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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때로는 경주마처럼…(2)
평소 같으면 후딱 흘러갔을 주말이 이번에는 어찌 그렇게 천천히 가던지, 마치 말년 병장 때 말년휴가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에이넷프로덕션과의 합병이 자신을 설레게 만들었다는 것이리라.
“수고하셨습니다.”
월요일 점심을 앞두고 삼전투신의 한 회의실에서 에이넷프로덕션과의 합병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공증에 참여한 변호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넸고 그의 손을 맞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수고는요, 여러분들께서 준비하시느라 고생하셨죠. 저는 여기에 와서 도장 찍은 거 말고 한 게 더 있습니까?”
“그럼 이사 준비 하셔야겠네요?”
“네. 안 그래도 사무실을 찾고 있는 중인데, 요즘 공실이 많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회사명도 바꿀 건가요?”
“당연히 그래야겠죠? 에이넷에서 파인프로덕션으로 변경할 생각입니다.”
“그럼 언젠가 TV에서 파인프로덕션이 제작한 드라마가 방영되겠네요. 기대됩니다, 하하하!”
변호사, 그리고 삼전투신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한 후 삼성동 섬유센터 빌딩으로 향했다. 그곳에 에이넷프로덕션이 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김우현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10여 명의 직원들이 바짝 긴장한 채 우현에게 어정쩡하게 인사했다. 그들도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하게 된 것을 알고 있었는지 아예 영문을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 중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직원이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강상훈 피디라고 합니다. 이미 말씀 들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를 따라 작은 회의실로 들어가니 그가 조심스럽게 명함을 건네고는 믹스커피를 하나 타준다.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명함을 건네니 그가 조심스럽게 받아 자신의 앞에 놓았다.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파인엔터테인먼트랑 합병한다고요.”
“여기 임원급 인물은 없습니까?”
“그게… 딱히 임원급 인물이 있는 건 아니구요. 사장님 밑으로는 전부 일반 직원들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일은 사장님이 직접 결정하고 결제하셨거든요.”
“아… 전 사장님이 꽤 열정적으로 일하셨네요?”
“맞습니다. 전 사장님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일에 대해 열정이 넘치는 분이셨어요. 재벌가 사람인 티도 잘 내지 않으셨구요. 직원들한테도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셨는데…”
“흐음… 터키 쪽 일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어요.”
“사실 그건 핑계입니다.”
“네? 그럼 다른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문제라기보다는 사장님의 아버지께서는 사장님이 본사로 오셔서 일하기를 원하셨거든요. 그래서 그걸 핑계로 회사를 그만두게 하셨어요.”
“아…”
“아무리 이쪽 일이 좋다고 해도 그 많은 재산을 포기하고 여기에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 저희도 이해합니다. 단지 회사가 없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이렇게 좋은 분께서 인수하신다고 하니 직원들도 조금 안심하는 분위기였죠.”
“좋습니다. 일단 회사를 인수하게 됐으니 지금처럼 따로 떨어져서 일할 수는 없겠죠? 제가 사무실을 알아보고 있으니 이사 준비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혹시 있나요?”
“아니요. 지금 직원들은 출근해서 거의 놀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제작보다는 수출 쪽에 더 주력하는 와중이었는데 사장님께서 일에서 손을 떼고 나니 저희 입장에서는 뭘 건드릴 수가 없는 입장이었거든요. 일단 진행된 수출 건에 관해서 후속조치가 필요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괜히 안 되는 작품 해보겠다고 건드렸다가 큰 손해가 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 월급은 제대로 지급되고 있었습니까?”
“다행히도 회사에 남은 돈이 있어 월급은 밀리지 않았습니다.”
“좋네요. 오늘 ‘타이거스튜디오’에서 ‘28시간’ 편집본이 올 겁니다. 그거 받아서 해외수출 준비해주시구요. 배급은 ‘쇼박수’에서 맡을 거니까 배급 관련 회의는 그쪽이랑 하시면 됩니다. ‘28시간’에 대한 투자지분 현황도 타이거 쪽에서 받으시구요.”
