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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1)
“김우현입니다.”
“반갑습니다. 나 백창준입니다.”
마흔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상당히 젊다.
“아이고, 마이더스 사장님이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우현의 입에 마이더스라는 단어가 올라가자 소연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우리 언제 식사나 한번 합시다.”
잔가지 없이 할 말만 딱 던진다. 그렇기에 더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그러시죠. 문자로 장소와 시간 알려주시면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화 통화로 이야기하기에는 서로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차라리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줄 맞추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스케줄이야 조정하면 되죠. 알려주시면 제가 맞춰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점심 때 뵙도록 하죠. 장소는 문자로 찍어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전화를 끊고 나니 소연이 눈짓으로 불러낸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새로 마련한 대표실로 들어왔다.
이사하며 대표실도 전보다 공간이 넓어지고 새로운 집기와 가구들을 마련했다. 벽면을 따라 길게 이어진 노란 조명이 사무실을 더욱 아늑하게 만들었다.
소연은 새 대표실을 찬찬히 둘러보다 소파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소파가 바뀌었네요?”
아이보리색 소파는 방금 비닐을 뜯어 가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네. 전에는 중고로 샀는데, 이번에는 새 걸로 샀습니다. 이게 다 회사 식구들 덕분이죠.”
“저야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벌어다 준 돈도 없는데요. 매출은 은하가 제일 많이 벌어다주나요?”
“아뇨. 돈은 유니가 제일 잘 법니다.”
“아… 어중간한 기획사는 배우 기획사가 괜찮지만 잘만 키우면 확실히 가수 기획사가 돈을 잘 벌긴 하네요.”
“행사 단가가 워낙 대단해서요. 그래도 은하나 소연 씨 정도면 몇 년 안에 수십억 버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흐음… 사실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많이 벌기도 했고… 지금까지 번 돈 쓰기만 하면서 살아도 충분하니까. 아까 백창준한테 전화왔던 거… 뭐라던가요?”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 사설이 길었던 거다.
“내일 만나자고 하던데요? 그래서 만나기로 했구요.”
“이상한 소리를 할지도 몰라요.”
소연은 은하가 우현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걸 모른다. 그렇기에 이미 알고 있다고 그녀 앞에서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
“황금알 낳는 거위 같은 소연 씨가 우리 회사로 왔으니 험담을 하며 깎아내릴 거라는 건 당연히 짐작하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소연은 다리를 꼰 채로 팔짱을 끼고 우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10초 정도 지나자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창준과 나는 그냥 대표와 소속배우 사이는 아니었어요.”
순간적으로 알고 있다고 헛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그녀의 아련한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토해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뭐… 남녀 사이는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모르는 거죠.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아뇨, 괜찮지 않을 거예요. 분명 나와 관련된 이야기로 어떻게든 상황을 지저분하게 끌고 가려고 할 테니까.”
그녀의 계속된 우려에 피식 웃으며 상석에 앉았다.
“소연 씨, 난 소연 씨와 백창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앞으로도 알지 못할 거구요.
걱정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소속 아티스트 팔아서 잘 되는 사장 없다는 거.
그 인간의 수준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자기 스스로 바닥까지 파고들면 결국 지가 지 무덤을 판 걸 알게 되겠죠.”
“그 사람은 주변에 친구가 많아요.”
“알죠. 그리고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네? 설마 백창준을 돈으로…?”
“하하하! 그 인간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익히 알죠. 설마 돈을 먹이고 입을 잠글까요? 그만 신경 쓰시고 대본에 집중하세요. 이 일은 제 일입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해요. 알겠죠?”
자신만만한 우현의 태도에 그녀도 적지 않게 안심했는지 가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대표님만 믿을게요. 흐음… 5년만 빨리 회사를 차리시지…”
그러게… 조금 더 일찍 연예계에 발을 담갔어야 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가끔 한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그때는 제가 한창 차를 팔고 있었을 때라… 그때 차라도 한 대 사시지 그러셨어요?”
“난 그 차 별로예요. 디자인이 영…”
“하하하, 차 볼 줄 아시네.”
그녀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이후 소연과 작가들이 작품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직원들과 같이 뒷정리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맞춰 힐툰 호텔로 향했다. ‘그냥 조용한 음식점 아무 곳이나 가서 먹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장소를 상대방에게 정하라고 했으니 투덜거리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12시 하고도 10분이 지났을 때 호텔의 한 중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예약된 룸에는 40대 중반임에도 마치 30대 중반처럼 보이는 남자가 도착해 있었다.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앉으시죠.”
“여기 중식당은 처음인데, 맛이 괜찮습니까?”
“조금 비싸긴 해도 이 집보다 맛있는 중식당은 우리나라에 몇 없습니다. 일단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 하죠.”
“그러시죠. 저도 배고프면 머리가 안 돌아가서… 하하.”
1시간 가까이 코스 요리가 이어졌지만 그 사이에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 빼고는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현으로서는 그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모르기에 먼저 입을 열 수 없었지만 백창준 역시 인내심이 상당해 보였다.
