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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공짜를 좋아하면?(3)
이 영감탱이가 계속 받아주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까지 시전한다. 아무리 이 작품의 ‘여옥’의 캐릭터가 극의 비중이 조금 있다손 치더라도 그래봐야 남자 주인공 들러리에 불과하다.
그런 영화에 유은하의 이름을 꺼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돈이 썩어나게 많아서 다른 영화에 비해 개런티를 두 배 가까이 부를 수 있든가, 아니면 자신을 호구로 보든가…
“유은하는 이 작품에 출연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웃는 얼굴로 받아주다가 정색하고 단호하게 말하니 영감이 멈칫한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한 번 탁상을 탁! 내려친다.
“이봐요! 김 대표, 이제 보니 셈이 느리구만. 이거 딱 보면 모릅니까? ‘천만 영화란 이런 거다’라고 딱 안 보여요?”
“죄송하지만 저희 여배우들은 지금 이 영화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아, 여기 보니까 조연 많이 필요하시죠? 남자배우 하나 있는데 솔직히 욕심나네요.”
“누, 누구요?”
“연기 잘하고 분위기 잘 잡습니다. 하지만 말이 조금 느리죠. 오히려 전쟁 상황에서 어리버리한 신병 역할을 잘 해낼 겁니다.”
“크흠… 내가 지금 조연이나 캐스팅 하려고 여 온 게 아닌데…”
그는 빈정이 상했는지 팔짱을 끼며 입술을 씰룩인다. 하지만 우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석호의 프로필 사진을 꺼내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 작품이 별로라서 은하가 출연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은하 성격 아시죠? 남자 들러리 되는 배역 안 맡아요. 그리고 고작 얼마 전에 영화 촬영 끝났기 때문에 당분간 쉴 생각이랍니다. 걔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말려요, 아시죠?”
“이 바닥에서 유은하 성격 모르면 간첩이지… 그런데 대표가 돼서 소속 배우도 휘어잡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이 영감탱이를 어떻게 엿을 먹여야 속이 시원해질까? 말년에 후배한테 험한 소리 듣게 하는 게 미안해서 조절하고 있었더니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한다.
문제는 이 영감이 뭘 믿고 이렇게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건지 그걸 모르겠다는 거다. 단순히 투자가 잘 되고 있어서?
생각해보니 이상한 건, 어떻게 이런 대형 영화를 영진 영화사 같은 중소 제작사가 맡을 수 있었을까? 이런 영화는 자사 멀티플렉스까지 갖춘 CS에서 제작을 맡아야 나중에 손해를 봐도 최소화 할 수 있고, 잘 나갈 때는 이익 역시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작은 영화사에서 이렇게 큰 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뭔가 우현이 모르는 거래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남주로는 누가 캐스팅 됐다고 합니까?”
“왜요? 안 하려고 하드만… 궁금하긴 한가 보지요?”
“이런 대작에 누가 남주로 캐스팅이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죠.”
“흐흐흐… 아직 캐스팅이 된 건 아니고, 지금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뭐, 확정이나 다름없긴 해요. 가 소속사에서 투자금까지 들어왔으니 뭐… 으흐흐.”
소속사에서 영화제작에 투자까지 한다? 우현 같은 경우도 투자 유치를 했지 직접 투자는 하진 않았다. 그만큼 회사 자금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영감탱이 얼굴에 맺힌 미소를 보니 몇 천 정도 투자한 게 아닌가보다.
“대형 매니지먼트사인가 보네요? 궁금한데 알려주십쇼. 남주로 누가 캐스팅되기로 했습니까?”
“이거 참… 유은하도 안 주면서 궁금한 건 많은갑네.”
“저도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죠. 그런데 은하가 이렇게 철벽을 쳐 놨으니… 아, 그러면 저도 은하한테 한번 적극적으로 밀어보겠습니다.”
