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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다음 주자는?(4)
“꼭 우리 지나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윤 작가님도 속으로는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자신의 배우를 깎아내리는 분위기에 진명이 발끈했다. 이해한다. 자신이라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지는 못했을 거다.
“그랬으면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았겠지. 누군지도 모른 채 캐스팅 미팅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이게 진짜 철없는 애들 소개팅 정도로 보여?”
“그렇지만 아까는…”
“속아준 거라니까. 마음에 안 들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번 넘어가준 거라고.”
앞에 여배우를 앉혀두고 이런 잔인한 말을 하는 게 속이 쓰렸지만 일부러 더 강하게 말했다.
“왜 우리 지나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습니까?”
“지나가 싫어서가 아니야. 윤 작가 입장에서 이 작품의 캐릭터를 지나에게 대입하니까 그림이 안 나오는 걸 어떡하겠어? 그리고 그건 연기자에게 있어 당연한 시련이야. 작가는 작품을 쓸 때 누군가를 대입하면서 상황을 그리는데 그게 상상한 사람과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는 걸 원치 않아. 그건 알지?”
“네…”
“지나가 우리 식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당연히 윤 작가의 머릿속 상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 들이밀었을 거야. 하지만 일단 우리 식구가 먼저잖아? 그럼 윤 작가의 이미지에 우리 지나를 맞춰 봐야지. 물론 그럴만한 실력이 돼야겠지만. 그리고 난 지나가 충분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마지막 말은 정말 믿고 있다기 보다는 그녀에게 응원의 말을 해준 것이다.
“열심히 준비할게요.”
그녀는 다른 말없이 그렇게 짧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준비 잘 하고, 내일 보자.”
“네.”
굳이 어떻게 준비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연기를 보여줄지는 그녀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니까.
“너도, 세상 다 산 것 같은 그 얼굴 좀 펴라. 지나도 별 말 안 하는데 매니저인 네가 그러면 되겠어?”
진명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지나 잘 할 겁니다.”
“지나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얼른 가.”
그들을 쫓아 보내고 나니 조금 걱정이 됐다. 과연 어떻게 윤해연 작가를 설득할 것인가. 예술이라는 게 정답이 없기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서 최선의 결과를 찾아야 하겠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소파에 누워 쉬다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대표님, 대표님!”
강한 어조로 깨우는 이는 바로 비서인 민주였다.
“응? 으응. 내가 졸았나?”
“네, 지금 손님 오셨어요.”
“그래요? 오늘은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런데 누구예요?”
“강소연 씨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누구요?”
“배우 강소연 씨요.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강소연이 여길 왜 와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으음… 들어오라고 하고, 홍보팀에 전화해서 강소연 계약 관계랑 회사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닌지 알아보라고 하세요.”
대기업 전략실도 아니고 그들이라고 무슨 대단한 정보망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지금껏 그 자리에 있으며 많은 걸 보고 들어왔을 것이기에 뭔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알겠습니다.”
민주가 나가고 나서 곧바로 강소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그래도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이른바 학부모 컨셉이라는 건가?
“안녕하세요. 김 대표님 회사에 온 건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그런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강소연 씨가 우리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 물론 석호 때문에 연락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일단 앉으시죠.”
그녀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소파에 앉고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소박하네요. 인테리어에는 신경을 안 쓰시나 봐요? 흔한 화분 하나 없네?”
“물 주는 게 귀찮아서 아예 놓지 말라고 했죠.”
“그래도 보통 소속 배우들 사진 정도는 걸어놓을 만한데요?”
“어차피 사무실 복도에 수십 장 걸려 있잖아요? 굳이 내 방에까지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정신만 사납고, 하하.”
“그러시구나. 어쨌든 우리 석호, 생각보다 훨씬 빨리 데뷔하게 될 것 같던데… 고마워요.”
비록 단역에 가까운 조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사가 없는 것도 아니라서 본인이 보여주기에 따라 이후 발전해갈 여지는 충분했다. 특히 석호가 맡은 배역 자체가 상당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이기에 기대할 만하다.
“고맙기는요. 아시다시피 그게 제가 일부러 꽂아 준 것도 아니고,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어떤 걸 노력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고 이끌어주셨잖아요? 세상에는 자신이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죠. 우리 석호가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는 걸 이제라도 알게 된 건 전부 대표님 덕분이니까요. 그 부분은 충분히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어요.”
어째 ‘내가 널 칭찬해주겠다’하는 말투지만 강소연이 말해서 그런지 전혀 거부감이나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게 톱 여배우의 카리스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그 감사는 잘 받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강소연의 작은 입술이 움직였다.
“대표님도 짐작하시겠지만 오늘 찾아온 건 단순히 석호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무슨 일로…?”
“둥지를 옮기고 싶어요.”
“흐음…”
예상했지만 은하와의 일도 있기에 당연히 끝난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 때 은하랑 이야기가 됐다고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푸훗! 설마 그걸 진담이라고 들은 건가요? 은하도 농담으로 알고 있을 그 이야기를?”
어째 자신만 바보가 된 느낌이다.
“아니었던 겁니까?”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어요. 은하가 나한테 그 말을 한 건 대표님한테 침 발랐으니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죠.”
