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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태풍이 되다(6)
“제가 왜 그럴 거라 생각합니까? 방금 말씀하셨던 대로 은하 씨의 새로운 열애 상대를 찾으면 될 텐데요?”
짐짓 허세를 부리며 말하는 그에게 코웃음을 지으며 소파 뒤에 등을 푹 기댔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남 연애하는 거 쫓는 게 일생일대의 사명이라고 하시니 제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하세요. 요즘 카메라는 1키로 밖에서도 바로 앞에서 찍는 것처럼 확대가 가능하다면서요? 쉽겠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이라 이 기자의 심사가 뒤틀렸다.
“허, 지금 놀리는 겁니까?”
“놀리는 거라고 느끼셨어요? 뭐, 그렇게 느끼셨다면 할 말 없구요. 그럼 이건 필요없으시겠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낚아채 다시 우현의 책상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그 손놀림이 거칠어 이 기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분이 나쁜 거다.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제가 못 찾아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우현의 자신감에 이 기자는 흠칫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우현이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요? 거짓말 같습니까? 장담하는데 당신은 절대로 은하 열애설로 기사를 싣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 절대로 못 잡으니까.”
허풍이 아니라 사실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애 상대가 바로 우현 자신이다. 마음만 먹으면 은하 전용 밴에서 연애를 해도 되는데 그가 어떻게 잡을 것인가?
어지간한 짓은 소속사 사장과 배우 간의 정상적인 관계처럼 보일 것이고, 전처럼 영화관에 가거나 둘이 여행이라도 가지 않는 한 절대로 걸릴 수가 없다.
“…”
이 기자는 한동안 말없이 팔짱을 끼고 우현을 노려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김 대표님이 너무 진지하셔서 농담도 못 하겠습니다.”
이 기자는 스스로 기싸움에서 졌음을 토로했다. 아니, 블러핑이 통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스트레이트를 쥐고 있다고 겁주는데 상대방이 포카드를 들었다고 우기니 결국 판을 엎은 거다.
“하하, 그런가요? 나는 이 기자님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연기라니요. 하하하, 어쨌든 파인 엔터가 이렇게 큰 미래를 그리고 있으니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되겠군요.”
“그거야 이 기자님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아예 드러내놓고 알아서 기라는 말에 이 기자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드러났지만 이번에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기색을 감췄다.
“하하하! 그렇죠. 이 바닥이 원래 비즈니스가 철저하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잘 받았습니다.”
“아니죠, 잘 주셨으니 잘 드린 겁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은하의 열애에 관련돼서는 아예 신경을 끊으라는 말이다. 대신 파인엔터에서 기사가 될 만한 것은 그에게 준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고.
“언제 한번 식사라도 하죠.”
“자리 한번 마련해보겠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아무 피해 없이 상황을 정리했으니 됐다.
오늘 ‘지옥도시’의 제작보고회 기사가 한동안 연예면을 달궜다. 그 중 은하의 포토기사가 조회수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악플과 선플이 뒤섞여 있었다.
은하 성격에 분명 쿨하게 넘어가겠지만 앞으로 별이나 유니에게 이런 악플이 달리게 될 때 멘탈을 잘 다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제작보고회를 마치고 난 뒤, 은하와 매니저인 혜숙과 같이 ‘지옥도시’ 제작진, 배우들과의 회식에 참여했다.
보통 영화 하나를 찍을 때면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또는 가장 선배 연기자가 누구냐에 따라 술을 많이 먹게 되기도 하고 적게 먹게 되기도 하는데 이번 ‘지옥도시’에는 주당이 몇 없어 이렇게 다 같이 회식하는 것도 겨우 세 번째였다.
어쩌다보니 새벽 4시까지 달리고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자고 난 뒤 사무실에 느즈막하게 출근하니 민주가 후다닥 달려와 외친다.
“대표님!”
“응?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이것 보세요.”
민주가 사무실 중앙의 노는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모니터를 보니 파인엔터에 대한 기사가 떠 있었다.
[대한민국 연예계에 새로운 한 방을 날린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제목으로 포털 사이트 연예면 가장 상단에 꽂아버리니 조회수가 장난 아닐 수밖에 없다.
내용은 파인엔터테인먼트를 자세하게 조명하는 기획 기사로, 소속 연예인의 근황과 직접 기획하게 된 영화 ‘28시간’의 제작 뒷이야기, 그리고 이제 KBC에서 새로 시작하게 될 ‘변호사들’의 제작 배경과 작가팀의 세부사항까지.
특히 그는 이번 ‘변호사들’의 제작에 참여하게 될 작가팀이 작가계의 드림팀이라며 한명, 한명이 어떤 부분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까지 해 놨다.
“이거 우리가 낸 거 아니죠?”
그녀 입장에서는 파인엔터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나왔기에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충분히 놀랄 만했다.
“하하, 아니에요. 우리가 낸 게 맞기는 한데… 뭐라고 할까? 서로간의 비즈니스에 의한 거라… 어쨌든 여기 이우진 기자는 잘 알아뒀다가 나중에 선물 보낼 때 잊지 말고 같이 보내주세요.”
“역시… 알겠습니다.”
앞의 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잘 관리하라는 말은 맞기에 민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 기사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단순히 네티즌들의 댓글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회사에 입사문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상파 출신 방송 스태프와 피디, 작가 그리고 제작사를 꾸릴 수 있게 투자하겠다는 문의도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지금 우현의 사무실로 방문한 손님은 그 중 가장 큰 손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거 바쁜데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양 팀장님이 귀찮은 분은 아니죠. 전에도 큰 도움 주셨는데… 일단 앉으시죠.”