“그래봐 줄 수 있겠어요? 우리야 유은하가 합류하면 너무 좋지. 그리고 우리 김 대표도 이제 이런 작은 회사에서 벗어나서 큰 회사 운영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지가 뭐라고 저런 헛소리를 하는지… 코웃음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그러면 저야 좋죠. 이제 알려주시죠. 누가 남주를 하게 된 겁니까?”
“윤범진이. 걔가 남주를 맡기로 얘기가 됐습니다.”
마이더스 소속 윤범진은 연기파 배우로 조연부터 시작해서 주연급 배우가 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30대 후반이지만 동안이라 젊은 역부터 나이가 있는 역까지 다양하게 소화가 가능한 배우다.
“마이더스가 큰 결심을 했나 보네요.”
“아주 현명한 결정을 한 거 아니겠습니까? 파인 엔터도 그런 현명한 결정을 하길 바랍니다, 허허허.”
“그럼 대표님도 이 영화에 투자하셨습니까?”
“그럼요!”
당당하게 소리치는 영감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슬쩍 우현의 시선을 피한다.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하긴, 원래 사업은 남의 돈으로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이 영감탱이도 남의 돈으로 판을 벌려놓고 한 몫 챙길 심산일 거다.
“대단하네요. 대표님은 얼마나 투자하셨습니까?”
“저, 저는 돈이 별로 없어서 5억 밖에…”
“아… 제작사가 많이 힘든가 보군요.”
“힘이 들기는… 우리 회사가 어려웠으면 이런 좋은 작품을 시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국가지원금은 뭐, 아무나 턱턱 받아낼 수 있는 건 줄 알아요?”
이 영감이 다른 건 몰라도 그 쪽으로 재능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건 아니죠. 대단하십니다. 하여튼 저희 석호 잘 좀 봐주십쇼. 은하는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럼 대표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허허.”
그가 나가자 곧바로 삼전투신의 윤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께서 전화를 다 하시고… 혹시 동연건설과 말이 잘 안되나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방금 영진 영화사 대표가 다녀갔어요.”
“네? 하하, 그 인간 바쁘네요. 파인 엔터는 왜 갔답니까?”
“달리 이유가 있겠습니까? 유은하를 달라더군요.”
“하하하, 그 인간, 캐스팅을 모두 톱스타들로만 할 거라고 큰소리 치고 다니더니 진짜였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이 영 느낌이 안 좋던데요?”
“그래요? 어떤 점이…?”
전에 창원까지 가서 들었지만 그 영감은 영화 제작하고 뒤로 돈을 빼돌리는 데는 선수라고 봐야 했다. 그런 그가 2백 억짜리 대형 블록버스터를 제작하는데 얼마나 돈을 챙길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천천히 이야기해주니 윤 팀장도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이야기니까 저희가 나름대로 준비하도록 하죠. 이번에도 잔머리 쓰면 아마 가진 돈을 모두 토해내야 할 겁니다.”
삼전그룹 직원 정도 되면 모르고 당한다면 몰라도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다면 결코 손해 볼 사람들이 아니다. 아마 이번에 영화가 흥행을 하든 못 하든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될 거다.
“저도 이 바닥에 저렇게 물 흐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하여튼 준비 잘 하세요.”
“이거 또 신세지게 됐네요. 잘 하면 영화가 손해 본다고 해도 영 손실만 있을 것 같지는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잘 마무리 하나 싶었는데 다음 날, 오전부터 유은하의 캐스팅 기사가 포털에 떡 하니 뜨고 말았다. 합의도 하지 않고 일단 기사부터 내고 본 거다.
사실 이런 식의 기사는 제작사에서 일부러 내는 것이 흔한 일이긴 하다. 미리 제작하는 영화, 또는 드라마를 홍보할 목적과 더불어 네티즌 반응을 보며 캐스팅에 적합한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배우들이나 매니지먼트사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확정되지 않은 작품에 기사가 나가 괜히 어울리네, 연기가 별로라서 반대네, 따위의 말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홍보팀은 전부 반박기사 보도자료 뿌려요. 그리고 캐스팅 기사 올린 곳에 전화해서 당장 내리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아침부터 홍보팀을 닦달하고 난 뒤 영진 영화사 대표에게 전화하니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아, 그거야 당연히 생각해보겠다고 했으니까 냈지요. 설마 빈말로 했던 겁니까?”