모든 식사가 끝나고 차로 입가심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백창준의 입이 열렸다.
“참 공교롭게 됐습니다. 은하도 그렇고, 소연이도 그렇고…”
둘 다 파인 엔터로 가게 된 걸 이르는 말이다.
“글쎄요. 원래 은하는 제 배우였습니다. 소연 씨는 저도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요.”
“은하가 왔을 때가 기억나네요. 꽤 시끄러웠는데, 참 강단 있었죠. 보통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은하의 그때 이야기를 듣는 건 그리 기분 좋지 않다. 특히 그의 입에서 듣는 건 더욱.
“은하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가 있나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은하는 원래 제 배우였습니다. 잠시 다른 곳에 있다 본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거죠. 흐음… 강단 있는 건 소연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 성격 하는 분이신데…”
일부러 강소연으로 화제를 돌렸다.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연이는 제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결국 이걸 원하는 거였다.
“그래요? 소연 씨 생각은 다르던데요?”
“김우현 대표님, 저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처리되기를 바랍니다.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죠.”
식사 후 처음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강렬한 그의 눈빛은 거절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저 역시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소연 씨와 협상할 때는 가만있다가 이제 와서 저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계약관계도 변호사 입회하에 깔끔하게 해결된 것으로 아는데, 아닙니까?”
“세상일을 모두 법대로 해결하려고 하면 그것만큼 삭막한 건 없죠, 후후후…”
그는 품속에서 전자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세상 참 각박해졌습니다. 이제는 식후땡도 하기 힘들어요, 눈치 보여서…”
“아무리 하고 싶어도 처자식이 있으면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들 건강도 생각 하셔야죠.”
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이 바닥에 몇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 우현의 언급이 예사롭지 않았던 거다.
“하하하! 이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얻어맞았네. 누가 알려주던가요? 소연이? 아니면 은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 고상을 빼고 앉았던 그의 분위기가 급격히 변했다. 마치 눈앞의 먹이를 둔 하이에나처럼 우현을 노려본다.
“둘 다 아닙니다. 뭐, 그게 그렇게 큰 비밀이라고… 그리고 그걸 비밀로 할 정도로 급하던가요? 솔직히 궁금해서 그러는데… 딴 여자랑 하고 싶으면 차라리 룸싸롱을 가지, 왜 소속 배우를 건드리고 다니세요?”
“뭐, 뭐야?”
그는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거기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거리고만 있을 뿐.
“아,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그래, 나 강소연이 만났다. 그래서? 기자들 앞에서 까보려고?”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십니까? 우희연이랑 만났다면서요?”
“뭐? 무슨 개소리야!”
강소연이야 이미 나간 사람이니 그녀의 스캔들이 터진들 무슨 상관이겠냐만… 아니, 오히려 그녀의 스캔들이 터지며 몰락하길 원하겠지만 우희연과 자신의 스캔들이 터진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개소리가 아닐 걸요?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던데… 그러니까 개수작 부리지 말고 있는 사람들이나 잘 챙겨.”
우현의 달라진 분위기에 그가 잠시 움찔했지만 오히려 반말을 들은 것에 더 흥분했는지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가… 너, 이 바닥에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는 줄 알아? CF랑 드라마 다 끊기고 거지꼴 되고 싶어?”
“하하하! 네가 무슨 수로 CF랑 드라마 출연을 막냐? 그래, 네가 방송국 사장이랑 각 언론사 기자들이랑 친하긴 하지.”
사실 그가 하는 말은 중소기획사 사장으로서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연예계에서 행사하는 권력은 일반인들이 아는 것보다 상당히 강력하니까.
“알면서도 입을 씨부려?”
“내가 알아보니까 네 마누라, 보통 사람 아니던데?”
순간 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포착됐다. 크게 당황하기 시작한 걸 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거기까지 올라간 게 전부 네 능력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주 대단한 마누라를 두셨더만?”
강소연이 소속사를 떠나 자신에게로 왔을 때, 백창준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은하에게서 그가 유부남이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흥신소에 의뢰해 그의 와이프를 찾아냈었다.
“그, 그게 뭐?”
“와이프는 네가 우희연을 스폰해준 걸 아나? 아니다. 내가 생각해 볼 때, 강소연의 스캔들 상대가 너라고 기사가 나면 나보다 네가 더 곤란하게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백창준은 지금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왜? 멋있게 문 쾅 닫고 나가지?”
“네가 내 와이프를 어떻게 알아? 내 뒷조사라도 했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뭐?”
우현은 반쯤 남아 다 식은 차를 후루룩 마시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와 시선을 맞추며 나직이 말했다.
“경고하는데 잘 들어라. X대가리 함부로 굴리지 말고 처자식한테나 잘해. 그리고 한 번만 더 개수작 부리려고 하면 그때는 하늘같은 네 와이프한테 네가 얼마나 우희연과 애절하고 애틋한 관계인지 사진을 포함한 PPT를 만들어 발표할 거거든? 아주 인상 깊은 자리가 될 거야, 이 X만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