삼전투신운용의 양재호 팀장이 방문한 건 기사가 나가고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전날에 약속을 잡고 방문했으니 아마 기사가 나가자마자 장기간의 회의를 거쳤을 것이 분명했다.
궁금한 건 그 기사에서 뭘 봤기에 이렇게 방문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전에도 투자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특히 더 궁금한 건 양 팀장이 옆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를 같이 대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는 주영진 과장입니다.”
양 팀장의 소개에 그가 명함을 공손히 꺼내들어 우현에게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영진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제가 온 이유가 궁금하신가 봅니다?”
표정관리가 너무 안 됐나보다.
“하하하, 제가 좀 순수한 면이 있죠.”
“그건 처음 알았는데요. 뭐, 어쨌거나 단순히 놀러온 것은 아닙니다. 국가일보 기사 나간 거 보셨죠?”
“당연하죠.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삼전투신에서 오신 이유가 잘 연결이 안 되네요?”
“투자 하는 회사가 투자 이야기 말고 뭐가 더 있겠습니까?”
“흐음… 그건 전에도 말했지만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 돈이 많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략 회사 세운지 1년 넘으셨죠? 2년이란 세월이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 금방입니다. 물론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권하지 않았죠.”
“그럼 그 기사를 보고 꼭 권해야 할 이유라도 생겼나보죠?”
“비슷합니다.”
양 팀장은 말을 하다 말고 주영진 과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주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투명한 서류파일을 꺼내 우현에게 건넨다.
“지금부터 설명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에이넷프로덕션?”
서류 타이틀에 쓰인 건 바로 회사 이름이었다.
“들어 보셨을 겁니다, 드라마 제작 업체죠.”
그렇게 유명한 업체는 아니다. 몇몇 케이블 드라마를 제작했었고 지상파도 몇 개 했던 걸로 안다. 하지만 대부분 결과가 신통치 않았었다.
“이 회사가 왜요?”
“1년 전에 국내 지상파 드라마를 가지고 해외 판매를 시도했었습니다. 그 중 몇 개는 계약을 맺었죠. 그런데 터키 쪽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전에 의논되지 않은 선정적인 장면이 있었다는 거죠. 긴 사연이 있지만 중요하지 않아 짧게 줄이면 결국 회사는 긴 공방 끝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물어주게 됐습니다.”
“망했다는 거군요.”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손해를 보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수익도 걷었으니까요. 하지만 별다른 비전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죠. 아시다시피 드라마든 영화든 제작업체는 잘 되면 노다지지만 안 되면 프랜차이즈 치킨집보다도 못합니다. 자산은 별로 없고 오로지 머리, 즉 상상력으로 가치를 창출하거든요.”
그는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들겼다.
“그런 편이죠.”
“문제는 그 에이넷프로덕션을 만든 회사가 저희랑 인연이 깊다는 겁니다.”
인연이 깊다는 건 아마 삼전그룹차원에서 만든 회사였다는 걸 그렇게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오너는 창업주의 3, 4세일 게 분명하다.
“그림이 딱 나오네. 사장이 이 회사에서 손을 떼려고 하는 거죠?”
“하하,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어쨌든 부동산을 많이 가진 것도 아니고, 지속적인 저작권 수입을 가지지도 못했으니 회사를 가져다가 어디 팔아 봐도 별로 건지지도 못 할 것이기에 저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그 기사를 보고 제게 던지러 오셨다 이 말인가요?”
유명한 영화 대사인데 문득 이 대사를 친 조폭두목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 던진다고 표현하면 꼭 영화처럼 안 좋은 걸 연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망한 회사면 마약보다 더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아니죠. 비록 에이넷에서 만든 작품들이 결과는 안 좋았다곤 하지만 그거야 작가와 감독이 문제였을 뿐, 그들이 쌓은 제작노하우와 인력은 대표님에게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망했다면 헐값에 이 모든 걸 다 가져갈 수 있겠죠.”
“아무리 헐값이라고 해도 한두 푼도 아니고, 그 정도로 자금이 많진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온 거 아니겠습니까?”
교묘하고 능구렁이 같지만 마음이 동한다.
“그 쪽에서 회사를 팔고 또 그 돈도 그 쪽에서 대겠다, 이 말인가요?”
“조건은 이겁니다. 하나, 에이넷프로덕션에 관한 모든 권한은 포기한다. 둘, 파인엔터에 괜찮은 조건으로 투자한다. 이 괜찮은 조건이라는 건 당연히 대표님과 상의해봐야겠죠.”
“제가 거절하면요?”
대답은 주영진 과장이 아니라 양재호 팀장이 했다.
“하하, 당연히 깨끗하게 포기하겠습니다. 대표님이 싫다고 하시는데 저희가 강권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도 이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다음 작품에서 저희를 빼버리면 저희만 손해니까요.”
“순수한 의도니까 믿어 달라, 이 말이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속이고 말고 할 게 없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어차피 팔아도 얼마 안 되는 회사, 대표님께 넘기고 파인엔터에 대한 주식을 얻는 게 훨씬 낫다는 게 회사 입장이니까요.”
“그럼 엄청나게 싸게 주실 수도 있겠네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선한 의도라고… 단 돈 1억에 드리겠습니다.”
“1억이라구요?”
대충 훑어봤지만 수많은 촬영장비와 자체 세트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촬영 장비만 팔아도 십억은 나올 게 분명하다. 이런 프로덕션을 1억에 판다는 건 분명 파격적이다.
“대신 저희가 파인엔터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죠. 물론 귀사가 2년 뒤 코스닥에 등록한다는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