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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공짜를 좋아하면?(4)
“아, 그거요? 저도 사실 그것 때문에 고민입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다가온다.
“네? 왜요?”
“은하 작품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새 작품이냐고 하도 성화를 떨어서요. 그래서 저쪽이랑 이야기 다 끝냈는데 그냥 날리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궁금하셨던 거예요?”
“아, 아뇨. 음… 제가 이번에 예능 하나 해보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딱 보니 이미 들어야 할 말은 다 들었나보다. 뜬금없는 예능 언급이라니…
“글쎄요. 어떤 컨셉인데요?”
“소개팅 컨셉이래요. 해외 나가서 남자들과 만나는…”
강소연이나 유은하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우희연 정도면 지상파 미니 주연급 배우다. 케이블에서 전성기가 지난 여배우를 불러서 할 법한 예능을 언급하니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조언한다고 해도 좋은 말은 듣기 힘들 거다.
“아이고, 희연 씨가 왜 그런 예능을 하세요? 게다가 상대 남자도 누가 나올지 모르는 거네요. 오로지 희연 씨가 재미를 이끌어 내야 하는데, 부담도 되실 거고 잘 되도 문제죠. 팬들한테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그런 예능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저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드는데 회사에서 자꾸 해보라는 통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건 옆에 앉아 있는 강소연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소연은 우희연의 거짓말에 기가 차다는 듯 아예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무시하세요. 희연 씨 정도면 이제 회사 말 정도는 가려들을 수 있잖아요?”
“아하하! 그렇긴 해요. 아, 맞다. 저 피부과 예약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언니, 나 먼저 갈게요. 다음에 언제 밥이라도 한번 먹어요.”
“그래라.”
퉁명스런 소연의 말에도 희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보이며 가게를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바로 강소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쟤 왜 여기 있었던 거예요?”
“미안해요. 혹인 줄은 알고 있는데 달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녀의 얼굴은 미안한 얼굴이 아니다. 하지만 원래 그녀가 빈말로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성격임을 알고 있기에 기분 나쁘지 않았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데서 이야기 하긴 그렇지만 서로 못 볼꼴을 본 사이?”
그 순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이 됐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우희연이 바로 마이더스 사장인 백창준의 스폰을 받았었고 강소연은 백창준의 옛 애인이었다.
어찌 보면 백창준 그 인간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와이프가 있으면서 강소연을 애인으로 두고 우희연을 스폰해줬다니…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 욕을 해야 하는 건지…
우현의 놀란 표정을 보고 강소연이 쓴 웃음을 짓는다. 우현이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은하 걔가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죠?”
“아닙니다. 무거운 편인데…”
“뭐, 보통 여자들은 애인한테까지 입이 무겁긴 힘드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이야기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죠?”
여기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할 수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이상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어쨌든 불편한 혹이 자기 스스로 떨어져 나갔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계약에 관한 사항은 저희 쪽이 살펴보겠습니다. 변호사들이 계약서 검토할 것이고 물론, 계약 외적으로 백창준 대표와 이야기 된 부분 역시 확인 절차를 밟아서 처리할 겁니다. 원하시는 계약 조건이 따로 있으신가요?”
“있어도 안 들어줄 거잖아요?”
“하하하! 역시 소연 씨는 참 화끈하시네요. 들어드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들어드릴 테니 한번 말씀해보시죠.”
“아뇨, 괜히 까탈스러운 여자라는 취급 받고 싶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건 전부 돈으로 해결 가능한 거고, 전 돈 많아요.”
어디 다른 톱스타들은 돈이 없어서 갖가지 조건들을 걸겠는가? 확실히 이번 드라마의 흥행으로 그녀는 마음의 부담감을 많이 떨쳐버린 듯싶었다. 아니, 어쩌면 더 욕심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강소연 씨 정도 되면 원하는 조건도 작은 게 아닐 거라서 내심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다른 회사랑 계약하는 거였다면 외제차 정도는 요구했을 거예요. 랜디로버나 포르셔정도?”
“운이 좋은 건가요?”
“이미 그 정도를 넘어가는 선물을 주셨잖아요? 다른 회사는 대표님 같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거든요. 그깟 외제차는 내가 사면 되니까.”
“이거 이주희 작가한테 갈비세트라도 보내야겠습니다.”
“고작 갈비 정도로 되겠어요?”
“하하하! 그렇죠. 최고급 한우 특수부위 세트로 보내겠습니다.”
“뭐, 그 정도라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을 하니 농담 같지도 않다. 저런 자신감은 정말 강소연이나 유은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패시브 스킬 이랄까.
이후 계약에 관련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어본다.
“아, 아까는 끼어들 수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는데 진짜 은하가 싫다고 하던가요?”
“아까 우희연하고 했던 이야기요? 영화 ‘푸른 별’ 말이죠?”
“네.”
“그럴 리가요. 은하는 지금까지 내가 권하는 작품을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소연은 오늘 처음으로 무표정한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웃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하게 움직인 입가에 살짝 벌린 입술.
“단 한 번도 말인가요?”