“아…”
“은하도 나도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잖아요? 회사를 옮기는 일에 그런 중딩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나눴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이거 완전히 농락당한 것 같은데요? 하하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뭐, 은하 걔랑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만큼 김 대표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죠. 능력도 있고…”
“아무리 제가 천지창조 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약서라는 게 존재하는 이상 함부로 회사를 옮기기 힘들 텐데요?”
“괜찮아요. 계약은 문제없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인지…”
“마이더스에서는 제 계약을 문제 삼지 않을 거라구요.”
이쯤 되니 그녀와 마이더스 사장인 백창준과의 관계가 더욱 궁금해졌다. 전에는 더 이상 파고들기 뭐해서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혹시 백창준, 그 사람 동영상이라도 갖고 있는 겁니까?”
“아하하하! 김 대표님 진짜 웃기는 분이시네. 아, 나쁜 뜻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다구요. 아하하.”
“그게 아니에요?”
백창준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계약서를 무시하고 옮길 수 있단 말인가?
“동영상은 아니에요.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역시나 동영상이 아니라는 말은 다른 무엇을 약점으로 잡고 있다는 뜻.
“그럼 다른 약점을 잡고 있다는 말이네요?”
“네, 그런 셈이죠.”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니 답답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단번에 까발릴 것 같지 않다. 재촉한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일단 그게 무엇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계약서는 상관없이 회사를 옮기고 싶다는 말이신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금 여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당장 손에 쥔 괜찮은 작품도 없고…”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움직일 건 아니니까.”
“네? 그럼 언제…?”
“저도 몰라요. 하지만 때가 되면 말씀 드릴게요. 멀지는 않아요. 그리고 어차피 작품은 빨리 들어갈 생각 없어요. 얼마 전에 드라마를 끝내기도 했으니 이번에는 조금 쉬려고 마음먹었어요.”
“아, 이런… 축하한다는 말씀도 못 드렸네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시청률도 좋았고 평도 좋아서 이번에 제 3의 전성기라는 말도 나오던데요?”
그 전의 전성기들은 전부 작품 흥행이 잘 돼서라기보다는 그녀의 연기력과 아름다움이 빛났을 때였다. 그렇기에 이번 흥행성공은 그녀에게 있어 뜻 깊은 일일 터였다.
“고마워요. 김 대표님 아니었으면 이 작품이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아마 흔한 드라마 시놉이라면서 거부했겠죠. 뭐, 여러 번 겪었던 일이니까.”
전이었다면 씁쓸한 표정이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결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그녀 정도의 톱스타가 흥행운이 없어 이토록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줄 누가 알겠는가?
“저도 모니터링 다 했습니다. 소연 씨의 연기가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그 연기를 살릴 수 없었겠죠.”
“과찬이에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이 정도 연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다. 역시 대한민국 여배우 중 연기력만으로 한 손에 꼽힐 만하다. 그 때,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지나가는 게 있었다.
“저기… 그럼 이렇게 합시다.”
“네? 뭘요?”
“한 가지 부탁 좀 들어줘요. 그러면 소연 씨가 우리 회사로 들어오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우현의 말을 듣자마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 정말 김 대표한테는 내가 무슨 지나가는 똥개만도 못한 사람처럼 보이나 봐요?”
“그럴 리가요?”
“안 그런데 그런 말을 해요? 부탁을 들어주면 나를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나 지금까지 계약금 5억 이하로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나 참…”
“하하하! 지금 우리 회사 사정이 좀 그래요. 워낙 많은 일들을 벌려 놓으니 소연 씨가 들어오면 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겁니다.”
“웃기네요. 기분이 나쁘면서도 안심이 돼요. 최소한, 들어오면 동네 개 보듯 두고만 보진 않는다는 뜻이니까.”
“세상에, 강소연 씨를 동네 개 보듯 보고만 있었나요? 마이더스에서?”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식구가 되면… 좋아요, 일단 그 부탁이나 한번 들어보죠. 이상한 거면 뺨을 후려칠 거예요?”
“무슨 생각 하시는 거예요? 저 이상한 놈 아닙니다, 크흠… 부탁은 별 게 아니에요. 누구 한 명 연기와 관련돼서 팁 좀 부탁드려요.”
그녀는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무슨 은퇴를 앞둔 노년 배우도 아니고 누굴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연기 학원 강사가 돼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팁 정도? 내일까지 캐스팅 미팅이 있는데 작가가 확 꽂히게끔 도와달라는 거죠.”
딱 그녀의 전작이 막장물에 코믹을 더한 작품이었다. 거기에서 강소연은 처음으로 망가지는 연기는 물론이고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까지 선보였었다.
“아… 어이가 없어서 정말…”
강소연 만큼이나 유지나 역시 경력이 상당하다. 하지만 강소연이 지나보다 데뷔도 빠르고 나이도 많은데다가 연기 폭도 더 넓다. 연기 지도도 아니고 미팅에 대비해서 팁 정도만 부탁하는 건데 만약 지나가 자존심 문제로 거부한다면 미련 없이 포기할 생각이다. 과연 지나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도와주실 거죠? 내일 점심 미팅이라 지금 고민하고 계실 시간이 없는데…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