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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새로운 시도(5)
“그럼요, ‘슈츠’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희가 법정물을 하게 되는 건가요?”
“네, 이주희 작가가 KBC랑 50회 계약을 맺은 게 있어요. 그것 때문에 이번 KBC에서 이 작가에게 시놉도 없이 편성을 잡아버렸거든요.”
“와…”
세 사람은 부러운 듯이 입을 벌렸다. 그럴 수밖에. 누구는 데뷔도 못한 상태로 어떻게 해서든 이름 한번 띄워보려고 발악 중인데, 누구는 시놉도 없이 방송국에서 편성까지 잡아줬다지 않은가?
“부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될 테니까.”
“정말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임 작가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전심이리라.
“이 작가가 지금 법정물을 하고 싶어 하는데 세부 에피소드들을 여러분이 짜주었으면 좋겠어요. 메인 캐릭터와 핵심 구성은 이주희 작가가 잡고 여러분들이 가지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아…”
고개는 끄덕이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다. 결국 이주희 작가 들러리가 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일 거다.
“원고료는 회당 천만 원. 전부 저희 파인 엔터에서 지급할 겁니다. 여러분과 한명이 더 있으니 네 명이서 분배하게 되겠죠?”
하지만 우현의 한 마디에 그들의 눈동자가 급격히 팽창되었다.
“그럼 회당 250만원…”
“16부작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고, 초반 시청률에 따라 연장될 수도 있겠죠.”
16부작만 진행한다고 해도 각자 4천만 원은 챙길 수 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저, 정말입니까?”
“지금은 여러분들을 데리고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어느 제작자가 경력도 하나 없는 여러분들한테 메인캐릭터와 기본 구성까지 모두 맡기겠어요?”
“맞습니다.”
거액을 준다고 하니 이제는 맞장구도 잘 친다. 이게 돈의 위력인가?
“이번에 경험도 쌓고 이름도 알린다는 생각으로 임하세요. 자세한 일정은 이주희 작가가 메인 시놉을 짜가지고 올 테니까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될 겁니다.
그 때에는 이 자리에 없는 분도 참여하실 텐데, 그 분 같은 경우는 장르물 쪽으로 상당히 조예가 있으신 분입니다.
사실 그 분 같은 경우는 혼자 메인 작가를 맡아서 해도 될 정도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계시니까 그 분을 중심으로 잘 뭉쳐서 작업을 해 나가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감사 인사를 한다. 그런 그들에게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전속계약서입니다. 윤해연 작가나 이주희 작가와는 계약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혼자가 아닌 팀을 이뤄서 일하게 되기에 세부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거 하나만 집어주자면 어떤 작품에 참여하든 작가료는 모두 공평하게 지급될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 누구는 열심히 했고 누구는 슬슬 놀면서 하는데 돈은 똑같이 받는 게 아닌가 걱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죠?”
“뭐, 아무래도…”
조현준 작가가 눈치 보듯이 어색하게 답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창작이라는 게 정해진 양이 없고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저는 여러분들이 현명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이 중에 누구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을 수 있겠죠.
하지만 확실한 건 여러분 모두가 힘을 모았을 때 가장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체적인 원고료 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개별적인 원고료 조정은 없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모두 동의하신다면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우현의 설명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이름과 서명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펜을 놀렸다. 서명을 하는 와중에 다시 입을 열었다.
“쓰면서 들으세요. 지금 하는 계약은 파인 엔터와의 전속 계약이고 앞으로는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따로 계약서를 작성할 겁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 어떤 작품을 만드냐에 따라 몸값은 지금보다 훨씬 오를 수 있다는 걸 의미하겠죠?
현재 회당 천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나눠 보면 회당 250만 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드라마 작가들에 비하면 적은 돈이죠. 다음 작품에는 최소 인당 천만 원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 정말 그렇게까지 많이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원고료만 회당 4천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잘 만들어야죠. 여러분들이 아니면 안 될 작품을 만드세요.”
사실 이번에 이주희 작가와 만들 법정물은 시즌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에도 이주희 작가와 이들이 같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건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사무실로 이주희 작가가 방문했다. 최소 일주일은 지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벌써 다 썼어요?”
“말 했잖아요? 예전부터 생각하던 게 있었다고. 그래서 조금 빨리 썼어요.”
그녀가 내민 것에는 정말 딱 이야기의 기본 구성과 캐릭터 몇 개만 나열되어 있었다. 트리트먼트라고도 할 수 없는 정말 단백한 시놉시스.
“간단하죠? 일부러 잔가지는 쳤어요. 소설을 써버리면 저랑 같이 하는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오호… 그 배려심, 좋네요.”
“작품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플롯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팀으로 하는 건 처음이면서 꽤 많은 생각을 했네요? 좋습니다. 일단 읽어보죠.”
기본 줄거리는 별 볼일 없는 삼류대학 출신의 이혼전문 변호사에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후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서번트 증후군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한 가지 우연한 사건을 처리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에 입사하게 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클리쉐 좋네요. 대중들은 처음부터 잘난 사람들 보다는 밑바닥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통쾌한 반격을 보여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게다가 주인공이 천재로 변신한 상황이니 조금 더 극적이고 통쾌한 부분을 보여줄 수도 있겠고…”
“그렇죠? 중요한 건 주인공의 이런 장점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언제 소개시켜 줄 거예요?”
