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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4)
“네? 아… 그건 어떻게…?”
아직 기사화가 되지 않은 내용인데 최은미 작가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후훗,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고 그러세요? 드라마 작가 일을 하다보면 의외로 인맥도 많이 생기고 들리는 말도 많아요.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어쩌다 들렸다기보다 일부러 귀를 열어놓고 살죠. 많은 정보가 있어야 많은 아이디어가 생기니까요.”
“그렇군요.”
“사실 윤 작가님이 이번에 미국에 가게된 것 때문에 작가들 사이에서는 말들이 많았어요. 모르셨죠?”
“네, 전혀 몰랐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후훗. 전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의사도 되고 싶었고, 피아니스트도 되고 싶었어요. 그러다 20대 중반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운이 좋아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죠.”
“운만 가지고 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죠, 특히 작가라는 자리는…”
“글쎄요. 어쨌든 여성 작가가 장르물을 쓴다는 것에 주변의 우려가 많았어요. 하지만 저는 주변의 우려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죠. 왜 그랬을 거라 생각하세요?”
“자신이 있어서?”
“하핫! 아니에요. 전 그때만 해도 자존감이 엄청 낮았거든요. 그런데도 장르물을 고집했던 건,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온 추리소설과 스릴러소설이 너무 좋았고, 미드 CSI를 비롯한 수사물들이 너무 재밌었거든요. 그래서 주변의 우려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아… 대단하시네요.”
“대단할 건 없어요.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제 초기 작품이 어땠는지.”
“솔직히 장르물을 좋아하는 저로서도 봐주기 힘들 정도긴 했죠.”
“푸하하! 이야… 저는 빈말이라도 좋았다고 해주실 줄 알았는데… 실망이에요.”
“제가 또 작품에 관해서는 빈말을 하지 않거든요. 작가님들은 그걸 더 좋아하시더라구요.”
“맞아요. 재미없어도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은 널렸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인스턴트커피를 잠시 쓰다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미드로 진출하게 되는 작가가 혹시라도 한 명 나온다면 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웃기죠?”
이건 최은미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정말 윤해연 작가가 미드에 진출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윤해연 작가가 이번에 리메이크 제작을 위해 미국에 가게된 걸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와… 정말요?”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인지 입을 반쯤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제가 백프로 확신하고 보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이 바닥에서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김 대표님 아닌가요? 그런데 성공의 확신도 없이 윤 작가님을 보낸다고 하니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최은미 작가도 아직 흘러가는 상황을 완전히 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잘 모르시는구나. 이거 파인엔터 쪽에서 먼저 제의한 게 아닙니다.”
“그럼요?”
“마이크 펄이라는 미국 측 프로덕션에서 파일럿으로 제작해보고 싶다고 먼저 컨텍해 왔었어요. 거기다 그쪽에서는 윤해연 작가를 파일럿 제작에 합류시켜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윤 작가가 가게된 거죠.”
“와… 완전 대박이네요?”
“일단 파일럿으로 제작하는 게 결정된 건 상당히 어려운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과정을 건너뛴 건 정말 잘 된 일이죠. 그런데 어렵게 파일럿을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정규 편성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라 결론이 나 봐야 잘 된 일인지 알겠죠.”
그녀는 우현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흐음… 대표님은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네요?”
“사실 우리 쪽에 그렇게 큰 이득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 쪽에 개런티가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윤 작가님과 우리 프로덕션이 많은 경험과 인맥을 쌓는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이익은 없어요. 일종의 어음이랄까?”
“아…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네플릭스’에서 드라마를 하니까…”
“맞습니다. 진짜는 이거죠. 이번에 성공하게 되면 리메이크를 떠나 미국 시장에 직접적으로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우와… 대표님이야 말로 대단하시네요.”
“대단할 거 없습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전 세계를 홀리는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가님들이죠.”
사실 우현이 무언가를 만들어낸 건 없다. 그저 잘 하는 사람들을 적당히 이용해가면서 돈을 벌어왔을 뿐.
“이거 그냥 재밌겠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는데 부담감을 팍팍 얹어주시는데요?”
“원래 적당한 부담감이 있어야 작품에 더 도움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부담감이 전혀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하하하!”
우현의 너털웃음에 최 작가도 같이 웃으며 동의했다.
“좋아요. 그럼 이거 잘 만들어보자구요. 그리고… 이거 잘 되면 대표님의 세계화 도전에 제가 한 발 걸쳐도 되죠?”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냥 같이 참여하고 싶다는 뜻인지, 아니면 아예 전속계약을 맺고 싶다는 뜻인지…
“그 말은 파인 엔터의 식구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됩니까?”
“흐음… 사실 지금까지 소속사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방송사나 제작사를 찾아가야 할 필요도 없었고, 굳이 케어 받으면서 내 수익을 배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녀 정도의 톱작가가 되면 온갖 제작사와 방송사에서 제발 작품 좀 만들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통에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그러니 굳이 소속사를 가지지 않아도 드라마 작가 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있을 리가 없다.
“알고 있죠.”
“그런데 대한민국이 아닌 더 넓은 세계가 유혹하니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네요. 솔직히 욕심이 나기도 하고…”
“그럼 이참에 바로 계약서 쓸까요?”
“푸하핫! 아니에요. 이왕 계약서 쓰는 거 제대로 된 몸값을 받고 싶거든요.”
그녀의 배포를 볼 수 있을 만큼 야심만만한 대답이다.
