, 쉬고 하는데 우리 보아는 쉴 때도 연극을 보러 갑니다. 대단한 친구죠.”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예의상 엄지를 치켜들어 장단을 맞춰주는데 그가 다시 한 번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슬쩍 물었다.
“이번에 ‘네플릭스’에서 들어가는 작품 이름이…”
“아, 카운터요?”
“맞아요. 카운터… 제목이 강렬해. 그거 남주 아직 못 정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이것 때문인가? 하지만 남주는 자신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문제다. 이미 자신의 입김으로 은하가 여주로 확정됐기 때문에 남주 문제로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면 최은미 작가에게 큰 실례를 하는 게 된다.
“글쎄요, 저는 잘… 그리고 남주 캐스팅은 제작사에서 일관할 문제지, 제가 함부로 끼어들기 어렵습니다.”
그는 우현의 말에도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우현의 어깨를 툭 쳤다.
“아이고 우리 대표님,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닙니까? 하하하!”
순간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친구 사이도 아니고 아무리 자신이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한 회사의 대표인데 너무 격 없이 대하는 듯한 태도에 빈정이 상했다.
“겸손이 아니라 저는 이번 남주 캐스팅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그제야 최동진 상무도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러신가요? 미안합니다. 저는 대표님께서 남주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아 도움을 주려는 마음에…”
“그럼 저한테 말씀하시지 말고 저희 강 피디에게 말씀하시죠.”
자신의 뒤에서 눈치를 보던 강상훈 피디의 팔을 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파인프로덕션 강상훈 피디입니다.”
강 피디가 인사하며 바로 명함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강상훈 피디님에 대해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에 대해서요?”
놀란 강 피디가 되물으니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요즘 ‘네플릭스’와 파인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핫한 주제인지 모르십니까? 그리고 우리 원준이가 아주 대차게 까이기도 했었죠.”
“아… 임원준 씨 캐스팅은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런데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니 까였다고 하기가….”
아마 DH엔터 측에서 본인들이 보유한 톱배우인 임원준을 내세웠는데 최은미 작가가 거절했던 모양이다.
“임원준은 군대 가야 하지 않나요?”
이십대 후반인 임원준은 잘생긴 외모와 착한 성격, 수준급 매너로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연예계 내에서도 평판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아직 병역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
“내년에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임원준이 군대 가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은 한 5년 전부터 떠도는 말이었다.
“아… 그렇군요.”
사실 군대를 가고 말고를 떠나서 임원준은 자신도 반대다. 연기력이 아주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착한 인상 때문인지 계속 비슷한 역할만 맡아와 스팩트럼이 넓지 못하고 특유의 사춘기 애들 같은 가벼운 발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준이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최동진 상무는 우현의 표정을 보고선 툭 치고 들어왔다.
“글쎄요. 크게 생각해보지 않아서…”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했을 테지만 애매한 답에 최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의 마음에 안 드는 걸 확신한 거다.
“우리 김 대표님이 눈이 높으시구나.”
“낮은 편은 아닙니다.”
대답한 순간 행사장 앞으로 검은 색 밴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차량 넘버. 파인엔터 소속의 차량이다.
“어? 김별 씨 차입니다.”
강상훈 피디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리고 모든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시에 차 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