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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3)
마흔 정도로 보이는 그 노란머리의 외국인은 갈색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전통적인 백인인데 손목에 걸린 롤렉스 시계가 인상적이었다.
그 옆에는 통역으로 데리고 온 30대 중반의 남성이 앉아 영업적인 미소를 띠며 우현의 말에 답했다.
“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한국의 드라마는 한국인들만 보지 않습니다. 이미 KPOP과 K드라마는 전 세계에서 나름의 충실한 고객들을 확보하고 있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
“여기 스티븐 베이컨님께서는 능력 있는 한국의 제작사가 전 세계적인 영화, 드라마 스트리밍 업체인 ‘네플릭스’를 통해 더 많은 기회와 새로운 시청자들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수익은 기본이죠.”
“그런데 이상하네요. 저희는 제작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수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신생업체인데 왜 우리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남자는 곧바로 우현의 말을 스티븐 베이컨이라는 외국인에게 통역했다. 스티븐은 통역의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영어로 말했고 통역은 곧바로 다시 우현에게 말했다.
“스티븐 님은 파인엔터에 대한 이야기를 삼전투신으로부터 들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파인엔터를 최고의 투자처로 꼽았고 그들이 제작하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도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하십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어시스트를 받은 셈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투자를 확정지은 만큼 파인엔터가 더 잘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니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스티븐 님께서는 앞으로 파인엔터와 ‘네플릭스’가 공동으로 협업해 수준 높은 작품들을 스트리밍 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모두 ‘네플릭스’에서 방영해주길 원하는 건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파인엔터의 제작 여건에 맞게 각각의 프로젝트 별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작품마다 방송국에 내보낼지, 아니면 ‘네플릭스’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할지 결정하면 된다는 건가요?”
“그렇죠. 아시다시피 저희 ‘네플릭스’에서 스트리밍 할 드라마나 영화는 상당부분 저희가 투자를 하게 됩니다. 당연히 저희 입장에서도 해당 작품의 성공 가능성과 투자액을 심사해야겠죠.”
“그렇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파인프로덕션에서 진행 중인 차기작이 없습니다.”
“하하하! 대표님은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시네요. 우리는 파인 엔터와 지속적이고 긴밀한 관계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뿐입니다. 만들고 싶은데 투자금이 부족하다거나 세계적으로 더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고 판단했을 때는 언제든지 저희가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거절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다. 특히 미래에 미드 제작까지 생각하고 있는 파인엔터의 입장에서 ‘네플릭스’를 통해 많은 충성 고객들을 새로 만들어 낸다면 커다란 힘이 될 게 분명하다.
“감사합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네요.”
“그럼 오늘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대표님께서 싫어하신다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통역을 맡은 이는 007서류가방에서 파일철을 하나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받아서 열어보니 놀랍게도 최은미 작가의 시놉시스였다.
최은미 작가는 여성이지만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장르물의 대가다. 처음 데뷔하고 몇 작품에서는 날카로운 면이 있긴 해도 구성이 어설프고 어지러운 면이 있었지만 작품이 늘어날수록 단점은 사라지고 장점은 더욱 늘어나는 성장형 작가로 로코 3대 작가에 버금가는 명성을 쌓고 있었다.
스티븐은 우현이 시놉을 살피는 걸 보면서 말했고 통역은 다시 한국말로 옮겼다.
“파인엔터도 그렇겠지만 저희 역시 한국의 유명 작가들과의 작업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최은미 작가와 차기작에 관해 상당기간 많은 교감이 있었고 해당 시놉으로 제작을 결정할 수 있었죠.
많은 제작사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저는 삼전투신의 눈을 믿는 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러 투자 결정으로 저에게 상당한 믿음을 주었거든요. 때문에 저는 파인 프로덕션이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아주 기대가 큽니다.”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시놉시스는 대충 읽어봐도 무척이나 흥미롭고 몰입도 역시 높아 보였다. 게다가 이걸 ‘네플릭스’에서 스트리밍 해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파인엔터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올라갈 게 분명하다.
“좋습니다. 저희가 해 보죠.”
