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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인생은 선택의 연속 (1)
주말극이면 기본적으로 시청률 버프를 안고 간다. 따라서 신인 작가라면 주말극에서 빛을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방송사에서 30~50대 주부를 노리기 위해 막장요소를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데 있다.
“이거 막장 없어요. 이주희 작가 생각하면 안 됩니다.”
“괜찮아. 우리도 주말이면 막장극이라는 공식에서 탈피해 보지, 뭐.”
“오호… 국장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당황스럽네.”
“요즘 케이블이 너무 잘 나가니까 우리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내부에서 많이 나와. 오죽하면 나보다 훨씬 보수적인 윗선에서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나오겠어?”
“광고 매출 줄어서 그렇겠네요?”
“그렇지. 요 몇 년간 계속해서 광고 매출이 줄고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어쨌든 9시 가져가려면 가져가고, 싫으면 말고. 우리 김우현 대표 좋을 대로 하시게.”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주말극은 무조건 가족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중이니 9시대 도전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 송유리 작가가 4회를 들고 왔을 때 그 기대감이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어… 곤란한데요?”
그녀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게 아니라 3편까지 본인이 쓴 게 맞아요?”
이틀 만에 4회를 써 가지고 오라고 했던 건 신인 작가들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가늠하고 싶어서였다.
보통 입봉하는 작가들은 초반에 잘 나가다가 중반부터 내용이 이상해지면서 후반에는 생방이나 다름없는 스케줄 때문에 작품을 망쳐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특히 후반에 갈수록 캐릭터가 흔들리고 극의 긴장감을 위해 무리수를 남발하는 등 많은 위험요소를 안고 있기에 대본을 빨리 쓸 수 있는 능력도 작가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 면에 있어 송 작가의 4회분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급하게 쓴 티가 역력하게 나는 게, 캐릭터가 갑자기 튀고 진행과 상관없는 부분이 길게 늘어진다. 게다가 어이없는 말장난에 뜬금없는 키스신까지…“네, 제가 쓴 게 맞는데요, 너무 촉박하다 보니까…”
“알아요. 이틀 만에 60분짜리 대본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런데 이틀이라는 시간이 짧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회까지 썼으면 이후 이야기를 머릿속에는 그려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3회까지 써놓고 아예 그 뒷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게…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잘 됐으니 앞으로도 다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아직 송유리 작가의 실력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3회 분량의 대본만으로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흐음… 저는 이 내용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실질적으로 방송사와 편성 이야기까지 했구요.”
“네…”
“그런데 이 대본으로는 힘들 것 같네요.”
“네? 그럼…”
“미안하지만 드라마 제작은 없었던 일로 해야겠어요.”
그녀가 주었던 드라마 대본을 탁자에 올려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송유리 씨가 줬던 대본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일체 보여준다거나 유출한 적 없습니다. 당연히 같은 내용이나 소스로 작품을 찍을 생각도 없으니 본인이 쓴 작품이 허락 없이 표절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표절에 대해서는 극혐하거든요.”
“아… 네.”
그녀가 쓴 작품이 유출될 일이 없다는 말에 잠시 안심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크게 상심한 듯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글 쓰는 재주는 분명히 있어요. 아직 20대 중반인데 그 정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하하, 네…”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칭찬해줬지만 실망감이 컸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임에도 그녀의 얼굴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대본 완성해봐요. 16부작 완결이든, 24부작 완결이든 마음대로 하고.”
“네?”
“완성된 대본 퀄리티가 좋으면 바로 계약할 테니까. 물론 그 전까지 다른 제작사나 방송사와 계약한다면 어쩔 수 없구요. 그때까지 계약한 곳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봐줄게요.”
“아… 하하! 감사합니다.”
송유리 작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언제까지 써야 한다는 조건은 달지 않을게요. 하지만 명심해요. 1년이고 2년이고 걸려서 완성한 대본이 과연 좋을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세상에 길이 남을만한 명작을 쓴다는 생각으로 글 쓰지 말란 말이에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한 달… 아니, 무조건 3개월 내에 다 써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좋아요. 원래 16회 짜리 대본은 늦어도 3개월 내에 다 쓰는 거예요.”
그녀를 보내고 나자마자 다시 KBC 양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16회 짜리 드라마는 취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양 국장은 너무 급하게 하는 것 같았다며 쿨하게 알았다고 넘어갔지만 우현으로서는 이번 일로 자신이 너무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쪽팔리게 됐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 들어갈 작품이 취소됐음을 밝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마음씨 착한 별이는 당연히 괜찮다며 웃으며 넘어갔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시간이 흘러 ‘지옥도시’의 VIP 시사회를 마치고 나서 개봉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았다.
“김우현 대표님,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전화를 걸어온 이는 수많은 로맨틱 코메디를 히트시켜 온 임세라 작가였다. 아직 로코 3대장에 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임세라 작가 정도면 방송국에서 업어서 모셔올 만큼 톱 작가이기도 하다.
“아, 네. 물론이죠. 그런데 무슨 일로…?”
“전에 캐스팅 문제로 전화 주셨을 때, 너무 죄송했어요. 말씀 드렸다시피 염두에 둔 배우가 있었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작가님들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구요.”
별이의 캐스팅 때문에 임세라 작가에게 전화했을 때, 시놉시스를 쓸 때부터 모 배우를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거절했던 작가였다.
