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230화 (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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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태풍이 되다(2)

“거 참… 방송국이랑 통화하지 왜 나한테 전화를 하냐… 알았어요, 연결해주세요.”

“네.”

민주는 자신의 잘못인 양 미안한 얼굴로 전화를 돌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김우현입니다.”

“안녕하세요, DH엔터 윤설아예요.”

윤설아 대표는 이 바닥에서 20년 가까운 경력을 자랑하는 매니저 출신 엔터사 대표다. 여자 매니저가 버티기 어려운 이 바닥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긴 하다.

“네, 반갑습니다.”

“미안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반가울 수가 없네요. 지금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거든요. 아직도 눈앞이 핑핑 도네요.”

“흐음…”

여기서 미안하다고 하는 순간 정말 미안한 일을 한 게 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수는 방송사에서 했으니 딱 잡아떼야 한다.

“일단 저간의 사정부터 알아보죠.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나요?”

“대략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이주희 작가와 KBC 간에 50회 계약을 맺었고 몇 차례 이견이 오가다 이번 작품이 바로 그 계약의 일부분이 됐습니다. 받아보셨던 그 시놉은 나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거구요.”

“어떤 시놉을 받은 건지 알고 계시네요? 그럼 그 시놉에는 주인공이 남자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구요?”

“그럼요. 하지만 이주희 작가와 작가팀이 고심해서 주인공 성별을 여자로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어제였죠.”

사실 주인공의 성별을 바꾼 건 전적으로 우현이 결정한 것이었지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럼…”

뻔히 무슨 말이 나올 줄 알기에 그녀의 말을 막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도 방송국에서 그렇게 빨리 캐스팅을 해버릴지 몰랐습니다. 이주희 작가도 몰랐어요. 세상에 작가도 모르게 주연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아…”

이 부분은 저들도 할 말이 없을 거다. 아마 빠르게 진행한다고 이주희 작가와 미팅도 하기 전에 방송국과 쇼부치려는 계획이었을 테니까.

물론 나중에는 작가와 미팅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시놉을 뿌린 게 방송국이라는 걸 알았으니 배우와 소속사 직원들은 마음이 급해졌을 거다.

일단 방송국과 짝짜꿍해놓고 기사부터 터뜨리면 적어도 경쟁자들에게 선전포고는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을 텐데 저들 입장에서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는 시나리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DH나 우리나 서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일단 저희도 기사부터 낸 거구요. 속상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네? 뭐를…”

차라리 욕하고 저주를 퍼부었다면 웃으며 전화를 끊었겠지만 이렇게 나오니 갑자기 가슴이 철렁한다.

“내 얼굴에 똥바가지를 얹을 수는 있어도 우리 준현이 얼굴은 쪽팔리면 안 돼요. 여주 원톱 드라마니 서브 남주도 있죠? 그걸 우리 준현이가 하게 해줘요.”

“어…”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강소연 혼자 끌고 가는 것보다 우리 준현이가 받쳐주면 드라마 외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김준현 씨 나이가 이제 27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역도 했어요. 변호사 역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구요.”

“다른 작품의 변호사 역은 할 수 있죠. 하지만 이건 안 됩니다. 로맨스 요소 거의 없이 리얼 법정물로 갈 거라구요. 김준현이 끼면 분위기가 이상해집니다.”

“리얼 법정물 좋아요. 우리 준현이도 그게 마음에 들어서 하겠다고 방송국까지 쳐들어갔다구요.”

“그게 아니라, 강소연도 예쁜데 김준현도 너무 잘생겼잖아요? 둘이 계속 붙을 텐데 그럼 로맨스 요소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하죠.”

“그럼 남주를 무슨 유해준 같은 사람만 쓰려고 하세요?”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조금 중후한 멋이 있는 배우를 쓰려고 한다는 말이에요. 나이도 조금 있고, 단순히 잘 생긴 걸 떠나서 지적인 매력이 있는 배우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알겠는데, 그래도 저는 우리 준현이도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해요.”

“안 그래도 소연 씨가 들어가서 제작비가 휘청할 텐데, 김준현 씨까지 끼면 도저히 제작비 감당이 안 됩니다. 이거 준비할 때 양 국장이랑 세트장까지 새로 만들기로 했어요.”

무려 3층짜리 로펌 세트장을 만들 계획이다. 최고급 자재로 꾸밀 예정이라 대충 잡아도 세트장 제작에만 10억 이상이 들어갈 게 분명하다.

“출연료는 제가 준현이랑 이야기해볼게요. 그래도 회당 3천, 그 정도는 받아야 해요.”

순간 탄성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마음만 먹으면 회당 1억까지도 받을 수 있을 만큼 최고의 톱스타인 김준현인데 그걸 3천까지도 낮추겠다니 말이다.

“김준현 씨가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돈은 더 벌면 돼요. 하지만 톱스타는 쪽팔리면 안 돼요.”

과연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만큼 대단한 여자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 돈 버는 건 일도 아니다. 만약 자신이었어도 그녀처럼 했을 거다.

“하아… 윤 대표님, 이거 강소연 원톱 드라마예요. 아무리 서브 남주라고 해도 로맨스가 별로 없어 비중이 많이 줄어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이런 것도 한 번 해보는 거죠. 앞으로 평생 여배우들이랑 물고 빨고 할 텐데 그깟 드라마 한 시즌에서 로맨스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구요. 뭐… 분량은 이 작가님이 잘 봐주시기를 바라야겠죠?”

