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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인생은 선택의 연속 (5)
“네, 개막작으로 초청이 왔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해야죠. 그럼 일정이 조금 늦춰지겠네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언론시사회나 VIP시사회도 자연스럽게 없어지겠고… 제작보고회 역시 필요가 없겠습니다. 폐막 후 3, 4일 뒤에 개봉하는 일정으로 진행할 생각이시죠?”
“그렇게 해야죠.”
“시사회를 거치지 않고 영화제로 바로 가는 거라 홍보 면에서 다른 작품들보다 뒤떨어질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잘 만든 영화는 영화제를 통해 더욱 입소문이 퍼질 테니까요. 그리고 그냥 개봉한 영화보다는 수출까지 생각했을 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라는 타이틀이 큰 도움을 주지 않겠어요?”
“그건 맞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확실히 프로덕션을 인수하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 미드를 제작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아,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은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언제 해외로 진출할지 모르니 항상 영어를 배워두라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주일 뒤, 은하가 출연한 ‘지옥도시’가 3백만을 돌파하며 승승장구를 지속하고 있는 와중에 ‘미씽유’의 촬영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종방연 행사에 참석한 지나의 사진이 포털 대문을 장식했고, 마지막회 시청률이 과연 30%를 넘을까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자! ‘미씽유’의 성공을 축하하며! 건배!”
“축하합니다!”
성적이 좋은 드라마의 종방연은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시청률 30%를 목전에 둘 정도의 대박 중의 대박 작품이라면 스태프와 배우간의 분위기가 좋은 걸 넘어서 차기작에 대한 눈치싸움까지 벌어진다.
물론 그 중심에는 윤해연 작가가 있다.
“몰라, 몰라! 나 미국 다녀와서 이야기해. 그 전에는 아무것도 결정된 거 없다니까.”
손사래를 치는 윤 작가에게 SBC 드라마국의 수장인 성병수 국장이 발렌타인 30년산을 소주잔에 따르며 그녀에게 건넸다. 꽃등심과 발렌타인 30년산은 뭔가 안 어울려 보였지만 윤 작가는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받아 마셨다.
“우리 보물 같은 윤 작가, 이번에 미국 가서 힘들게 일한다, 어쩐다 하지 말고 그냥 푹 쉬다 와. 말만 몇 마디 해주면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괜히 힘들게 아이디어 짜낸다고 고생하다 한국 돌아와서 진 빠지면 어떡해? 응?”
“그래도 안 가면 모를까, 미국까지 가서 놀기만 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나 소속사 있는 거 알면서 자꾸 이래… 차기작은 우리 김 대표랑 말해.”
“당연히 김 대표한테 말하지. 하지만 당장 눈앞에 없으니 어쩌겠나? 다음 작품도 사전제작 하고 싶으면 말하라구.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글쎄요. 그런데 우리 대표님 생각을 내가 알 수가 없네.”
“그게 무슨 말인가? 대표님 생각을 알 수가 없다니?”
“우리 김 대표가 얼마 전에 프로덕션 하나 인수한 거 아시죠?”
“어? 파인엔터가 프로덕션을 인수했어? 난 전혀 몰랐네.”
윤 작가가 성 국장을 향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쯧쯧… 이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다음 작품은 아무래도 김 대표 프로덕션에서 만들 것 같은데, 분위기를 보니까 사전제작은 당연하고, 편성을 나중으로 미룰 것 같던데?”
“뭐야? 편성 안 받고 제작부터 한다고? 그럼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 텐데? 그걸 파인엔터에서 감당할 수 있을까?”
“그야 나도 모르지. 하여튼 요즘 우리 회사 잘 나가잖아요?”
윤 작가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성 국장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편성 확정 없이 제작한다는 건 작품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 대신 작품을 다 찍고 나서는 편성 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 있을 거다.
“요즘 파인엔터가 엄청나게 잘 나가네. 이런 배짱까지 부리고 말이야. 그러다 한순간에 훅 가게 되는 거 알지? 이 바닥에서 편성 없이 사전제작 하다가 말아먹고 돈 날리고 파산한 인간 한둘이 아니야.”
