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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다음 주자는?(5)
“하아…”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헛웃음을 짓던 소연은 이내 우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가네요. 그 요구조건도 어이가 없긴 한데, 좋아요. 해주죠.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내가 팁을 줘야 할 친구가 유지나 같은데, 맞아요?”
“네, 맞습니다.”
“지나도 아역 때부터 데뷔해서 지금까지 경력만 10년이 넘어요. 그런 애한테 내가 조언해준다고 하면 받아들일까요?”
“경력은 10년이 넘지만 아시다시피 지나가 연기 폭이 넓지 않아요. 그게 연기를 못해서든 아니면 다른 배역을 싫어해서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작가님들에게 유지나는 그런 친구예요. 눈물 잘 흘리고, 감정 연기 잘하면서도 때로는 섹시한 느낌을 주는 그런 연기자.”
“뭐, 지금까지 항상 그런 역할만 맡아 왔으니까. 그런 면에서 ‘붉은 여우’는 의외이긴 했어요. 흥행에 실패한 건 아니지만 더 잘 나갈 수도 있었는데 감독이 멍청한 소리를 해서 아쉽긴 하겠네요.”
“제 손을 떠나서 발생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유지나가 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으니 결과는 그녀가 받아들이는 수밖에. 물론 소연 씨는 우리 회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 참,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거죠?”
그녀가 어이없어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봤을 것인가? 하지만 우현에게 있어서 강소연이라는 존재는 거대한 일감의 등장일 뿐이다. 물론 회사는 더 커지겠지만 너무 급격한 회사의 성장은 불안감을 들게 하기에 지금껏 꺼려왔던 것이다.
“하하하!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도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회사로 들어오시게 되면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 해드릴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마시구요. 아, 계약금은 따로 없는 거 아시죠?”
그녀는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은하 걔도 계약금 없이 들어왔다면서요? 걔도 못 받았는데 나만 받으면 오히려 분란이 생길 테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하하, 그렇죠? 역시나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계약금 없이 일하는 게 요즘 추세잖아요?”
“그게 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 뭐, 받아 들여야죠.”
아무리 계약금 없이 회사를 옮기는 게 대세가 됐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아주 톱클래스급의 배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강소연 역시 그 중에 하나였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일단 지나 매니저한테 연락해볼게요. 잠시만요.”
바로 지나의 매니저인 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어디야? 지나랑 같이 있어?”
“네, 지금 지나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한 5분 있으면 도착해요.”
“그래? 너 차 돌려서 내가 문자 찍어주는 데로 가.”
“네? 지금요?”
“지금이니까 차 돌리라고 하지. 가면 내일 캐스팅 미팅할 때 도움주실 분 모셔놨거든?”
“진짜요? 누구신데요?”
“강소연.”
“네? 누구요?”
“강소연, 인마. 배우 강소연 씨라고.”
“강소연 씨가 왜 도움을 줍니까?”
“이제 한 식구가 될 거야. 내가 내일 캐스팀 미팅할 때 도움 좀 달라고 했어. 싫으면 거절해도 돼. 지나한테 문자로 괜찮다고 나한테 보내라고 해. 그럼 취소해줄 테니까.”
“아…”
진명은 난감함에 섣불리 대답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3, 4년 이상 함께한 매니저 정도 되면 배우가 좋다 싫다 하기 전에 미리 그녀의 성향을 파악해 곤란한 제의에 대한 거절이나 수락을 해야 한다.
대개 배우들은 성격이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그렇기에 연기를 잘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눈치 없이 하나 하나 다 물어보면 배우들은 피곤해하고 짜증을 내기 마련이다.
만약 우현이 은하를 데리고 있었을 때 저런 제의가 왔다면 미련 없이 제의를 거부했을 거다. 그 때는 은하가 지금처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한창 자존심이 하늘까지 뻗쳐 있을 때였다. 물론 지금도 자존심 하면 유은하지만.
“지나한테 전해. 내가 나름 고심해서 결정한 거니까. 네 선에서 깔만큼 쉽게 물어본 거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빨리 결정하라고 해, 10분 안에. 끊는다.”
전화를 끊고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니 소연이 팔짱을 끼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다그치는 거 아니에요? 걔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덜컥 승낙하기에는 좀…”
“이것도 하나의 배움이죠. 제가 소속 배우들에게 누누이 말하는 게 있습니다. 배우의 자존심은 본인이 세우는 게 아니라 팬이 세워주는 거라구요.”
“하핫! 그거 그럴듯하네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요. 나도 그렇죠. 그리고 때로는 그 자존심이 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거든요.”
“그것도 맞는 말이겠네요.”
지이잉…
곧바로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당연히 발신자는 지나였고 내용은 곧바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흐음…”
“왜요? 싫데요?”
“아뇨, 하겠다네요.”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요? 꼭 실망한 사람처럼?”
“실망했다기 보다는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
“방금 전에는 자존심은 팬이 세워주는 거라면서요?”
“하하, 그거야 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소연 씨가 말했듯이 당사자에겐 많이 속상한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솔직히 별이나 유니, 은하 같은 경우는 지금껏 큰 차질 없이 성장해왔는데 지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네요. 물론 ‘붉은 여우’ 전작도 괜찮기는 했지만 아주 대박도 아니었고…”
“그게 정상인 거죠. 지금 내 앞에서 그러는 거… 저 놀리는 거죠?”