“이거 첫날부터 일이네요, 하하하!”
그 동안 일 없이 놀았으니 괜히 미안했을 거다. 그런데 바로 일이 생기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파인 엔터 식구들이랑 회식 진행할 테니까 이번주 금요일 저녁은 모두 시간 비워 놓으시구요. 첫 대면 자리니까 누구하나 빠지면 안 됩니다.”
“회식이라면 다들 껌뻑 넘어갑니다. 아마 빠지라고 해도 절대 안 빠질 사람들이에요, 하하!”
“그거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강 피디님은 제작 피디인가요? 아니면…”
“아, 맞습니다, 제작 피디. 현장 감독님은 따로 출근하지 않았구요.”
“그럼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저한테 연락주세요. 직원들 안 거쳐도 되니까. 아, 그리고 에이넷프로덕션은 앞으로 파인프로덕션으로 사명이 변경될 겁니다. 직원들에게 주지시키세요.”
“알겠습니다.”
파인프로덕션 사무실을 나와 부동산에 들러 오후 내내 사무실을 보러 다녔다. 공실은 많았지만 안무실과 녹음실, 연습실 등이 충분히 갖춰줘야 하며 방음도 신경 써야 했기에 한참을 돌아다녀서야 마음에 드는 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사무실을 계약하고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 저녁을 같이 먹으며 상의한 후 다음 날 출근하니 직원들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다.
“다들 우리 회사가 3대 기획사를 넘어서는 큰 회사가 될 거라고 믿고 있어서 그래요.”
유니는 정규앨범에 들어갈 11곡을 모두 완성한 녹음 CD를 가져와 우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되게끔 노력해야지. 너도 고생 많았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타이틀은 대표님이 찍어주신 곡으로 했으니까 음원 1위 안 되면 온 동네에 우리 대표님 감 잃었다고 소문낼 거예요. 알죠? 나 입 엄청 가벼운 거.”
“알지. 내 자알 알지. 걱정 마시게.”
“히힛! 그리고 나 운전면허시험 볼 건데… 그래도 되죠?”
“운전하고 싶어?”
“나도 차 가지고 다니고 싶단 말이에요.”
“너 아직 정산도 다 안 나왔는데 무슨 차냐?”
“이미 민주 언니한테 들었죠. 다음달 말에 정산 나온다는 거! 그리고 대충 금액도 들었어요, 헤헤. 아… 드디어 내 삶에서 가난이 떠나가는 구나.”
유니는 팔을 활짝 벌리고 몇 바퀴 뱅뱅 돌았다.
“CF찍냐? 그래서? 무슨 차를 사고 싶은데?”
“히히히, 나 예전부터 사고 싶었던 차 있어요. 마이 드림카.”
“그래서 그게 뭐냐고.”
“BMM 미니쿠페요.”
딱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차다. 물론 남자들도 그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남자 둘이 타게 되면 조금 이상해(?) 보여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거 비싸. 너 정산 타면 집에다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많이 비싸요?”
“응. 너 집에 주고 나면 그거까지 살 여유가 안 될 텐데? 아니다. 할부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네가 프리랜서라서 할부가 나오려나?”
“힝… 그럼 저 그거 못 사는 거예요?”
“다음 정산 때 사. 너 알지? 데뷔하고 난 다음에 1년도 안 돼서 바로 정산 받는 애들이 이 바닥에 거의 없다는 거?”
“암요, 암요. 그래서 제가 대표님 무지 좋아하잖아요. 알라뷰.”
유니의 애교는 귀엽지만 선물로 사주기에는 미니가 너무 비싸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정규앨범 또 대박나면 이번에는 정산금액이 훨씬 더 커질 테니까.”
“알겠어요. 그래도 면허는 따 놓는 게 좋겠죠?”
“그래, 면허는 일찍 딸수록 좋지. 면허시험장 갈 때마다 세동이 데리고 가.”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저도 우리사주 살 수 있는 거예요?”
역시 단순히 3대 기획사처럼 커진다고 직원들이 좋아하는 게 아닐 거다. 너도나도 한 몫 잡을 수 있는 기회인 우리사주 때문에 설레는 게 분명하다.
