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새로운 시도(4)
사실 은하는 사진 같은 게 찍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오빠는 기겁을 할 소리지만, 열애설 나면 나라지. 인정하지, 뭐.
은하는 얼굴의 절반을 덮는 마스크를 끌어 올린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극장으로 들어갔다. 눈썰미 좋은 여직원들의 흘깃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직원들이 사진을 찍진 않을 테니까.
평일 밤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몇 없다. 게다가 인기가 많은 영화는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구석의 커플석에 앉아 의자를 탁탁 두드리며 우현에게 옆에 앉으라는 눈짓을 하자 우현은 기가 차 하면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옆에 앉는다.
잠시 후 암전이 되자 은하는 우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불이 꺼지니 우현도 조금은 안심이 되는지 별 말이 없다.
영화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자 우현이 약간 뒤척인다. 혹시 불편한가 싶어 은하가 고개를 드니 우현이 팔을 뻗어 은하 허리를 감쌌다. 은하는 빙그레 웃으며 우현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기댔다.
참 편안하다. 주변이 신경 쓰여서 과연 영화를 볼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긴장되기는커녕 오빠의 품이 편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 그녀가 연예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 주위엔 전부 그녀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 천지였다.
스타로 만들 능력은 없으면서 연예 지망생들을 이용해 먹고 버리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에게 다가온 우현은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남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자신은 이 바닥을 전전하다 결국 스폰받아 살게 되는 흔한 지망생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현을 자신의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떠났을 때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가 폐인처럼 살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흘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이제는 그를 떠나보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은하는 손을 뻗어 우현의 배를 감쌌다. 그러자 우현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후훗.”
작품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그렇게도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은하 앞에서는 숙맥이 되는 게 귀엽다. 그래서인지 은하는 우현을 만나면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살며시 우현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흡… 하지마…”
우현이 간지러운지 은하의 손을 밀어낸다.
“뭐야? 싫어?”
은하가 노려보자 순둥순둥한 얼굴이 된 우현이 슬쩍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좀 그래…”
우현의 이런 반응이 재미있는 은하는 또 장난기가 돌았다.
우현의 귀에 바짝 입을 가져대 대고선 속삭였다.
“뭐가 좀 그런데?”
“아유… 영화 안 보냐?”
“크큭, 난 다 보고 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은하는 우현의 배, 옆구리, 가슴께를 간질였다.
“너, 집에 가서 혼난다.”
그러면서도 눈은 웃고 있는 우현의 품에 은하는 포옥 안겼다.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 다시 일에 빠져들었다.
“대표님, 준비 끝났습니다.”
민주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그녀를 따라 사무실 한쪽의 회의실로 향했다. 세 명의 작가들과 면접 아닌 면접을 보는 것인데 세 명을 한꺼번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짝 긴장해서 앉아있던 세 명의 남녀가 얼른 일어나 인사한다.
“반가워요. 앉으세요.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 파인 엔터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지원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원고는 제가 직접 다 읽었습니다.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윤해연 작가나 이주희 작가처럼 메인작가 한 명을 키우기 위해 여러분들을 뽑은 건 아닙니다.”
말이 끝나자 당연하게도 우현의 앞에 앉은 남녀들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미리 이야기 해주지 않았기에 당황하는 건 당연하다.
“그럼 저희는…”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연 사람은 30대 중반의 여자로, 밝게 염색한 머리와는 대조적으로 안색이 조금 어두웠다. 미리 사진을 봤기에 그녀가 임지은 작가임을 알았다.
“저는 이번에 작가팀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서너 명이 한 팀이 돼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서로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들로 뽑았어요.”
“아…”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낮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기쁜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메인작가가 되기만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느닷없이 팀을 이뤄서 글을 쓰라고 하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미리 공지하지 않은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받고 싶어서였다.
“이제부터 질문 받을게요. 궁금한 거 있으시면 말해주세요.”
그들은 잠시간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작은 키에 피부가 하얀 한세연 작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작가팀이라는 걸 생각해보지 않아서…”
표정을 보아하니 괜히 지원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다른 분은 어떠세요? 다들 작가팀이라는 걸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저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아서…”
청일점이었던 20대 후반의 남자 역시 눈치를 보며 말한다.
“그렇군요. 좋아요. 그럼 일단 제가 왜 여러분들을 뽑았는지 설명해드릴게요. 우선 한세연 작가님, 보내주신 원고 잘 받았습니다. 아주 잘 읽었구요.”
“네…”
“현재 임성민 작가님 밑에서 보조작가 하고 계시죠? 벌써 5년 넘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녀의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또한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것이 못내 부끄럽고 화가 난 것 같았다.
“네…”
“지금까지 보조작가 생활만 10년 하셨던데 아직까지 데뷔 못하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작가님께서 보내주신 원고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운이 없어서만이 아니에요.”
우현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럼요?”
“캐릭터가 아주 잘 살아있더군요. 대사를 보면 정말 하나하나 그 캐릭터에 아주 잘 녹아들어있어요. 특히 맛깔나는 사투리를 정말 잘 구사해서 극에 자잘한 재미를 불어넣었구요.”
