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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때로는 경주마처럼…(3)
우현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작품성만 가득한 예술영화를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것도 원해서 본 것이 아니라 이 바닥에 들어오며 왠지 봐둬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억지로 몇 번 보았던 거다.
그 때 그걸 보면서 예술영화는 안 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돈이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재미가 없다는 것.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보는 시나리오가 딱 그것 같았다.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여인이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다가 비슷한 슬픔을 가진 여인을 만나 희망을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
“왜 이게 하고 싶은데?”
마음 같아서는 저장된 시나리오 파일을 지우고 그 감독의 연락처까지 지워버리고 싶지만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인데 오히려 더 반감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 꾹 참고 물어보았다.
“주인공인 혜주를 보면서 많이 공감도 되고, 혜주가 되면서 저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니?”
“작품이 너무 별로인가요?”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부정적인 것을 느꼈는지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고 딴소리를 한다.
“작품이 별로다… 무엇을 별로라고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작품성을 물어보는 거라면 난 괜찮다고 생각해.”
“그럼 작품성이 아니라 흥행성을 말하는 거라면요?”
“아주 별로야.”
솔직히 흥행성만으로 보면 쓰레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감독도 열심히 글을 썼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순화시켰다.
“하아…”
“너 대답 안 했어.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야?”
“네…”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선히 수긍한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하고 싶은 걸 억지로 못하게 하면 그게 쌓였다가 나중에 폭발하기 때문이다.
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도 의미 없다. 지금 당장 못하게 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학교 다닐 때 숱하게 경험했을 부모와의 갈등. 부모와도 감정이 쌓이는데 하물며 남이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거야. 네가 그걸 하고 망한다고 해도 너를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않아.”
“진짜로요?”
“응, 진짜야.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네가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 네 대신 작품을 하는 건 아니니까. 너를 키우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니 너한테 무조건 이 작품을 해야 된다거나 이 작품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
“…”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그녀는 잠시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떨궜다.
“단지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야. 네가 이 작품을 하는 동안 다른 좋은 작품을 놓칠 수 있고 그로 인한 피해는 네가 받게 된다는 거지.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난 이윤범 감독을 전혀 신뢰하지 않아.
만약 이윤범 감독이 칸이나 베를린 영화제 같이 국제적인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감독이라면 그깟 몇 개월 충분히 포기할 수 있어.”
“아…”
그녀도 반박할 수 없을 거다. 이윤범 감독이 지금까지 만든 작품을 이미 파악했을 테니까.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 몇 개를 만들긴 했지만 대부분 국내 영화제 최고 권위의 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국내 영화제에도 강력한 인상을 남기지 못 했으니 해외 영화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윤범 감독이 이 바닥에 데뷔한 게 내가 알기로 10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어. 그리고 작품도 꽤 많이 만들었지. 그런데도 아직 데뷔 때에 비해서 큰 진전이 없어. 색깔도 많이 변하지 않았고. 물론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더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난 아니야.”
잠시 말을 쉬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니 이제는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다.
“이번 작품도 사실 전작인 ‘술과 남자’랑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어. 아, 나는 ‘술과 남자’는 보지 않았어. 하지만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 나는 차라리 네가 정말 작품성 있는 영화를 찍고 싶으면 다른 감독과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정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으로. 그럴래?”
“아직 잘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맞다. 고작 스무 살 조금 넘긴 별이가 갑자기 작품성 있는 영화를 하겠다고 말한 건 본래 그녀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갑자기 마음이 바뀐 게 분명하니까. 그러니 뭐가 맞는 건지 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윤범 감독이 어떻게 별이를 꼬셨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뒤풀이 회식 자리에서 앞으로 연기 인생을 어떻게 해야 롱런할 수 있고, 연기가 너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될 지에 대한 개똥철학을 늘어놓으며 살살 꼬셨을 게 뻔하지.
사실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캐스팅에 대한 압박감이 상당하다.
예술영화를 만들려고 하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캐스팅이 잘 돼야 투자를 받을 수 있으니 이제 갓 뜨기 시작한 신인배우를 꼬시려고 하는 건 그들의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대상이 별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다.
“작품성 있는 영화는 언제든지 찍을 수 있어. 네가 톱스타가 되면 어떻게 해서든 너와 같이 일하고 싶어서 달려들 테니까. 그런데 네가 이제 막 미니 주연급으로 올라서는 이 시점에 작품성 있는 영화를 해서 시기를 놓치면 되겠니?”
“그게… 시기를 조금 늦추게 된다고 제가 대중들한테 잊힐까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녀의 눈빛은 처음과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모르지. 금방 잊힐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항상 기억해야 해. 연예계에는 너를 대신할 배우들이 항상 넘친다는 거. 너를 대신할 배우가 없을 때까지는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해.”
“알겠어요. 흐음… 이상하게 그 작품을 하지 않으면 꼭 수준이 떨어지는 배우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해서 죄송해요.”
이제 됐다. 표정을 보니 그냥 생각을 접은 게 아니라 아예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긴…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고민할 만한 이야기지. 이런 이야기는 언제든지 해도 괜찮아. 오히려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나는 좋은데?”