“아, 미안해요. 하하하, 미안합니다. 이거 참…”
아무리 지나가 흥행이 별로라고는 해도 강소연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할 정도는 아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랄까?
“그럼 전 이만 일어날게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 원… 팔자에도 없는 코칭까지 하게 생겼네…”
그녀는 투덜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과연 내일 지나가 어떤 모습을 보이고 나올지 기대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하지만 혼자서 고민하고 나오는 것보다는 잘 할 거라고 믿었다.
다음날, 사무실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오늘이 바로 파이브 걸즈의 쇼케이스 행사 당일이기 때문이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퍼펙트해요.”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온 경수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잠은 좀 잤냐?”
“애들도 못 잤을 텐데, 저라고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 많이들 긴장했어?”
“네, 다들 긴장되고 설레서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구요. 뭐, 양지현이 혼자서 푹 자고 왔는지 쌩쌩하긴 하지만.”
“걔는 원체 긴장을 잘 안하더라. 강단이 있어.”
“유니랑 같은 과 같아요. 큰 무대나 사람들 앞에서 긴장 안 하는 거.”
“그런 건 타고나는 거야. 센터 맡은 한미소가 안 떨고 잘해야 할 텐데?”
“잘 할 겁니다. 연습은 정말 철저히 해서 자다가 일어나서 춰도 완벽하게 출 거예요.”
“고생했다.”
“애들이 고생했죠.”
“기자들한테 적당히 기름칠 좀 해놨지?”
“헤헤, 그럼요. 돈 나간 만큼 잘 써줄 겁니다.”
“아, 그리고 ‘주말아이돌’ 녹화가 바로 내일이지? 개인기 준비들은 좀 했대?”
“그것도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뭐, 아주 숙련되지는 않지만 그것 나름대로 봐줄만 하잖아요? 약간 미숙한 모습도 좋은 거니까.”
“그래,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하지. 특히 신인들한테는 말이야. 그래도 실력이 좋으면 더 주목 받으니까 힘들고 민망하더라도 준비 철저히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럼 고생하고… 나 쇼케이스 중간쯤에 도착할 것 같아. 네가 현장 진두지휘해야 하는 거 알지?”
“네. 부담이 많이 되긴 하는데,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원래 배우 로드 할 때도 현장에서 배우 대신해서 분위기도 잡고 하는 거야. 원래 우리 회사가 컸으면 임원급 하나가 가서 확인해야 하지만 그렇지가 못하잖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스스로 크는 게 머리에 잘 남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오늘 하루는 너도, 네 새끼들도 정신없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그럼 나가 봐.”
“네, 그럼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언제까지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실수가 생긴다면 그것 또한 경험이 될 것이니 스스로 배워가면서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무실을 나섰다. 윤해연 작가와의 캐스팅 미팅이 있기 때문이다.
미팅 장소는 윤 작가가 있는 오피스텔 지하의 한정식 집. 꽤나 비싼 오피스텔이기에 그 한식집 역시 꽤나 유명하고 비싼 집이다.
“김 대표 왔어?”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그녀가 편안한 옷차림을 한 채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김 대표가 빨리 올 것 같아서 나도 미리 와있었지. 그리고 여기 위가 내 집이나 마찬가진데 늦으면 욕할 거 아냐?”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냐, 늙으면 의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내가 요즘 김 대표한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하하하! 제가 작가님한테 잘 보여야죠. 그런데 그건 뭡니까?”
식탁 위에는 물이 담긴 잔 말고도 종이 뭉치가 있었다.
“1회 대본.”
“대본이요? 벌써 나왔어요?”
“으응~ 벌써 나왔다기 보다는 조금씩 써봤던 거야. 사실 시놉을 썼을 때 이것도 조금 써놨었어. 그래서 수정해야 할 부분도 있고. 완성된 대본은 아닌 거지.”
그제야 이걸 왜 가지고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대강 분위기를 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이 대본으로 지나를 평가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번 읽어봐도 되죠?”
“그래, 시간 여유 있으니까 한번 봐봐.”
대본을 펼쳐보니 확실히 두께가 얇다. 아마 이 정도 분량이면 정리해서 피디에게 넘긴다고 해도 30분 정도밖에 안 나올 거다.
대략 15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에 대본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재밌는데요? 이 정도면 배우빨 없이도 충분히 먹히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윤해연 작가 작품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발랄하고 유쾌한 분위기와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릴 만큼 재미있는 상황은 순식간에 자신을 몰입하게 만들었다.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나도 이주희 만큼이나 재미있게 쓸 수 있다고 했잖아. 내가 지금까지 안 쓰려고 해서 그렇지, 나도 잘 할 수 있어. 왜 이래?”
턱을 치켜들며 가슴을 쫙 펴는 걸 보니 자신의 칭찬에 기분이 업 됐나보다.
“와… 저는 작가님이 이 정도까지 잘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똑똑…
윤 작가를 한창 칭찬하려는데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들어갈게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는 약속시간에 딱 맞춰 온 유지나였다. 그런데 그녀는 뭔가 독특한 분위기로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머, 오늘 유지나 씨랑 만나는 자리였구나?”
윤 작가의 눈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