통역을 통해 우현이 승낙했음을 들은 스티븐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자세한 제작 일정은 파인 프로덕션에서 진행해 주시고 최은미 작가님 연락처는 저희가 작가님께 말씀드린 후 따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라도 같이 하실까요?”
“좋습니다. 한식 아주 좋아해요.”
“잘 됐네요. 근처에 김치전골 잘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로 모시죠.”
그들과 점심을 함께한 후 사무실로 들어와 파인프로덕션의 강상훈 피디를 불렀다. 이제는 같은 건물에 있기에 5분도 되지 않아 강 피디가 헐레벌떡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네, 앉아요. 부산국제영화제에 ‘28시간’ 출품하는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후에 기사가 올라가고 나서 벌써부터 관련 문의가 SNS를 타고 이어지고 있구요. 관심이 상당합니다. 해외에서도 관심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래서 파리에서 영화 수출을 위한 진행은 모두 접은 상태고 이번 부국제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흐음… 잘했어요. 그리고 ‘미씽유’ 리메이크 건은 어떻게 돼 갑니까?”
“윤해연 작가가 참여하는 게 확정되고 나서 마이크 펄 프로덕션 측이 각색에 참여할 작가를 모집하는 것 같습니다. 꽤나 거물급을 모셔올 생각인 것 같던데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누가 될지는 잘 모르겠구요.”
“4월까지 마무리하고 5월에 광고 행사가 진행된다고 했죠?”
“네, 이게 1년에 한 번 광고주와 방송사가 광고시간대를 거래하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매년 폐지되거나 신설되는 게 이때 결정되죠. 때문에 지난 시즌 성적을 참고해서 80%정도의 광고단가를 미리 결정한 상태에서 시즌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그때에 가부간의 결정이 난다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미드 시즌이나 썸머 시즌이 아니라 정규 시즌에 방송이 돼야 돈이 되고 시청률도 많이 나옵니다.”
“미드 시즌이랑 썸머 시즌이 정확이 어떤 겁니까?”
“아, 미드 시즌은 정확히 Midseason Replacement로 정규시즌으로 시작했지만 시청률이 좋지 않아 조기 종영했을 때 땜빵용으로 들어가는 걸 말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4부작 단편 드라마와 비슷하면서도 다르죠. 그리고 썸머 시즌은 6월부터 9월 중순까지 방영되는 드라마인데 이걸 왜 따로 두냐면 보통 정규 프라임 타임 시즌이 9월 중순에서 5월까지 이어지거든요. 그 사이에 짧게 들어가는 겁니다.”
“아… 복잡하네.”
“하하, 우리 입장에서는 사실 어떤 시즌에 들어가든 그닥 상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투자된 돈도 없고 하니까… 윤 작가랑 강 피디가 많이 배워오면 그걸로 만족하는 상황이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걱정하지 마십쇼.”
“그리고 강 피디를 부른 게, 오늘 점심 전에 ‘네플릭스’에서 왔다 갔어요.”
“‘네플릭스’ 말입니까?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우리랑 같이 장기적으로 협력해보자고 하더라구요.”
강상훈 피디는 엄지를 치켜들며 기뻐했다.
“와… 대단하십니다! ‘네플릭스’면 전 세계적인 스트리밍 업체인데… 파인엔터가 안정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신 겁니다.”
다른 업체라면 강 피디의 말이 전적으로 맞겠지만, 만들기 전에도 대략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우현에게 있어서 ‘네플릭스’의 제안은 고맙기는 해도 구세주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하하, 이제부터 잘 해야죠.”
그렇다고 강 피디 앞에서 ‘원래 그딴 거 없어도 우리는 무조건 잘 할 수 있어요’라고 할 수는 없어 겸양을 떨어야 했다.
“그럼 앞으로 ‘네플릭스’와 같이 작업하는 겁니까? 물론 투자는 그쪽에서 전적으로 대는 거죠?”
“모든 작품을 ‘네플릭스’와 같이 하는 건 아니에요. 작품마다 어디와 할지 우리가 정하면 되는 거고, 이번에는 그쪽에서 제안을 해 왔어요.”