좀 오글거리긴 해도 이런 식으로 그녀의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
“아하하… 넵. 그럼 저 혹시 다음 작품 정해진 거 있나요? 아니다, 정해졌으면 연락 주셨을 텐데… 그쵸?”
여기서 정해진 게 없다고 하면 능력 없는 놈이 될 것 같다.
“정해지진 않았는데 몇 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어? 그래요? 어떤 건데요?”
“아직 말하기엔 조심스럽고 지금 감독이랑 이야기 중이거든. 며칠 안에 결정 될 수 있으니까 집에서 준비하고 있어. 어차피 이제 곧 있으면 ‘28시간’ 개봉 때문에 스케줄 잡히게 될 건 알지?”
“그럼요. 그래서 어제부터 먹는 거 조절하고 있어요.”
“그래, 고생하고. 들어 가, 차기작 정해지면 연락 줄 테니까.”
“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녀가 사무실을 나가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아직 톱스타도 안 됐는데 예술영화 찍을 뻔했으니까.
“민주 씨! 민주 씨!”
“네? 무슨 일이세요?”
목소리에 담긴 뾰족한 기세를 읽었는지 민주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어렸다.
“이윤범 감독이라고 있거든요? ‘술과 남자’ 찍었던 감독인데 지금 당장 그 감독 연락처 수배해서 나한테 알려줘요. 아, 그리고 상준이한테 메시지 보내요. 별이 집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복귀하라고. 별이한테 알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화가 났다기보다 짜증이 치밀었다. 누구 하나가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신경 썼다면 굳이 이런 상황까지는 안 만들었을 테니까.
“번호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상준 씨한테 메시지 보내놨구요.”
“수고했어요.”
1시간 쯤 지났을 때, 번호를 찾아낸 민주가 작은 포스트잇을 주고 나갔다.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려는데 별이의 매니저인 상준이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별이 따라다니면서 잘 관리 안 했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상준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오늘 별이가 사무실에 왜 왔는지 몰라?”
“어? 저는 그냥 오늘 대표님이랑 이야기를 할 게 있다고만 들어서…”
“너 영화제 참석해서 뒤풀이 할 때 같이 안 따라다녔어?”
그제야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는지 안색이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아니, 죄송한 걸 떠나서 뒤풀이 할 때 따라다닌 거 맞아?”
“네. 따라다녔는데… 혹시 누가 들이댔다고 하던가요?”
“들이대긴 했지. 감독이 별이한테 시나리오 줬단다. 너, 감독이 시나리오 줬으니까 망정이지 남자배우가 번호라도 땄으면 어쩔 뻔했냐?”
“아… 죄송합니다.”
“게다가 그 시나리오를 준 감독도 예술영화나 하던 감독이야. 별이는 그거에 꽂혀서 하겠다고 온 거고. 잘 풀려서 망정이지 잘 못 됐으면 너나 나나 큰일 날 뻔했다고, 알아?”
“죄송합니다.”
“별이 전화번호 바꿔, 그 감독이 언제 연락할지 모르니까. 잘 하자, 응?”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가 봐.”
기가 팍 죽은 상준을 보내고 바로 이윤범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실례지만 이윤범 감독님 맞습니까?”
“누구십니까?”
40대 초반이라고 알고 있는데 목소리만 들어보면 50대 이상으로 들린다. 어떻게 들으면 점잖고 신뢰감 가는 목소리라고 생각할 만하다.
“파인엔터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이윤범 감독님 맞으시죠?”
그는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동요 없이 대답했다.
“아… 네. 맞습니다.”
“우리 별이한테 시나리오 보내셨다구요?”
“네. 별이 씨가 예상보다 생각이 깊더군요. 연기에 대한 열정도 여느 여배우보다 컸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걸그룹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예고, 예대에서 전문연기수업을 받은 학생들보다 더 빛나 보였습니다. 하하, 너무 오버했나요? 하지만 진심입니다.”
예술 감독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들과 자신은 갈 길이 다른 것뿐이다. 때문에 그에게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송합니다만 만약 그렇게 별이가 마음에 들었다면 회사로 시나리오를 보내는 게 맞지 않나요? 아직 신인이고 뭘 모르는데 직접 시나리오를 보내신다는 건 조금 이해하기 힘드네요.”
“하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김별 양과 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급한 마음이 돼서 시나리오를 건네주고 말았네요. 하지만 배우가 감독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받는 게 이상하다면 저는 더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더 당황스럽네요. 별이가 경력이 몇 년 된 배우도 아니고 이제 신인 딱지 좀 떼어보려고 하는데 시나리오를 직접 줘요? 지금 나 엿 먹이려는 겁니까?”
단어 선택을 일부러 조금 강하게 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엿을 먹이다니요?”
“잘 들으세요. 다른 회사는 몰라도 최소한 우리 회사 배우랑 같이 일하고 싶다면 시나리오는 회사로 보내세요, 알겠습니까?”
“허… 이거 참. 김우현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참 경우가 없으시네요.”
“저 원래 경우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 전했으니까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별이 번호 지우세요.”
이윤범 감독하고 길게 말싸움해봤자 남는 게 없다. 그렇기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끊어버렸다.
“하… 발등에 불 떨어졌네.”
이제 별이가 해야 할 작품을 찾아야 할 차례다. 그런데 며칠 만에 어떻게 찾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