“그래, 그건 나중에 공지할 테니까 그때 많이 사 놓으세요.”
“히힛! 알겠습니다!”
유니가 나가자마자 밖에서 ‘앗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니가 나가고 그녀가 두고 간 CD를 컴퓨터에 넣어 재생시켰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소파를 뒤로 젖히니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타이틀곡은 빠른 템포의 댄스곡이지만 유니가 가진 보컬의 느낌을 충분히 살렸다. 그래서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된다.
“대표님.”
미처 한곡을 다 듣기도 전에 민주가 들어와 눈치를 살폈다.
“네? 뭔데요?”
“별 씨가 왔어요.”
“별이가? 들어오라고 해요.”
은하나 유니 같았으면 그냥 들어왔을 텐데 차분하고 예의 바른 별이는 민주에게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던 것 같다.
“제가 일 방해한 거 아니에요?”
오늘 스케줄이 없어 샵에도 들르지 않았을 텐데 나름 혼자서 화장도 하고 멋을 부렸는지 상당히 예뻐 보인다.
“어서 와, 요즘 좀 한가해서 나온 거야?”
“하하, 그런 것도 있고…”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할 이야기가 있나보다.
“저번 주에 타이거 윤 대표랑 이야기했어. 후반 작업 마무리 했고 편집본 나왔다더라. 이야기 들었니?”
“어? 그래요? 이야기 못 들었어요.”
“음… 나는 타이거 측에서 너한테 이야기 한 줄 알았는데, 말 안했나보네. 미안해. 내가 요즘 정신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리고 얘기 들었어요, 다른 회사 인수하셨다고… 유니도 엄청 좋아하던데요?”
“걔는 벌써부터 주식 사서 대박 내려고 하더라. 아주 몇 년 뒤에 회사 상장하면 이사 소리 듣겠어.”
물론 농담이다. 그 정도로 주식을 사 모을 돈이 없을 테니까.
“아하하! 걔 그거 엄청 좋아할 거예요. 의외로 사장님이나 이사님 같은 타이틀 듣고 싶어 하거든요.”
“하긴… 어쨌든 이제 조금 있으면 제작보고회 일정 잡힐 거야. 내일 VIP시사회 잡힌 ‘지옥도시’ 다음으로 바로 개봉할 수 있겠어.”
“그럼 서로 손해 아니에요? 은하 언니 관객이랑 제 관객이랑…”
별이는 괜히 자신의 영화 때문에 은하에게 피해가 갈 까봐 걱정했다.
“원래 영화는 재미있으면 두 개 다 봐. 둘 중에 하나만 골라서 보려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거든. 있다고 해도 그 비율은 얼마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아… 실은, 저 하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
“하고 싶다고? 너 어디서 시나리오 받았니?”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는 모두 회사를 통해서 그녀에게 보내준다. 따라서 그녀가 회사에서 모르는 영화나 드라마를 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또한, 회사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에게 따로 시나리오가 간다는 건 아티스트 관리에 큰 구멍이 생겼다는 뜻이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윤범 감독님이 제안을 해주셨거든요.”
“이윤범 감독? 네가 이윤범 감독을 어떻게 알아?”
“이번에 전주국제영화제 참석했다가 만났거든요.”
전주국제영화제에 별이가 출연한 '피아니스트'가 상영됐기에 그 때 영화제에 잠시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래? 너한테 시나리오 줬어?”
“네.”
그녀는 우현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한 걸 보고 주눅이 들어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일단 한번 보자, 그 시나리오.”
“여기…”
별이는 작은 지갑에서 USB를 꺼내 우현에게 건넸다. 귀여운 펭귄모양의 USB를 컴퓨터에 꽂아 실행시키니 한글파일로 된 제목이 눈에 띈다.
[바다로 가는 기차]
“흐음…”
우현의 낮은 신음소리에 별이의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제목만 보면 딱 영화제에 출품해 작품성만 인정받고 잊히는 그런 영화가 연상됐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해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