곧 죽어도 분량 적은 걸 이해하겠다는 말은 안 한다.

“일단 알겠습니다. 작가님이랑 상의해보겠습니다.”

“저는 대표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워낙 뛰어나신 분인 걸 잘 알거든요.”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래서 더 진지하게 들렸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낯간지러워지는 말이다.

“그런 말씀은…”

“없는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준현이가 나이도 어리고 마스크도 도련님 같아서 변호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요. 그래도 많이 노력하고 있고, 본인도 이 작품 꼭 하고 싶어 해요. 서브주연이라도 하겠다는 거 준현이가 먼저 꺼낸 말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흐음…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 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에 잠겼다. 이걸 받자니 양 국장한테 한 말도 있고, 또 서브남주가 너무 젊고 잘생겨 몰입이 깨질 것 같기도 하다.

반대로 이걸 거부하자니 김준현이 주는 메리트가 아깝다. 예능에 나가 입만 열면 좀 깨서 그렇지 연기력도 준수하고 그만한 초반 임팩트를 주는 배우가 어디 있나? 김준현이 나왔다고 하면 1, 2회 시청률이 최소 15%는 나올 거다. 내용도 안 보고 그 정도 시청률을 뽑아줄 수 있는 배우, 흔치 않다.

한 시간쯤 고민하고 있으니 양 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준현을 서브남주로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며 신나서 펄쩍펄쩍 뛰는데 아주 누가 보면 로또라도 맞은 줄 알 정도다.

이렇게 되니 무작정 반대만 할 수 없어 결국 이주희 작가에게 사정을 알렸는데 그녀가 의외의 말을 한다.

“괜찮을 것 같아요. 시청자들이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진지한데 시선 둘 곳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너무 진지한 것에만 몰두했나 싶기도 해 DH엔터와 캐스팅 미팅을 잡아버렸다. 만나보고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미팅은 바로 다음날 점심.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여유를 잡고 천천히 만날 수 없었기에 DH 쪽에서 다급하게 서둘렀다.

캐스팅 미팅은 이주희 작가와 이재호 작가, 천병준 피디, 그리고 우현까지 넷이 참여하기로 했고 방송국에 들러 천 피디를 데리고 여의도의 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이거 저 때문에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 같습니다. 민망하네요.”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생길 수 있죠. 또, 다른 배우도 아니고 김준현이 방송국까지 찾아와서 하겠다고 하는데 어떤 피디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해해주시네요.”

“당연히 이해되죠.”

말뿐이 아니라 정말 어느 피디라도 거부하지 못했을 거다. 그걸 알기에 화도 내지 못했다. 이주희 작가나 이재호 작가 역시 김준현이 서브남주로 참여 한다는 말에 기대감에 들떠 가는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10분 정도 일찍 음식점에 도착해 예약된 방으로 가니 1남 1녀가 미리 앉아서 일행을 반겼다.

“오셨네요. 반가워요. 나 윤설아예요.”

“반갑습니다. 김준현입니다.”

윤설아 대표는 40대 중반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 만났다. 그 전에는 DH엔터의 직원들만 몇몇을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 그녀가 직접 나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더 놀라운 건 김준현이었는데, 검은색 정장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 파란색 넥타이까지 메 클래식한 모습을 보였다. 더군다나 약간의 수염까지 길러 왔는데 덥수룩하지 않고 깔끔하게 다듬어서 중후한 멋까지 내보였다.

명함을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김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주희 작가와 이재호 작가, 천병준 피디 모두에게 돌아가며 깍듯하게 인사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본 모습인지 미리 생각해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개념 있는 모습이다.

“대표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파인엔터에서도 김 대표님이 직접 나올 테니 제가 나와야 격이 맞지 않겠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수많은 톱스타를 보유한 DH엔터와 이제 연예계에서 이름 좀 날리기 시작한 파인 엔터와는 아직까지 규모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캐스팅 미팅까지 그녀가 직접 왔다는 건 그만큼 오늘 못을 박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거다. 물론 우현의 기분을 고려한 선택인 것도 포함된 것일 테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출출하실 텐데…”

그녀가 준비한 식사는 한눈에 봐도 일인당 십만 원은 훌쩍 넘길 만큼 고급스러웠다. 자연스레 이주희 작가를 비롯한 일행의 기분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초밥 한 점을 집어든 이주희 작가가 먹다 말고 김준현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수염을 길러서 그런지 너무 어려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저분해 보이는 것도 아니라서 꽤나 고민 좀 하셨겠습니다?”

우현의 말에 김준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수염도 그렇고 살을 좀 찌우고 있습니다.”

“네? 살을 찌운다구요?”

배우들은 어지간하면 살을 찌우려고 하지 않는다. 다이어트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살을 찌웠을 때 본인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 많이 찌우려는 건 아닙니다. 적정체중보다 딱 5키로 정도만 더 찌우려구요.”

“아… 그래서 턱선이 조금 달라 보였구나. 역시…”

이주희 작가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토한다.

“확실히 평소 TV에서 보이는 모습은 멋있기는 해도 너무 말라 보이긴 했죠. 5키로 정도만 찌면 지금보다 더 무게감이 있어 보이겠네요.”

우현의 긍정적인 말에 김준현과 윤설아 대표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마음에 안 들면 거부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되니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정도면 일단 시청률은 20% 확정이나 마찬가지다.

“저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우현의 눈치를 살피던 윤 대표는 김준현으로 못 박았다고 생각했는지 훈훈한 분위기에 슬쩍 낚싯줄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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