윤 작가는 순간 울컥해서 한마디 확 쏘아줄까 하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괜히 별것도 아닌 일로 싸워서 자칫 기자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다방면으로 민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건 김 대표가 알아서 하는 거니 난 몰라요. 파산하면 하는 거지 뭐. 나야 돈만 따박따박 잘 받으면 되는 거니까.”
“허허… 윤 작가가 이렇게 쿨한지 몰랐네.”
“하여튼 난 내년 초에 미국 가면 4월 넘어서나 들어오니까 4월 전에는 연락하지도 말아요. 나 바빠.”
“크흠… 그러면 내년 중순 때쯤에 하나 쓰겠네?”
“그럴지도 모르죠. 아닐 수도 있고…”
“거 자꾸 사람 놀릴 거야?”
“아휴, 나도 아직 차기작에 대한 구상이 머릿속에 없는데 어떻게 시기를 정해요? 하여튼 성격만 급해가지고… 나는 그만 붙잡고 저기 지나한테나 잘 해줘요.”
“잘 해줄 게 딱히 있나?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김 대표는 왜 예능에 안 내보내는 거야?”
“그건 김 대표에게 물어보시고… 나는 많이 먹었으니까 먼저 일어납니다.”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역삼동에 위치한 새 사무실로 향했다.
“이야… 인테리어 근사하네.”
사무실 이사를 거의 끝내고 직원들과 중국 음식을 시켜 먹고 있는데 윤 작가가 들어섰다.
“오셨어요? 왜 이렇게 빨리 오셨대? 조금 더 먹고 오시지?”
“나 많이 먹었어. 그리고 더 오래 있다가는 체할 것 같더라구.”
“얼굴 빨개진 거 보니까 술 좀 드셨네. 택시 타고 오신 거죠?”
“당연하지. 성 국장이 발렌타인 30년산 가져와서는 어찌나 유세를 부리던지… 꼴깝이야, 아주…”
“크크큭… 그 양반도 웃기네. 예전에 그렇게 못 살게 굴어놓고… 염치가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내 말이! 말 하는 걸 보면 자기가 아주 날 끔찍하게 생각하는 줄 안다니까?”
윤해연 작가와 성병수 SBC 드라마국장 사이에는 사연이 많다. 그녀가 SBC에서 신인작가로 활동하던 시절, 그녀의 첫 작품을 연출한 사람이 성병수 국장이었고, 또 그녀의 입봉 이후로 수많은 작품을 깠던 사람 또한 그였다.
사실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첫 입봉작에서 시청률이 7%밖에 안 나온 이유 중 그의 독선적인 연출을 첫 째로 꼽았다.
이제는 윤 작가가 잘 나간다고 앞에서 설설 기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성 국장과 윤 작가는 사이가 무척이나 안 좋았다고 했다.
“어? 소연 씨가 있었네? 오늘 이사하는 날이라고 왔구나?”
윤해연 작가는 입이 한 다발이나 나와서 신나게 욕을 하다가 구석 자리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강소연을 발견하고는 언제 화가 났냐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할 일도 없고, 저녁에 이주희 작가님도 오신다고 해서 와 있었어요. 하아… 그런데 오자마자 음식냄새로 이렇게 고문을 당할 줄은 몰랐네요.”
“어머어머, 어쩜 그렇게 예뻐? 내가 방금 전에 한 말은 다 잊어. 아휴, 내가 주책이라니까, 아하하! 아, 그리고 이번에 이 작가랑 작품 들어간다고 말은 들었어. 변호사 맡았다며?”
“네. 그래서 대표님께서 붙여주신 변호사 붙잡고 때 아닌 열공중이네요.”
“아하하! 그래도 소연 씨 얼굴과 분위기가 고급스러워서 별거 아닌 걸 말해도 이상하게 믿음이 갈 거야.”
“감사합니다.”
평소에 칭찬을 받아도 항상 무표정하던 그녀지만 윤 작가가 칭찬하니 한겨울에 훈풍이 부는 것처럼 미소가 감돈다.
“음식 남으니까 좀 드세요.”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요리를 넉넉하게 시켰기 때문에 배가 불러오는데도 절반 이상이 남았다.
