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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붙이면 젖혀라(4)
“강진벽한테서 연락이 왔어.”
“누구? 강진벽이라고?”
파인 엔터의 전 사장이었던 그가 왜 갑자기 은하에게 연락을 했을까?
“응, 아침에 촬영하는데 전화가 온 거야. 모르는 번호로 와서 받았는데 그 인간이더라구. 하여간 그런 인간들은 하나같이 낯짝도 두꺼워, 그렇지?”
“뭐라고 하는데?”
“별 거 아니었어. 밤새도록 술을 쳐드셨는지 횡설수설 하는데 대략 내용이 ‘조심해라’, ‘그러다 한방에 훅 간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였어.”
“미친놈… 연락처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지?”
보통 연예인들은 전화번호를 1년 이상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극성 팬층이 많은 아이돌이나 나이 어린 여배우들은 번호를 자주 바꿀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못 나가도 현재 기획사 사장 타이틀 가지고 있잖아.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겠지.”
“무슨 일 있나? 꺼름칙하네.”
“일은 무슨… 딱 보면 몰라? 어제 오빠 방송 나가고 나니까 배가 아팠던 거지. 그래서 밤새 술 마시다가 나한테 연락해서 꼬장 한 번 부려 본 거야. 얼마나 속이 뒤틀렸겠어?”
“그렇긴 하겠다. 고시원 전전하는 놈 데려와서 매니저로 만들어 줬더니 자기는 어디 명함도 제대로 못 내미는 기획사 사장 하는데 나는 방송에 미다스의 손이니 뭐니 하면서 떠받들어 주니까.”
“자학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괜히 미안해지니까.”
“그런 거 아니야. 사실을 말한 거니까. 그리고 그 때는 너 만나기 전이었잖아.”
“나랑 헤어진 뒤에 고시원에서 살았다며. 고시원 이야기만 나와도 찔리니까 당분간 고시원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해.”
“하하, 알았다. 하여튼 그것 때문에 촬영도 안 하고 달려온 거야?”
“내가 촬영 스케줄 펑크 내겠어? 오전 촬영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오늘 오후 촬영은 3시부터 있고. 그래서 나 밥 사줘야 해. 점심 먹고 갈 거니까.”
“혜숙 씨는 어디에 있고?”
“언니는 밖에 있지.”
“그래, 나가자. 뭐 먹을래?”
“난 초밥 먹지 뭐. 여기 근처에 괜찮은 집 생겼던데? 조금 비싸긴 하지만.”
체중 관리를 해야 하는 여배우 입장에서 간이 세지 않고 기름기가 없으며 배가 부를만한 음식은 몇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초밥이 질렸음에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문을 열고 나가니 혜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나눴을지 궁금했을 테지만 표정으로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식사나 하러 갑시다.”
“네, 어제 방송 잘 봤습니다. 잘 나오셨던데요?”
“잘 나오기는요. 은하는 요새 촬영 열심히 하나요? 자꾸 이렇게 와도 되나 몰라? 별이도 영화 촬영하는데 얼굴 못 본지가 한참 됐구만. 얘는 하루가 멀다하고 오네.”
“흥!”
은하는 별 말 없이 우현을 쌩하니 지나쳐가고 혜숙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 지었다.
“오늘도 오전 촬영에서 NG 한번 없이 끝냈어요. 어려운 씬이라 사실 하루 내내 촬영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 없는데 감독님이 한 컷에 바로 오케이를 했거든요. 그리고 그보다 더 좋은 장면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다섯 번 정도 다시 찍었는데 첫 번째 것이 가장 좋아서 그대로 가기로 했죠.”
“전보다 실력이 늘었나?”
“하하, 아마 그럴 거예요. 확실히 은하는 타고났어요. 영화 한편, 드라마 한편을 찍을 때마다 실력이 느는 게 보이거든요. 지금은 어느 누구와 비교한다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잘 봐줘서 고맙네요.”
“제가 더 고맙죠. 대표님께서 좋은 작품을 물어다 주시니까요. 제가 따와야 하는 건데…”
그녀의 말도 맞다. 자신이 은하를 데리고 있었을 때는 거의 모든 작품을 자신이 직접 고르고 따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랬다고 지금 은하 작품을 그녀에게 맡기는 건 어려운 일.