이런 경우는 꽤나 빈번한데, 특히 경력이 오래된 작가일수록 실존하는 배우를 대입해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현실에 전혀 없는 인물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보다 실존하는 배우를 대입하여 글을 쓰면 캐릭터를 잡기에도 좋고 해당 캐릭터의 매력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인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 이유는 해당 배우를 대입하여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캐스팅을 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캐스팅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작품을 잘 쓰기 위해 종종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신인 작가도 있다.
“호호, 미안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일이 좀 꼬였는데… 김 대표님이 좀 풀어줄 수 있을까요?”
미안한 것처럼 말하지만 우현도, 그녀도 알고 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제안을 하는 것임을…
“하하하! 그럼요. 저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내일 점심 때, 시간 어때요?”
“괜찮습니다. 그럼 약속장소는 제가 정하죠. 언젠가 한 번 식사 대접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연락만 몇 번 드렸지, 아직 작품은 같이 못 해봤지 않습니까? 이번 기회에 식사라도 대접해야죠. 그럼 4인실 예약하고 문자 넣어드리겠습니다.”
“오호호, 알았어요. 그럼 내일 뵙죠.”
4인실 예약이라고 말한 것은 별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이었다. 그녀도 이미 우현에게 전화했을 때 별이를 염두에 뒀을 것이니 반 수락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민주 씨!”
“네?”
“드라마 제작사인 ‘시리우스’에다가 이번에 임세라 작가가 들어가는 ‘결혼시대’ 시놉이랑 대본 좀 보내달라고 해요.”
“어? 임세라 작가요? 별이 씨가 이번에 임세라 작가님하고 같이 하게 됐어요?”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어요. 일단 내일 미팅 있으니까 대본 받아주시고, 만약 그쪽에서 안 주려고 하면 작가와 미팅 잡았다고 말하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대본 받은 거 별이한테 텍스트 파일 그대로 보내주면서 내일 점심 때 캐스팅 미팅 있으니까 아침에 샵 다녀와야 한다고 전해주세요. 보내준 대본 잘 읽고 오라고도 전해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오면 바로 출력해서 드릴게요.”
민주에게 부탁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금방 프린터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대본이 책상에 놓여졌다.
“역시… 이번에도 좋네.”
임세라 작가는 웹툰이나 로맨스소설 원작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를 쓰기도 하고 본인이 창작해서 쓰기도 하는데 특이하게도 지금까지의 성적은 본인이 창작해서 쓴 것보다 원작을 기반으로 해서 각색한 것이 더 좋았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썼던 작품 중에 잘 되는 작품은 시청률이 25%를 넘기도 하지만 안 되는 작품은 10%대 초반에서 머물다가 내려가는 경우도 있어서 아직 3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받지는 못했다.
그녀의 단점은 평이한 대사로, 로맨스 작가치고 한 번씩 오글거리지만 귀엽고 가슴을 떨리게 하는 그런 씬을 잘 만들어 내지 못한다.반면 그녀의 장점은 너무 촌스럽거나 유치하지 않은 설정으로 시청자들을 울고 웃긴다는 것에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보고 다음회가 궁금해 미치게 만드는 것은 가히 김은선 작가에 필적한다고 생각한다.
대본을 읽어보니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남자와 여자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하는 아주 식상한 내용이지만 그 과정을 풀어가는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온 몸에 잔뜩 힘을 준 별이와 함께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식당은 강남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갈비집. 그녀가 평소 고기 매니아임을 전해 들었기에 캐스팅 미팅임에도 불구하고 고깃집으로 선택했다.
“대표님, 이에 고기 끼면 어떡해요? 나 마음 편히 고기도 못 먹을 것 같아요.”
“걱정되면 조금만 먹어라. 잘 되면 작가 보내고 우리끼리 한 상 더 차려서 먹자.”
“그게 지금 작품 앞둔 배우한테 할 말이에요? 놀리는 거죠?”
“흐흐, 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농담 좀 했어. 긴장하지 마, 너 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예약된 룸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약속 시간에서 10분 쯤 지났을 때,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과 남성이 들어섰다.
“미안해요, 우리가 좀 늦었죠?”
“차가 막혀서… 여기는 하여튼 안 막히는 적이 없네요. 반갑습니다. 연출 맡고 있는 장탁수입니다.”
“괜찮습니다. 여기는 항상 막히니까요.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가 데리고 있는 김별이라고 하구요.”
“안녕하세요. 김별이라고 합니다.”
장탁수 피디와 악수를 나누고 나서 별이를 소개시켰다. 별이는 생긴 것부터가 착하고 고급스럽게 생겨 누구나 보면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번에도 임세라 작가와 장탁수 피디는 별이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안 된다고 해 놓고,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놀라셨죠?”
임 작가는 전화로 거절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한 번 언급한다. 물론 그게 미안하다기보다는 스스로 민망하기 때문일 거다.
“좋아서 놀랐습니다. 저는 떠나버린 버스라고 생각했거든요.”
“아휴, 참… 세상 일이 다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구요. 솔직히 마음이 상하기도 했고…”
“마음이 상하셨다뇨?”
“사실 이번에 시놉을 쓸 때부터 그 친구랑 이야기를 해놨었거든요. 저는 서로 교감이 된 줄 알았는데, 글쎄 그게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봐요.”
“아… 주연여배우랑 글을 쓰면서부터 이미 이야기가 오고 갔었나 보네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쪽에서 거절했던 거고. 그런데 그 친구가 누구예요? 너무 궁금하네.”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에도 참…”
임세라 작가가 인상을 쓰며 언급을 피하려 하는데 장탁수 피디가 툭 던졌다.
“우희연이요. 걔 그렇게 안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