“생각해보겠다고 한 게 아니라 제가 설득해보겠다고 한 거죠. 이해를 못 하셨네.”
“그거나 그거나죠. 그러면 어쨌거나 유은하 씨는 이 영화에 출연 안 하겠다 이겁니까?”
“네, 은하가 극구 거부해요. 그보다 우리 석호 좀 봐주십쇼.”
“허허, 김 대표가 사회생활을 잘 모르네. 어쨌거나 알겠습니다. 석호 그 친구는 내가 감독한테 말 잘 해놓을게요.”
그가 사회생활을 잘 모른다고 한 이유는 윤 팀장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윤범진은 지상파 예능에 고정 출연하기로 결정됐고 또 다른 배우는 광고모델로 발탁되기로 했단다.
결국 그 영감 뒤에 있는 거대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말이었는데 윤 팀장도 그 부분에서는 안타까워했을 정도였다.
사실 아무리 국뽕영화라고 해도 비즈니스를 하는 입장에서 흥행될 만큼 재미있고 배우의 이미지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 충분히 출연시킬 의향이 있다.
문제는 그 영감이 들고 온 시나리오가 별로였고 그게 제대로 만들어질지도 의문일 정도로 형편없는 인물이 제작을 주관한다는 거다. 이런 영화에는 절대 발도 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석호처럼 이제 막 시작하는 신인배우일 경우는 다르다. 최대한 많은 작품에 얼굴을 비추고 많은 캐릭터를 소화하며 능력을 키워야 한다.
어쨌거나 그 영감이 석호를 출연시켜 주겠노라고 큰소리 친 이후 며칠이 지나자 영화 제작을 위해 따로 만든 특수목적법인인 ‘푸른별 제작’에서 연락이 왔다. 석호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 것이다.
별이나 은하와는 달리 석호는 깊이 보지 않으면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보다 캐스팅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첫 번째 오디션에서 바로 합격한 것이 의아했을 정도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망할(?) 것이 예상되는 영화 ‘푸른 별’ 때문에 석호는 상당히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됐고 별이는 뜻밖에 아파트 한 채를 얻게 생겼다.
별이는 저들이 제안한 대로 원 플러스 원 계약을 맺고 당장 이사를 준비했다. 평생 전세와 월세만을 떠돌다 자기 집을 갖게 돼서 부모님이 너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고민했나 싶었다.
석호의 손을 잡고 출연 계약까지 순조롭게 맺고 나서 며칠이 지났을 때, 강소연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마이더스와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옮길 때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까닭에 남산 근처의 조용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남은 지겹다나? 그런데 커피숍에 들어서니 강소연 말고도 한 명의 여배우가 더 나와 있었다.
“어머, 제가 나와서 불편한 건 아니죠?”
‘서울패션위크’에서 봤었던 우희연이었다. 강소연의 표정을 살피니 팔짱을 낀 채 상당히 불편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반갑습니다. 불편한 건 아닌데 이유는 궁금하네요.”
“다른 건 아니고, 소연 언니가 대표님 회사로 간다면서요?”
이미 이야기를 듣고 온 것 같아 굳이 거짓말을 하진 않기로 했다.
“아마 그럴 것 같네요. 그게 궁금해서 오신 것 같지는 않고…”
“사실 전에 다큐 재미있게 봤었어요. 그리고 은하 씨도 그렇고 여기 소연 언니까지 가신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서요.”
“뭐가 궁금하시죠?”
“기사 보니까 은하 씨가 이번에 ‘푸른 별’과 캐스팅 협의 중이라면서요?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반짝이는 우희연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알았다. 그녀에게도 캐스팅 제의가 갔다는 걸.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폭탄 한번 돌려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