“내가 껴도 되나? 뺏어 먹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그녀에게 남은 젓가락을 쥐여주니 처음에는 주변 눈치를 슬쩍 보다가 먹기 시작한다.
“오오… 이 집 맛있네. 양장피가 아주 제대로야.”
“맛있게 많이 드세요. 이거 다 남을 것 같네.”
“아, 그런데 성 국장이 김 대표한테 왜 자기네 회사 식구들은 예능 출연 안 시키냐는데?”
“굳이 예능까지 나가야 할 필요가 없어서요. 예능 나가서 잘 하면 모르겠는데 괜히 이미지만 깎아 먹을 수도 있고… 그래도 유니랑 ‘파이브 걸즈’는 꾸준히 나가잖아요? 배우는 작품으로 매력을 표현할 수 없을 때나 나간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래. 그럼 나 이번에 미국 갔다 와서 김 대표가 인수한 파인프로덕션이랑 작품 하겠네?”
“그렇겠죠? 아마 윤평식 피디랑 또 만나게 될 거예요.”
“윤 피디? 왜?”
“모르셨어요? 윤평식 피디랑 파인프로덕션이랑 전속계약 맺었잖아요?”
“정말? 아니 그 인간은 왜 나한테 말도 안 했대?”
윤 작가가 라조기 한 조각을 집고 궁시렁 거리는데 소연이 끼어들었다.
“윤 피디님이 파인프로덕션과 전속 계약을 맺었어요? 그럼 나랑 같은 식구가 된 건가요?”
“음… 회사가 둘로 나눠져 있기는 해도 같은 회사라고 봐야죠. 왜요? 윤 피디 아직도 불편해요?”
그녀는 이미 얼굴로 충분히 불편하다고 피력하고 있었지만 차마 그렇다고 말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뭐… 불편하기 보다는…”
“아마 소연 씨보다 윤 피디가 더 불편할 겁니다.”
“어머! 그건 또 무슨 말?”
“윤 피디가 소연 씨 무서워하거든요, 하하하!”
“웃겨… 내가 뭘 어쨌다고…”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이제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렇게 한참을 수다 떨다 먹던 음식을 다 치우고 정리할 때쯤 이주희 작가가 들어섰다.
“와! 안녕하세요, 작가님. 계신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 걸 그랬어요.”
이주희 작가는 윤 작가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니야. 지금 작품 준비중이라며? 시간 맞춰놓고 다닐 수 있겠어? 그런데 이 작가는 전보다 더 피부가 좋아졌네? 이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는 전부 나한테 왔나 봐.”
“아하하! 아니에요. 작가님도 피부 좋으신데요? 이거 준비하기 전에는 피부 관리도 받고 해서 괜찮아 보이는 것뿐이에요. 그래도 효과가 있긴 하나 봐요?”
“비싼데 다녔나 보다. 나 좀 소개시켜줘.”
“그럴게요. 하하! 아, 소연 씨 안녕하세요. 대본 보낸 건 좀 보셨어요?”
이 작가가 새로 들여 놓은 검은색 가죽 소파 위에 몸을 파묻고 있는 소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네, 저는 변호사라고 해서 엘리트적인 면을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이긴 했어요. 콤플렉스도 많고,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래서 더 매력적이긴 했어요.”
“그렇죠? 지방대 출신 변호사라 그저 캔디 같은 성격을 그리려고 했는데 작가들이랑 의논해보니 오히려 이렇게 작은 결함을 가진 캐릭터가 더 매력적이고 응원하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이런 복합적인 성격에 전문가적인 느낌까지 살려줄 수 있는 건 소연 씨 정도 되는 연기자만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렇고 같이 하는 작가님들도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저 역시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6회까지 나온 대본도 생각보다 더 재밌었거든요. 이 퀄리티 그대로 끝까지 갈 수 있다면 시청률이 낮게 나와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청률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대표님이 무조건 대박 나온다고 장담하셨거든요.”
“후훗!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훈훈한 그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지켜보는데 전화 진동이 울렸다.
지이잉…
“어? 뭐야?”
발신자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다. 마이더스 사장인 백창준. 아니, 언젠가는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