그녀에게 일을 맡긴다면 열심히 하기야 하겠지만 결과가 좋을 작품을 들고 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까고 본인이 정한 작품을 들이미는 것도 웃기고 또 그렇게까지 할 시간 여유도 없다.
때문에 혜숙에게 있어서 은하처럼 대스타의 매니저를 한다는 건 본인 실력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경력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만.
“괜찮아요. 일 년에 몇 번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도 소속 배우들이 많아서 일 년에 몇 번이라도 대표님만 바쁘신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지금 홍보, 마케팅팀 바빠서 샌드위치로 점심 때우는 중입니다.”
“아… 파이브 걸즈도 있고 어제 대표님 방송도 나가서 정신없겠네요.”
“그 얘긴 머리 아프니까 밥이나 먹죠.”
식사를 하고 은하와 혜숙을 현장으로 보내버리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생각지도 못 한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바로 KBC 드라마국장인 양세종 국장이었다.
“김 대표! 엔터업계의 미다스의 손! 키야… 나 정말 놀랐다.”
“또 무슨 약을 치시려고 그래요?”
“약을 치다니?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고 그래?”
“알았어요. 왜 전화하셨어요? 설마 진짜 어제 방송 때문에 축하 전화 하려고 한 건 아니죠?”
“하하, 축하 당연히 해야지. 내가 우리 김 대표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안 그래?”
“자꾸 딴 소리 할 거예요?”
“너 요즘 잘 나간다고 너무 정 없어진 거 아니냐? 예전에는 그렇게 잘 봐달라고 매달리더니… 사람 그러면 안 된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양세종 국장의 말처럼 피디들과 작가들 붙잡으며 소속 연예인 홍보하고 그랬다. 그 때 생각을 하니 괜히 양 국장한테 너무 쏘아붙인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아휴, 미안해요.”
“흐흐, 그렇지? 어쨌든 나는 우리 김 대표 항상 응원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이제야 본론이 나올 모양이다.
“그리구요?”
“내가 며칠 전에 윤해연 작가랑 SBC랑 손잡았다는 기사를 봤잖아. 내가 그거 보고 또 잠이 안 오더라고.”
그놈의 불면증 타령은 정말…
“제발 잠 좀 주무세요. 그리고 내가 들어보니 KBC랑도 접촉 했었는데 제작비 못 맞춰주겠다고 했다면서요?”
지 피디가 말하길 회당 6억 제작비에 오케이 싸인이 들어온 방송국은 SBC와 TVM 둘 뿐이었다고 했다.
“김 대표, 나 김은선 작가 ‘사랑과 영혼’ 때문에 잠 못자고 있는 거 알지? 그거 회당 6억 결제하고 등에 담이 생겼다고. 그런데 윤해연 작가까지 6억 맞춰주면 다른 드라마 4, 5개 만들 제작비 투입하게 되는 건데 그게 가당키나 해?”
“거 국장님, 우리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그래, 좋다. 말해 봐.”
“그 돈으로 드라마 4, 5개 만들어서 시청률 얼마나 나왔어요? 광고는 얼마나 들어 왔구요? 지금 지상파가 케이블에 비해 죽 쓰고 있는 게 전부 누구 탓입니까?”
“나도 알지. 그런데 회사라는 게 일 년에 써야 하는 제작비라는 게 딱 정해져 있단 말이야. 물론 추가로 어느 정도는 쓸 수 있겠지만 한 번에 그렇게 많이 써버리면 아예 펑크가 나버린다고. 그러니 어쩌겠어? 내 돈도 아닌데, 나라고 그거 주기 싫겠어? 나도 윤해연 작가 좋아해.”
“그럼 쓸데없이 이상한 드라마는 만들지 말던가요. 전에 퓨전도 아니고 해괴망측한 사극 하나 만들어서 시청률 5%인가 나왔죠?”
“하… 나는 그거 정말 잘 될 줄 알았다.”