“네. 이렇게 들으시면 그냥 은하가 아무 생각도 없이 연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참고로 저는 은하에게 작품을 제의할 때 그냥 시놉시스만 딱 던져주고 시킨 적이 없어요. 이게 왜 너에게 필요한 건지, 어떤 부분에서 네가 성장하게 될 건지, 이걸 하고 나면 네가 어디까지 올라가 있을지… 물론 지금은 연기 내공이 쌓여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더라구요.”
“그럼 이제는, 제가 은하가 듣던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군요.”
“하하, 소연 씨 정도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워낙 경력도 오래 되셨고 연기력이야 두 말하면 입 아프니까요.”
“지금까지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흥행 결과야 말로 두 말하면 입 아프죠. 어쨌든 은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거죠? 그럼 왜 아까는…”
“거짓말을 했냐는 거죠?”
“네. 개념이 좀 없기는 해도 굳이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속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귀찮아서요.”
“귀찮다구요?”
“우희연 씨만 귀찮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소연 씨도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저와 관련된 다큐가 나가면서 많이 곤란해진 게 사실입니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연예계 지망생들은 물론이고 지금도 수시로 투자자들이 찾아와서 흥행할 작품을 골라달라고 해요.”
“유명세를 타고 계시네요. 파인 엔터에서 제일 잘 나가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문제는 귀찮기만 하고 실속이 없어요. 그리고 너무 유명하면 뭘 하든 제약이 걸리잖아요? 이건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연 씨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제약이라면 어떤 걸…?”
“만약 소연 씨에게 정말 잘 어울리고 흥행할 가능성이 높은 영화를 콕 찍었다고 해보죠. 그럼 ‘파인 엔터 김우현이 고른 작품은 다 잘 된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돌 테고 당연히 소연 씨가 캐스팅 되는 데에 여러 불필요한 에너지와 돈이 낭비될 수 있겠죠.”
“아…”
그녀도 그제야 우현의 이야기를 이해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없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물론 거기에 우희연 씨가 소문을 조금 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구요. 아니라면 할 수 없죠. 제가 언론플레이를 할 수밖에.”
“너무 나가는 거 아닌가요?”
“아뇨, 아시죠? 석호가 ‘푸른 별’에 조연으로 캐스팅 됐다는 거.”
“알고 있어요. 뭐, 작품이 크게 흥행하지 않아도 저렇게 큰 규모로 들어가는 영화를 경험한다는 건 석호에게 의미 있는 일이죠. 아, 석호가 ‘푸른 별’에 캐스팅 됐으니 이 영화가 잘 될 거라는 대표님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이겠네요.”
“아마 제가 진짜로 미다스의 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겠죠.”
“만약 흥행이 실패한다면…?”
“김우현은 미다스의 손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을 테고 그럼 은하나 소연 씨를 비롯한 소속 아티스트들이 일을 하는데 조금 더 수월해지겠죠.”
“하지만 대표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거예요.”
“저는 신이 아닙니다.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바닥에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죠. 또한,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면 전부는 아니네요. 결국 중요한 사람 몇몇만 알아주면 된다는 건가요?”
“그럼요. 원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가치가 있는 거니까요.”
“하아… 그럼 희연이가 저걸 덥석 물면 어떻게 되는 거죠?”
“별 거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출연한 배우들은 개런티 다 받고 출연해서 영화가 망해도 눈치 좀 보고 만다는 거. 투자한 사람들이 문제죠.”
“제가 알기로 회사에서 이 영화에 투자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말로는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연의 입가에는 가는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글쎄요. 개봉하고 나서 한숨 좀 쉬지 않겠어요?”
“어머나… 김 대표님 갈수록 마음에 드는데요?”
이제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소연은 한눈에 봐도 수천만 원은 호가할 명품 백을 어깨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마음 변치 않았으면 좋겠군요.”
“여자 마음은 갈대라잖아요? 뭐, 내가 대표님하고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갈대처럼 흔들리기까지야 하겠어요? 이대로만 쭉, 잘해주시면 좋겠네요.”
“모레까지 계약서 준비해 놓을 테니 그 때 보시죠.”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하나 있어 곤란하다고 여겼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오히려 더 잘 된 것 같다. 어차피 누군가는 맡아야 할 몫이었고 그게 마이더스의 우희연이 된다면 그것만큼 절묘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사실 이 영화가 엄청난 폭망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손익분기점의 벽이 너무 높을 뿐이고 그걸 뚫을 만큼 강한 임팩트가 없어 보일뿐.
그 정도가 딱 좋다. 크게 욕먹지 않고 서로가 조금씩 실망하는 정도.
이틀이 지나 강소연과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그녀의 매니저와 코디,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그녀를 따라다니는 스태프는 전부 그녀를 따라 파인 엔터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회사는 곧바로 그녀의 이적 소식을 보도 자료로 뿌렸다.
대형 포털사이트의 강소연의 이적 소식이 실시간 검색 1위를 차지한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우희연의 ‘푸른 별’ 캐스팅 기사가 터져 나왔다.
그 기사는 우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속기사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희연이 기자와 한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우현을 거론하며 대박이 날 작품이라고 호언장담했다는 말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