“그런…데요?”
그녀는 우현이 칭찬만 늘어놓자 이제부터 그녀의 단점이 나올 거라고 짐작했는지 잔뜩 긴장했다.
“그게 다예요. 인물들은 살아 있는데 왜 그걸 봐야하는지 모르겠어요. 남주가 왜 그렇게 여주를 따라다녀야 하는지, 왜 여주는 남주를 피하는지… 모르진 않아요. 아주 친절히 설명해줬으니까. 그런데 동기가 약해요. 그리고 그 약한 동기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쟤들이 저렇게 알콩달콩 즐기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래서 쟤들이 뭘 하려는 거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죠.”
“아…”
그녀는 낙담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알고 있죠? 본인의 단점? 제가 처음 말하는 거 아니죠?”
“네…”
지금껏 이런 이야기도 못 들었다면 10년간 헛짓한 거나 다름없다. 문제는 알면서도 잘 안 고쳐진다는 것.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것. 둘 중에 하나예요. 글을 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캐릭터에 빠져들어서 자꾸 놓치거나 아니면 아예 이런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거죠.”
“…”
“솔직히 제가 메인작가를 뽑을 거라고 마음먹었다면 한세연 작가님을 뽑지 않았을 겁니다. 혼자 드라마를 만들기에는 부족하거든요. 제가 왜 작가님을 이 자리로 불러냈는지 알겠나요?”
“하아… 네.”
그녀는 여전이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 조현준 작가님 이야기를 해볼까요?”
“네? 저요?”
남자는 화살이 자신에게 오자 긴장했는지 손을 가늘게 떨었다.
“네, 조현준 작가님은 한세연 작가님과는 반대예요. 플롯이 아주 치밀하고 구체적이죠. 하지만 글을 읽다가 자꾸 대본을 내려놓게 돼요. 왜인지 짐작 되세요?”
“그… 캐릭터가 재미가 없었나요?”
“정확히 말하면 캐릭터가 다 똑같아요. 말투도 같고 성격도 비슷해요. 마치 두세 명의 인격으로 캐릭터 전부를 돌려막기 하는 것 같다구요. 수사관, 범죄자, 민간인, 이렇게 세 가지의 인격으로 나눈 것 같다구요.”
“아…”
“그러니 몰입이 되려다가 자꾸 튕겨 나와요. 역시나 제가 작가님을 뽑은 이유를 알겠나요?”
“네…”
그 또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우현은 시선을 그의 옆에 있는 임지은 작가에게로 돌렸다.
“임 작가님은 구성도 좋지 않았고 캐릭터도, 대사도 별로였어요.”
“그런데 왜…?”
그녀는 모든 면에서 별로였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뽑은 이유가 궁금한지 눈을 빛냈다.
“클리쉐를 잘 쓸 줄 알더라구요. 분명 구성도 별로고 캐릭터도 살아있지 않은데 계속 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한 마디로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뭘 보고 싶어 하는지 아주 잘 알아요. 보통 그게 되는 분들은 다른 부분도 좋은데 임 작가님은 의외이긴 했어요.”
“아… 정말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할 수도 없다는 말씀이네요.”
“당연히 절망하면 안 되죠. 제가 여러분들을 왜 불렀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들은 혼자 쓰셨기 때문에 지금껏 데뷔가 어려웠던 겁니다. 메인작가로 데뷔하고 싶으세요? 장담하는데 지금의 단점을 고치지 않으면 근시일 내에 데뷔는 힘들 겁니다. 아니, 데뷔한다고 치죠. 시청률 10% 이상 뽑아낼 수 있을까요?”
“…”
우현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시청률 10% 이상 뽑아내지 못하면 1년에 한 작품 하기 힘듭니다. 아시죠? 회당 천만 원 이상 받는다고 해도 2년에 한번, 3년에 한번, 그렇게 잊혀지게 되는 작가들 천지라는 거. 그러다 5, 6년 만에 작품 하나씩 하는 작가들 너무나 많다는 거. 데뷔만 한다고 끝나는 거 아닙니다. 데뷔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거. 그게 진짜 원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잘 될까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그런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든 적이 없는데…”
한세연 작가의 걱정 어린 물음에 우현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만들 겁니다. 돈 걱정 없이 글 쓰는 게 소원이시죠?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릴게요.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임지은 작가가 한쪽 손을 번쩍 들더니 입을 열었다.
“해볼게요. 어차피 보조작가 생활 이제는 지쳤거든요. 제가 손을 댄 글이 전파를 탈 수 있다면 시도해보고 싶네요. 그리고… 다큐에 나왔던 대표님의 능력을 믿어볼게요.”
“좋습니다. 다른 분은?”
이렇게 되자 한세연 작가와 조현준 작가도 한번 해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후 간단한 자기소개가 이어지고 한세연 작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희가 들어갈 작품이 결정 됐나요?”
“혹시 미드 ‘굿 와이프’나 ‘슈츠’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