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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6)
“어린 나이에 스타가 돼서 그런가… 말이 경솔하네요.”
정윤석 감독은 억지로 화를 눌러 참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 없이 입을 놀리는 스타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 거 다. 하지만 은하는 그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있었다.
“미안해요. 난 또 감독님께서 엄청 부자이신 줄 알고….”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눈빛이다. 그리고 정윤석 감독은 방송국에 소속된 연출자다. 한마디로 월급쟁이나 다름없는데 작품을 잘 만들었다고 엄청난 성과급이 나올 리 없다는 걸 은하가 모를 리 없다.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는 걸 우현도, 정윤석 감독도 모를 수 없었다.
“은하야! 뭐 하는 거야!”
너무 놀라 은하를 나무랐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리며 아예 시 피해버렸다. 우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거다.
파업이라는 건 절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수많은 비난 어린 눈초리와 혹독한 경제난을 야기하기에 그 모든 걸 이겨낼 각오가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남들이 함부로 파업에 대해 ‘잘 했다’, ‘못 했다’를 언급할 수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신념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크흠…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네요.”
정 감독은 마음이 상해 읽던 시놉을 우현에게 던지듯 건네고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띄웠다. 그런데 은하는 아직 할 말이 남았나보다.
“우리 아빠가 더블 드래곤 자동차 직원이었어요.”
순간 정 감독은 차 문을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은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회사가 넘어가고 대량해고 사태가 났죠. 그런데 운이 좋게도 우리 아빠는 그 해고 사태를 피할 수 있었어요. 나랑 엄마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빠는 죄책감이 심했는지, 아니면 내 생각보다 정의감이 대단했는지 해고자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어요.”
정 감독은 다시 자리에 앉아 은하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그렇게 7년이 지나갔어요. 회사에서는 아빠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했고 집은 빨간 가압류딱지들로 도배가 됐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손해배상으로 생긴 빚은 10억이 훌쩍 넘었죠.”
“…….”
우현도 정 감독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가 나와 엄마를 사랑한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로 인해 나와 엄마, 그리고 동생이 받았던 고통은 너무 끔찍했어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서 원망도 해요. 전 신이 아니거든요. 그 모든 통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만큼 너그럽지도, 쿨하지도 않아요. 감독님, 파업 5년 했다고 하셨죠?”
“…….”
은하는 고개를 돌려 정 감독을 빤히 바라보았고 정 감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게 긍정의 대답이라고 생각한 은하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고 말을 이었다.
“하… 우리 아빠가 파업하고 5년쯤 됐을 때, 어땠더라…. 엄마는 파출부 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보다는 돈 벌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을 때네. 아빠는 아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됐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니까.”
은하의 말을 정 감독이 끊었다. 듣고 있기 고통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은하는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5년 하셨으면 많이 하셨어요. 솔직히 난 대표님과 생각이 달라서 꼭 감독님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감독님 지금 모습을 보니까 그냥 지나갈 수가 없네요. 파업하는 게 잘못됐다는 거 아니에요. 감독님의 신념에 따라 하는 건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지만 나중에 과연 감독님의 가족들이 감독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흐음….”
“감독님 능력 있다면서요. 그럼 작품 잘 만들어서 유명인이 된 다음에 다시 공론화를 시키든 하세요. 그게 실질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아무도 보지 않는 천막 안에서 버티는 것보다는 말이에요.”
은하의 말이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파업을 그만두기 위한 명분으로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죄송합니다. 은하가 잘 해보려는 마음에 실수를 했네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일단 시놉은 가져가서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정 감독은 우현이 억지로 챙겨준 시놉시스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우현은 그를 따라 내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은하가 나쁜 마음으로 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가 정윤석 감독님과 같이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꼭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그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너 왜 그런 이야기 안 했냐?”
뒤에 앉은 은하에게 슬쩍 물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집이 어렵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괜히 미안해졌다.
“뭐가?”
“아까 네 아버지 이야기.”
“응, 그거? 뻥이야.”
“뭐?”
순간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어이가 없어 잠시 운전을 지속하다 빨간 신호에 걸리자 몸을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바부탱이….”
“야! 진짜 뻥… 아니, 거짓말한 거야?”
“그래, 우리 아빠는 회사 다니기 싫어서 때려 치고 나와 장사하다가 망한 거야. 파업은 무슨….”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너 근데 왜 그랬어?”
“내가 겪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친구가 그랬거든, 고등학교 때. 걔는 나랑 있을 때 그렇게 많이 울었어. 그래서 잘 알지. 얼마나 지옥 같이 힘든 생활을 하는지 말이야. 그래서 아까 정 감독이 결혼했다고, 처자식도 있다고 하니까 막 화가 나잖아. 그때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야, 그렇다고 그런 거짓말을….”
“누구 이야기면 어때? 내가 소설 쓴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있는 이야긴데?”
입이 툭 튀어나오고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하는 걸 보니 더하다가는 치도곤을 면치 못할 것 같다.
“그, 그래. 하여튼 마지막에 보니까 고민하는 것 같더라.”