우현은 아까 통역에게서 받은 시놉시스를 강 피디에게 보여주었다.
“최은미 작가가 쓴 시놉이에요. 요즘 대세 장르인 수사물에 판타지를 엮었어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내용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박자가 빨라요.”
“몰아친다는 뜻이네요.”
“네, 아마 3, 4회까지는 전개가 무척이나 빨라서 몰입감을 확 높일 겁니다. 특히 최은미 작가가 디테일이 좋아서 어느 정도 손발이 맞는 연출이랑 같이 작업하면 시너지가 극대화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연출은 윤평식 감독이 하게 되는 건가요?”
그의 입장에서는 파인프로덕션에 하나 밖에 없는 감독이니 그를 추천한 것이다.
“아니요, 윤 감독은 로맨스에 특화된 감독이라 섬세한 감정이나 과장된 연출에 능해요. 이런 장르물과는 안 맞죠.”
“그럼 누구를…?”
“일단 윤 감독한테는 다음 작품에 같이 하게 될 테니 푹 쉬고 있으라고 하시고 감독은 제가 찾아볼게요.”
“알겠습니다. 최 작가는 제가 연락해볼까요?”
“최 작가는 내가 연락해서 이야기할 테니까 일단 촬영 스태프 먼저 꾸려야 하지 않겠어요? ‘네플릭스’쪽에서 최 작가님 연락처 준다고 했으니까 받으면 바로 캐스팅하고 연출자 정해서 촬영지 헌팅해야 하니까 준비하도록 하세요. 우리 쪽 스태프들 전부 스탠바이 상태니까 오래 걸리지 않겠죠?”
“물론입니다. 다들 언제 작품 시작하나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럼 제가 가장 바쁘겠네요. 연출자 선정이 가장 시급하니…”
“캐스팅 디렉터는 어디까지 생각해야 합니까? 조연만 할까요?”
강상훈 피디 입장에서는 분명 대략적인 캐스팅까지 우현의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를 보며 슬쩍 묻는다.
“일단 여주 빼고 전부 진행한다고 생각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사실 여주인공으로 은하를 반 낙점한 상태였다. 별이도 생각했었지만 장르물보다는 로코를 통해 아직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늦은 오후가 돼서야 ‘네플릭스’쪽에서 최은미 작가의 연락처를 보내왔다. 그런데 뜬금 최은미 작가가 아예 파인엔터 사무실로 갈 거니 굳이 연락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전했다.
“안녕하세요.”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최은미 작가는 마치 여대생들처럼 운동화에 청바지, 쌀쌀한 날씨에 맞춘 두꺼운 니트로 된 가디건을 걸치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제가 연락드리려고 했는데요. 안 그래도 저녁 시간인데 식사라도 하시면서 이야기하실까요?”
“이야기하고 나서 밥 먹어요. 밥 먹으면서 일 이야기하면 체하잖아요.”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동안인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전에도 최 작가님하고 같이 하고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같이 일하게 됐네요.”
“에이… 제가 얼마나 은하 씨 얼굴 좀 보여 달라고 졸랐는데요. 너무하신다, 아하하!”
사실 최 작가가 은하를 원하긴 했었지만 장르물이라 일부러 피하긴 했다.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필 스케줄이 꼬여서 못 하게 된 거죠. 대한민국에서 최은미 작가님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배우가 어디 있습니까? 하하하!”
“정말요? 그럼 다행이고, 아하하. 아, 시놉은 읽어 보셨다고 하셨죠?”
“네, ‘네플릭스’ 사람들이 가고 난 다음에도 다시 정독해서 읽었습니다. 재미있던데요?”
“다행이네요. 요즘 들리는 말로는 김 대표님이 흥행 사냥꾼이라면서요? 아주 손만 댔다하면 다 대박이라던데 저도 이번에 대표님 기운 좀 받아보겠어요.”
“제가 최선을 다해 기운을 전파하겠습니다, 하하하.”
어색한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일부러 더 과장해서 웃는데 그녀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에 윤해연 작가님 미국 간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