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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공짜를 좋아하면?(1)
“복채는 20억 투자로 충분하지 않나요?”
윤 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턱도 없는 소리다.
“그렇지 않죠. ‘28시간’은 흥행할 작품입니다. 그리고 20억의 추가 투자는 추가 수익으로 돌아올 거구요. 복채라고 하기에는 서로 민망하지 않습니까?”
“하하, 생각지도 못한데서 제대로 맞았네요. 복채라… 단순히 돈을 달라는 건 아니실 테고…”
진짜 점집에 온 것처럼 돈 몇 십만 원 준다고 하면 그건 스스로 바보 인증하는 꼴이 된다. 누가 봐도 우현의 태도는 회사 간의 거래를 말하는 건데, 이게 삼전의 입장에서 무엇을 주기가 애매하다.
일단 회사 돈을 아무 이유 없이 건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컨설팅 비용이라고 했다간 회계감사에서 철퇴를 얻어맞을 거다. 이건 우현 역시 알고 있다.
“우리 별이가 삼전하고 인연이 없네요. 하나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와… 쎄게 나오시네요. 그 정도 복채는 저도 감당이 안 됩니다. 아시죠? 삼전투신은 TV광고를 하지 않아요.”
삼전증권도 아니고 삼전투신은 TV광고를 할 이유가 없다. 삼전투신의 물건을 팔아 젖히는 곳이 대한민국의 증권사들이기 때문이다. 삼전투신의 수익률이나 안전성에 관한 내용은 그들이 고객들에게 설명할 것이기에 TV광고를 낼 필요성이 없다.
“압니다. 삼전증권도 광고 안 하시잖아요?”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어떤 걸…”
“이번에 아파트 광고 모델 계약기간 끝나 가시죠?”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는 우현의 말에 윤 팀장이 멈칫한다.
“설마… ‘내미안’ 광고 모델을 달라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힘듭니다. 삼전물산에서 진행하는 광고를 저희가 건드릴 수는 없죠.”
“흠… 그렇군요. 그럼 어렵겠습니다.”
고개를 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그가 급히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진짜 그냥 가시려구요?”
“아무리 남이라고는 해도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맞지 않죠.”
말은 이렇게 해도 결국 복채 없이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뜻이니 윤 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잠깐이면 됩니다.”
그는 억지로 우현을 앉혀놓고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즉시 팀원들을 불러 모아 우현이 있는 회의실에서 멀리 떨어진 회의실에 모였다.
양 팀장은 팀원들을 모아놓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지금 저기에 누가 와 있는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투자해야 할 ‘푸른 별’에 대해 물어보니까 맨입으로는 말해줄 수가 없다네. 복채를 달라는 거야.”
“그 정도로 자신 있답니까?”
날씬한 체구의 검은 뿔테안경을 쓴 박 책임이라는 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신감으로 보면 며칠 전에 신내림 받은 얼굴이야.”
“단순히 돈을 달라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원하는 게 뭐라고 하던가요?”
“저 미친놈이 ‘내미안’ 아파트 광고모델을 달라는데?”
“하하하! 이야… 배짱이 두둑한 건가? 아니면 또라이인 건가?”
“뭐가 됐든 결정하자고. 받어? 말어?”
“아파트 광고 줄 수는 있는 겁니까?”
“말해 볼 수는 있어. 지금 전자 마케팅 팀에 계시는 정 부장님이랑 물산 마케팅 팀의 최 부장은 동기거든. 물론 실무선만 가지고는 안 되지. 그쪽 마케팅 상무님께 이야기 드려야 해.”
“아… 복잡해지는데요? 그냥 보내면 안 됩니까?”
“그럼 ‘푸른 별’은 얼마 투자할 건데? 네가 결정할 수 있어?”
박 책임도 쓴웃음을 지으며 쥐고 있던 펜을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윤 팀장은 희끗한 새치가 섞인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거 제작비가 얼마짜리인지 알지? 2백억이 넘어. 윗선에서는 최소 백억은 투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 나와. 백억 날리면 책임은 누구에게 갈까?”
윤 팀장의 말에 대답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다. 이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 중에서 임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거.
이 말은 결국 아무리 좋게 끝나도 승진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나쁘게 끝나면 누구 하나 퇴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쪽에서 저희 이야기를 들어 줄까요? 미친놈 취급받는 거 아닙니까?”
“그대로 이야기하면 미친놈 취급 받겠지.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 모아놓고 이러는 거 아니냐? 누구 좋은 생각 없어?”
윤 팀장의 말에 직원들은 한참동안 고심하기 시작했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붉게 달아오른 윤 팀장이 시계를 쳐다보며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려는데 박 책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팀장님, 이번에 동연건설에서 잠실에 하이엔드급 아파트 들어가지 않습니까?”
박 책임의 말에 윤 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 그럼 그걸 같다 붙이자는 거지?”
“저희가 동연건설 지분을 상당하게 가지고 있으니 넌지시 말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내미안’급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딜이 될 것 같은데…”
“하, 시팔… 쪽 팔리게…”
아무리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투자기관이 주식 좀 가지고 있다고 마치 물건 맡겨놓은 것처럼 당연한 듯이 요구하면 안 된다. 박 책임도 그것을 알기에 넌지시 이야기 해보라는 건데, 이게 먹히려면 그냥은 안 된다.
광고 모델을 결정하는 실세와 만나서 룸싸롱 몇 번 가주며 약을 쳐야 한다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자신들의 모양새가 파인 엔터에 뭐라도 받은 사람들처럼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삼전투신 실무진들이 어디 가서 접대를 받아만 봤지 접대 해줄 일이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이게 쪽팔린다는 거다.