“이야… 이번에 제대로 홈런 쳐보겠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야 저도, 대표님도 제가 어느 정도까지 통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좋습니다. 이번에 성공하게 되면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계약으로 보답하도록 하죠.”
“아하핫! 좋네요. 막 기대돼요. 으음… 이거 ‘네플릭스’ 사람들이 엄청 고마워지네요. 제작사도 이렇게 잘 골라주고.”
“식사 안 하셨다면 식사라도 같이 할까요?”
“좋죠. 아직 계약 안 했으니까 오늘은 제가 살게요. 제작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저의 귀여운 뇌물이라고 봐 주세요.”
“아이고, 그럼요. 만전을 기해야죠. 그럼 나가시죠.”
그녀와의 식사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 하나 없이 그저 드라마 시장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이야기하며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그녀는 우현의 캐스팅을 존중하기로 했고, 은하의 여주인공 캐스팅에 손뼉을 치며 수락했다. 또한, 연출자 선정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우현에게 맡긴다고 했다. 대신 남자주인공 캐스팅에는 그녀가 원하는 사람으로 넣자고 했다.
이번 작품을 연출할 사람으로는 최철성 감독을 생각하고 있다. ‘밀실’과 ‘28시간’을 연출한 최철성 감독은 장르물에 특화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하고 긴장감 넘치는 연출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
특히 별이와 ‘28시간’을 촬영하면서 다음 작품에 은하를 달라고 조건을 걸었던 만큼 이번 드라마 촬영에 그를 연출자로 앉힌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 돼. 드라마는 안 한다고.”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최철성 감독은 생각지도 못하게 완강히 거부했다.
“왜요? 이번에 여주인공 은하로 갈 건데, 같이 안 하려구요?”
“유은하도 좋은데, 드라마는 영화랑 다르단 말이야. 난 자신 없다.”
“이거 왜 이러실까? 이거 되는 작품입니다. 나 알죠? 내가 된다고 해서 망한 작품 있어요? ‘밀실’ 대박 났지, ‘28시간’은 지금 부국제 개막작으로 선정돼서 개봉만 기다리고 있지.”
“알지, 하지만 이건 달라.”
“뭐가 달라요? 그리고 이거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거 아닙니다.”
“방영을 안 한다고? 그럼?”
“이거 ‘네플릭스’에서 방영할 거예요. 전 세계적인 영화, 드라마 스트리밍 업체인 ‘네플릭스’에서 감독님 이름으로 방영하게 될 거라구요. 이 기회를 놓치겠다는 겁니까?”
“어디? 네플릭스? 뭐야… 고작 인터넷으로 방영하는 드라마 찍으라고 나한테 전화한 거야?”
이 인간이 지금 21세기를 사는 인간이 맞는 건지, ‘네플릭스’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곳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어이가 없어 5분간 지금까지 인터넷 스트리밍 시장이 어떻게 커왔고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곳인지 설명했지만 그는 귓구멍에 오뎅이라도 박힌 것처럼 들어 처먹지를 않았다.
“하여튼 안 돼. 사실 나 이번에 영화 하나 들어가기로 했다.”
역시 무조건 안 된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뭐야? 결국 다 핑계였구만? 형 진짜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
“야, 나도 이번에 좀 먹고 살자. 나 혼자 잘 되자고 이러는 거 아니다. 나만 바라보는 내 식구들도 있어. 그것도 좀 생각해줘야지.”
“허… 도대체 뭔데 그래요? 누가 꿀단지라도 던져줬어요?”
“나 하고 싶었던 영화 있는 거 알지? 이번에 투자 크게 들어왔어. 나 이번 기회 놓치면 진짜 힘들 것 같아서 그래. 미안하다. 다음에는 같이 하자, 알겠지? 미안해. 내가 소주 한 잔 살게.”
그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오… 이 양반이 진짜 아직도 헛꿈 꾸고 있네.”
최철성 감독이 하고 싶다던 영화는 그가 아주 예전부터 조금씩 쓰고 수정하며 공들인 시놉으로 무려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액션영화다. 제작비가 적게 잡아도 수백억이 들어갈 게 분명하다.
중요한 건 그렇게 대규모의 투자금이 들어가서 과연 성공할 만한 영화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가 않다는 게 우현의 생각이다.
뭐, 최 감독의 영화가 망하건 말건 이제 중요한 것은 당장 연출자를 구해야 한다는 것.
다음 날, 아침부터 사무실에 앉아 현재 일을 쉬고 있는 감독 중에 최은미 작가의 시놉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이를 찾기 시작했다.
드라마감독뿐만 아니라 영화감독까지 뒤져가며 찾기를 2시간여. 그러다 눈에 띄는 이를 발견했다.
“누구 만나러 가?”
막 옷을 차려입고 나가려는데 은하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응, 그런데 너는 갑자기 왜 왔어?”
“나, 저녁에 회사 근처에서 인터뷰 있거든. 그래서 오빠랑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일찍 왔지.”
“혜숙 씨는?”
“중무장하고 택시 탔어. 언니는 있다가 2시쯤에 올 거야. 샵 2시 반으로 예약했거든.”
“어떡하지? 나 지금 누구 좀 만나러 가야 해. 점심은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은하는 많이 실망했는지 입술을 씰룩였다.
“치… 누구 만나는데?”
“정윤석 감독이라고 알아?”
“정윤석 감독? 누군데?”
그녀는 들어본 적 없는 눈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꽤 활발하게 활동하던 감독인데, 지금은 일 안하고 있어. 실력이 녹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왜 일을 안 하는데?”
“파업 중이거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