“아니, 신라시대에 개인 샤워 공간이 있고, 찻집도 스타벅스를 딱 베꼈더만. 그 시대에 그런 공간이 말이나 됩니까? 그런 걸 만들면서 회당 몇 억씩 투자하니까 돈이 부족하죠.”
“그럼 네가 와서 드라마국장 해라.”
“싫습니다. 돈도 안 되고 일만 많은 그 자리를 제가 왜 합니까? 저는 지금 돈 잘 벌고 있어요.”
“누굴 놀리냐?”
“그래서 국장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뭐예요?”
이미 떠난 버스인 윤해연 작가를 잡고자 우는 소리를 한 게 아니다. 바라는 게 있으니 먼저 슬쩍 운을 띄운 것에 불과하다.
“보니까 이번에 편성 한 달 밀린 ‘사랑과 영혼’이 끝날 때쯤에 윤 작가 작품이 시작될 것 같더라고.”
“에헤이… 국장님!”
“왜?”
“설마 그 때에 이주희 작가 작품 넣어달라는 거예요?”
“눈치 빠르다?”
“말도 안 되죠. 게다가 이미 ‘사랑과 영혼’ 다음 작품도 편성 잡혔잖아요? 의학물이라면서요? 남자주인공까지 캐스팅 된 상황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에 왜 우리 이 작가를 들이대요?”
“내가 오죽 급하면 그러겠냐?”
“안 될 말인 거 아시죠? 같은 회사 작가를 같은 시간에 붙이는 짓은 같은 건물에 편의점 두 개 들어서는 것과 같은 거예요. 같이 죽자는 거죠.”
이것 역시 그냥 해 본 말일 거다.
“좋아. 그럼 그 다음 편성은 어때?”
결국 이걸 위한 빌드업인데 거절하기가 마땅치 않다. 그 때쯤 되면 새 작품 하나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휴식 시간을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작품 구상을 못했다고 하면 그건 이주희 작가가 그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작가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확답은 못 드려요. 일단 이 작가랑 이야기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양세종 국장의 마음이 급할 거라는 건 이해가 간다. 일단 이주희 작가가 KBC랑 50회 계약을 맺었다고는 해도 아직 서로 금액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KBC랑 50회를 다 완료하기 전까지 다른 방송사와 작품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다.
방송사도 편성이라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먼저 회당 계약을 걸어놓고 편성에 맞춰서 16나 20회씩 까면서 계약을 이행한다.
아마도 양 국장의 생각은 미다스의 손이라며 우현을 띄워주는 다큐가 방영되니 먼저 이주희 작가와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편성을 잡아 보려는 것일 테다.
“나 좀 살려줘라. 월화는 어떻게든 굴러가는데 수목은 알지? 1년 내내 10% 넘겨본 적 없다는 거. 나 이러다 쓰러져.”
“죽는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어쨌든 이 작가한테 이야기해볼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이주희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도 시기는 만족한다며 빠른 시일 내에 새 작품 시놉을 만들어 오겠다고 했다.
“또 하나는 넘어 갔고…”
새 작품 구상이야 전부터 했겠지만 그래도 한 달 정도는 있어야 제대로 된 시놉을 가지고 올 거다. 충분한 고민과 연구가 있어야 하나의 작품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파이브 걸즈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음원차트 1위를 고수했고 무려 1주일 동안 톱을 유지한 이후 한 달 정도 30위 안쪽에 머물렀다.
생각보다 파이브 걸즈가 잘 되면서 미다스의 손이라며 방영한 다큐의 위력이 점차 커져만 갔고, 한 달 정도가 흘렀을 때는 3대 기획사에 파인 엔터를 넣어 4대 기획사로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들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물론 그들과는 매출액에서부터 비교가 안 되지만 그만큼 인지도는 쌓여간다는 말이기에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회사는 재무팀과 관리팀 등 새로운 인력을 확충했고 초가을 유니의 홍대 단콘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 했다. 그리고 별이의 ‘28시간’과 은하의 ‘지옥도시’까지 촬영을 마무리 했을 때 윤해연 작가의 ‘애기씨와 핸드폰’이 ‘미씽유’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촬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