“제가 그 쪽 담당자랑 안면이 있으니까 말은 잘 통할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가장 깔끔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박 책임의 뒷말은 아마도 우현의 점을 신뢰할 수 있겠냐는 뜻일 거다.
“나도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할 때가 언제야?”
“잘 나가고 있을 때죠.”
“그래, 마치 신 내린 것처럼 생각하던 것들이 따다닥 맞아갈 때, 그 때가 가장 위험하지. 그런데 왠지 이번에도 맞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럼 베팅 한번 해 보죠. 어차피 술값 좀 날아가고 쪽 좀 팔리면 되는 거잖습니까? 그 쪽 제가 팔고 오죠.”
윤 팀장은 박 책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래서 그가 박 책임을 좋아하는 거다. 나서야 할 때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 팀장이 다시 우현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을 때는 지루함을 못 견딘 우현이 핸드폰으로 포털 기사 검색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결정 내리신 겁니까?”
“이렇게 하죠. 동연건설 아시죠? 거기 아파트 브랜드는 어떻습니까?”
브랜드 가치로만 보면 당연히 삼전물산의 아파트가 더 윗급이지만 동연건설의 아파트도 싸구려 브랜드는 결코 아니다.
“확실한 건가요?”
“노력해보겠습니다.”
여기서 그럼 결정되면 연락 달라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상일이란 게 언제 어떻게 변할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일단 시나리오 주세요. 보고 말씀 드리죠.”
윤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던 거다.
진지한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간 우현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투자하셔야 합니까?”
“최소 20억 이상은 해야 합니다.”
“투자를 안 할 수는 없는 거군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시잖아요? 때로는 내 돈 쓰면서도 눈치 봐야 할 때가 있다는 거. 지금이 그렇습니다.”
윤 팀장은 우현이 부정적인 느낌을 팍팍 풍기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건지, 낙담하는 건지 파악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흐음… 일단 제 생각을 말씀 드리죠. 시나리오는 전형적이네요. 영웅이 있고, 위대한 희생도 있네요. 전형적인 한국식 결말인 눈물 짜내기도 있고… 무난합니다.”
“무난하다…?”
“감독은 도정원이 맡았네요. 한국 정서를 잘 아는 감독이죠. 경력이 오래되고 천만 영화도 찍었지만 솔직히 운이 좋았죠. 경쟁작들도 별로 없었고…”
“천만 영화는 경쟁작이 별로라고해서 쉽게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요. 배우들의 사투리 연기도 좋았고 몇몇 괜찮은 신인도 나왔죠.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그 때에 한창 먹히는 소재를 썼다는 것. 하지만 그게 다였어요. 지금은 오백만도 힘들 영화니까.”
“그럼 이것 역시 오백만도 힘들까요?”
“복채를 준비하라고 했지만 저는 점쟁이는 아닙니다. 정확한 스코어는 알 수 없죠. 그런데 제작비가 2백억이라면서요? 마케팅 비용까지 합산한 비용인가요?”
윤 팀장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충 잡아도 250억인데, 손익분기점만 대략 8백만 나오네요.”
“무난한 영화니까 망하지는 않겠지만 8백만 까지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인가요?”
“영화는 감독의 예술입니다. 말했다시피 도정원 감독은 한국 정서를 잘 알고 영화에 녹여낼 수 있는 감독이에요. 적당한 액션, 적당한 멜로, 그리고 적당한 감동까지. 그런데 날카로운 맛이 없어요.”
“날카로운 맛이 없다…”
“제작비가 적으면 괜찮은 감독이에요. 흥행에 대한 감도 있으니까. 하지만 제작비가 많아지면 적당한 걸로는 부족합니다. 관객의 머리, 또는 가슴에 박히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나리오랑 감독은 그게 없네요.”
“그래서 총평은?”
“굳이 총평하자면 ‘감독이 욕심을 부렸다’ 정도겠네요. 아니, 욕심을 부린 게 감독이 아닐 수도 있지만 굳이 따지고 들지는 않겠습니다.”
윤 팀장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복채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지금 제가 한 이야기가 어디로 새나가는 건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이게 새나가면 대표님께서 얼마나 곤란해지실지 알고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쇼.”
서로간의 거래를 통해 이야기한 거지만 입맛이 씁쓸하다. 어쨌거나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 격이며, 막 개업하는 음식점에 바퀴벌레가 있다고 소문낸 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는 삼전투신에서 투자를 적게 한다고 해도 이 영화가 엎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거다.
총제작비가 250억이 넘는 영화가 실패하면 그냥 하나 실패한 걸로 끝나지 않는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엄청난 손실을 봤기에 다른 영화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투자자들은 더 흥행이 확실시 되는 영화만 찾아다닌다.
영화판 자체가 위축되는 결과가 생긴다는 건데 그렇기에 엎어지지 않을 거면 최소한 손익분기점은 넘겨주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설사 못 넘기더라도 최대한 가깝게 올라가 주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다.
삼전투신을 나와서 ‘타이거 스튜디오’의 최윤석 대표에게 전화하니 뛸 듯이 좋아한다. 무려 백억에 해당하는 제작비를 거의 다 쏟아 부었다고 하니 괜스레 미안했을 텐데 이렇게 손쉽게 투자금을 받아오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날 은하, 별 무리와 마음 편히 회식을 즐기고 나서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 때, 삼전투신 측에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항상 일복에 쌓여 있죠.”
“그래도 소속 연예인들이 항상 잘 나가니까 걱정 없겠습니다.”
“항상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죠. 어떻게… 복채는 준비하셨습니까?”
“네, 정성을 다해서 잘 준비했습니다. 곧 연락이 갈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가 대표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들어섰다가 우현이 통화중인 걸 알고는 머뭇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