“뭐, 내일 만납시다. 이 시놉은 복사했다가 미리 나눠줄게요. 그리고 바로 캐스팅 들어가죠.”
“트리트먼트는 만들어야 하지 않아요?”
“작가가 많으니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금방 나오지 않겠어요? 그리고 편성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캐스팅은 고사하고 시놉시스도 안 나왔으니 양 국장이 얼마나 속이 타겠어요? 일단 캐스팅 이야기를 꺼내야 그 전에 연출자도 선정하니까요.”
“연출자가 아직 안 정해졌어요?”
“네, 제가 리스트 뽑아 달라고 했어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감이 안 잡혀서 일단 받아만 놓고 선정하지는 않았는데 양 국장한테 연락해야죠.”
“누구를 생각하시는데요?”
“천병준 피디라고 알아요?”
“천병준 피디요? 잘 모르겠는데?”
이주희 작가가 예능국 출신이라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재작년에 ‘응급실’이라는 의학드라마로 입봉한 감독이에요.”
“아… 그 드라마 알아요.”
“시청률은 그저 그랬고 화제성도 그리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언제 그 드라마 대본을 구해서 볼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웃기더라구요.”
“뭐가요?”
“그 피디가 글쎄 대본에 쓰여있는 그대로 딱 찍었던 거예요. 융통성을 발휘해서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장면도 그냥 무난하게… 보통 입봉하게 되면 연출에 과하게 힘을 넣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건조해도 너무 건조한 거죠.”
“아…”
“이런 피디들이 몇 있기는 해서 별로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는데, 올해 초에 편성이 빵구나서 4회 짜리 단편 하나를 찍었던 거죠. 이번에는 어떻게 찍나 한번 봤는데 이번에는 꽤나 감정을 잘 건드리기에 그쪽 촬영감독 통해서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랬는데요?”
“작가와 처음부터 합의했던 대로 하는 거였대요. 입봉할 때는 작가가 연출자를 믿지 못해 자신의 대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했었고, 단편을 찍을 때는 작가가 신인이라 서로 합의를 통해서 잘 만들었다고 하네요.”
“아… 그럼 실력이 좋은 사람이네요.”
“하하,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선정한 게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우현의 말에 이주희 작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럼 뭐 때문에요?”
“그 정도 실력 있는 연출가는 KBC에도 몇 있어요. 내가 그 친구를 선정한 건 자제할 줄 알아서예요. 아무리 작가와 선을 넘지 말라고 얘기가 됐다고 해도 막상 카메라 돌기 시작하면 감독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럼에도 대본 그대로 찍는다는 건 어지간한 자제력 없이는 힘들어요.”
“우와… 그거 지금 저를 비롯한 작가진들한테 엄청 부담 주는 말인 거 알고 있죠?”
“그럼요. 부담 가지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사람 선정해서 대본 그대로 찍으라고 할 거거든요.”
“그 감독분이 기분나빠하지 않을까요?”
“기분이야 나쁘겠지만 원래 연출자들 속성이 시청률만 보장된다면 카메라 들고 춤을 추라고 해도 출 사람들입니다. 시청률만 잘 나오면 기분 나빠서 툭 튀어나왔던 입도 쏙 들어가서 꼬리를 흔들 거니까 작가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머리 위에 암석을 하나 올려놓으시네요. 아휴, 부담 돼서 목이랑 어깨에 담 걸리겠어요.”
“그래도 그 돌덩이, 이번에는 여러 명이서 함께 질 거니까 조금은 덜 무거울 겁니다. 하하하!”
사실 담백한 연출자를 선정한 이유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법정물처럼 서로 간의 지식이 충돌하는 장면이 많은 드라마는 연출자가 무리해서 힘을 집어넣게 되면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최대한 담백하게 연출해주는 것이 주연배우의 매력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다.
또한, 이제 입봉한 감독이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이주희 작가와 나머지 작가팀들과의 기 싸움까지 생각한 것이다.
다음 날, 강남의 한 민물장어 집에 이주희 작가는 물론이고 가장 먼저 작가 팀을 구상하게끔 유도(?)한 이재호 작가와 임지은 작가, 한세연 작가, 그리고 조현준 작가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화합을 다졌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메인작가 타이틀을 달고 선장 역할 맡게 된 이주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저는…”
이렇게 서로 간의 자기소개(?)가 이어지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술과 음식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서로 간의 친목을 다지려는 게 목적이었는데 몇 잔의 술이 돌고 나니 자연스럽게 작품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구체적인 스토리와 몇 개의 에피소드에 관한 아이디어가 즉석에서 오갔다. 그러던 중 이주희 작가의 눈이 우현에게 향했다.
“맞다. 캐스팅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아… 이 작가님을 비롯해서 여러분께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요.”
“네? 무슨 양해요?”
“주인공 성별을 좀 바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