“그래야지. 솔직히, 그 감독님과 하든, 못 하든 난 상관없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감독님과 같이 했으면 좋겠네.”
“왜? 거짓말까지 해서 나중에 들키면 어쩌려고?”
“어쩌긴? 그 땐 미안하게 됐다고 하면 되지. 하여튼 간은 코딱지 만해가지고…”
때마침 신호등이 바뀌었기에 몸을 돌려 운전에 집중했다.
“크흠… 어쨌든 밥이나 먹으러 가자.”
“걱정 마. 딱 보니 며칠 안으로 연락 올 거야.”
뒤에서 은하의 장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울 아빠가 장사 망하고 나서 내가 다시 회사 들어가서 일하라고 난리쳤을 때, 딱 저 표정이었거든. 며칠 뒤엔 장사 접고 다시 회사 출근하더라.”
“히야… 그래도 다시 회사 출근하셨다는 게 대단하네.”
“기술이 있으셨거든. 물론 퇴사 전보다 조건이 안 좋아지긴 했는데, 어쩌겠어?”
“아버님한테 잘해드려, 고생하시는데….”
그로서는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이야기에 괜스레 충고 한 마디 하니 뒤에서 코웃음 친다.
“헐… 웃겨 아주. 지금 우리 아빠 뭐하는지 알아? 나 연예인 된 이후로 회사 때려 치고 또 사업한다고 일 벌리다가 다 날려먹으시고는, 그렇게 사고만 치고 다닐 바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라고 하니까 진짜로 놀러 다니고 계셔. 세상 걱정이 없는 사람이야.”
“아… 그, 그래?”
새삼 남의 가정에 함부로 충고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은하가 출연한 ‘지옥도시’는 400만을 돌파하며 순항을 거듭했고 지나가 출연한 ‘미씽유’는 마지막회 시청률 31.2%를 찍으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미 중국 수출이 확정된 ‘미씽유’ 때문에 지나는 근 한 달간 중국행 스케줄로 꽉 차 버려, 가기 전에 회사 식구들과 회식을 했던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아우, 머리야.”
꿀물을 먹으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민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윤석 감독님이라는 분이 오셨는데요?”
“아, 들어오라고 하세요.”
은하의 말과는 달리 사흘이 흘러도 연락이 없기에 그냥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딱 나흘째에 정윤석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음을 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정 감독은 전과는 달리 깔끔한 회사원 같은 모습이었다. 위아래 갖춰 입은 정장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그리고 시계까지.
“회사는 정리하신 건가요?”
“네, 회사에서는 제가 퇴사한다니까 좋아하더군요. 퇴직금을 미리 정산해서 남은 게 없긴 하지만 그래도 깔끔히 정리하고 나왔습니다.”
“같이 파업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은하 씨 말처럼 5년이니까요. 5년 동안 해왔으니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오히려 다들 잘 됐다고 하는 반응에 제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같이 파업하는 사람들 중에 일자리가 생겨 떠난다고 하면 축하해줬을 것 같아요.”
“다들 좋은 사람들이네요.”
“맞아요. 좋은 사람들이 잘 살아야 하는 건데 세상이 그렇게 쉽지 않네요. 어쨌든 회사를 관두고 새로운 작품을 한다고 하니까 집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축하드립니다.”
“글쎄요. 축하할 일이긴 한데 은하 씨 말을 듣고 집에 가보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구요. 언제나 생기 넘치던 마누라 눈빛은 육아와 생계를 동시에 챙긴다고 완전히 죽어 있었어요. 제 신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식구들에게는 참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요.”
“흐음….”
뭐라고 대꾸해줄 말이 없다. 정 감독도 위로를 받으려는 게 아닌지 시선을 다른데 두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한 선택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5년 전으로 돌아가도 전 투쟁을 선택할 거예요. 다만… 이제 5년간 희생해준 마누라와 아이들을 생각해 이쯤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대신, 이번에 ‘네플릭스’에서 방영한다고 하셨죠?”
“그건 또 어떻게….”
“시놉을 봤더니 역시 최은미 작가라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인터넷으로 기사 검색을 했더니 찾을 수 없어서 아는 피디랑 작가에게 연락했더니 바로 ‘네플릭스’ 이야기가 나오던데요? 요즘 작가들 사이에서 파인엔터 이야기가 화제라고 하던데… 제가 회사를 잘 고른 것 같아요.”
“하하하! 맞습니다. 아무나 원한다고 ‘네플릭스’가 투자하는 거 아니죠.”
“잘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투쟁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거든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뭐, 감독님께서 이후에 정치적인 발언을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감독님의 정치 성향에 태클 걸 생각은 없으니 마음껏 하서도 됩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리고… 은하 씨와 언제 식사라도 하죠.”
“네? 아, 그럼요. 주연배우와 감독님이신데….”
“그것도 있지만, 그 때 흥분해서 은하 씨한테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사과도 하고 싶고… 또, 은하 씨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아는 작가가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만나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다시 한 번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그, 그러세요?”
이 뒷수습을 또 어찌해야 하나? 뭐, 은하가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