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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다음 주자는?(3)
“네? 제가 코믹 연기를 해야 한다구요?”
목소리에 담긴 당황스러움은 전화기 너머로 충분히 느껴졌다.
“으음… 아예 희극인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알지?”
“아… 일단 알았어요. 갈게요.”
그래도 무조건 안 된다고는 하지 않는걸 보니 ‘붉은 여우’로부터 받았던 실망이 크긴 컸나 보다.
지나와 전화를 끝내고 바로 ‘도마뱀 미디어’의 지여울 제작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 피디님 요즘 바쁘죠?”
이번에 영화 ‘지옥도시’까지 들어가면서 그녀의 회사는 일복이 터졌을 거다.
“저 어제 세 시간밖에 못 잤잖아요. 누가 저한데 딱 한 시간만 줬으면 좋겠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할 수 없네요.”
“뭔데 그러세요? 혹시… 윤해연 작가님 차기작 이야기예요?”
하여튼 이 바닥에서 짬 좀 된다는 친구들은 눈치가 귀신들이다.
“하하, 맞아요. 눈치도 빠르시네. 그런데 지금 도마뱀 쪽에 일이 너무 많잖아요? 드라마 하나 추가로 들어갈 여력이 없으시죠?”
“아뇨 아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저희 충분합니다. 어디시죠? 지금 사무실이시죠? 제가 갈게요.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도 세 시간밖에 못 주무시는데… 이것까지 하시면 과로로 큰일 나요.”
“잘 안 들리네요. 일단 출발할게요.”
그녀는 행여 우현이 다른 말을 할까봐 그런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마 다시 전화를 걸면 받지 않을 거다.
“대표님! 대표님!”
통화한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지여울 제작 피디가 들이닥쳤다.
“누가 쫓아와요?”
“쫓아오는 게 아니라 도망갈까 봐 빨리 왔죠. 하하, 어디 있어요?”
먹이를 쫓는 늑대의 눈길로 사무실을 훑던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시놉을 번개처럼 낚아챘다.
“이게 그거예요?”
“네, 맞습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단숨에 시놉을 읽어 내려간 그녀는 탁자를 손으로 탁! 하고 쳤다.
“해요! 합시다! 그런데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거 봐요. 힘들어서 못 한다니까.”
“그게 아니라, 저도 몸이 두 개는 아니라서 저 말고 다른 제작 피디랑 해주세요. 네?”
“다른 제작 피디요? 도마뱀에 제작 피디는 지 피디님 혼자 하고 있잖아요?”
“제가 하도 우는 소리를 해서 한명 더 뽑았어요. 그 밖에 필요한 스태프들은 저희가 계속 충원하고 있으니까 드라마 하나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요.”
“흐음… 정말 괜찮겠어요? 난 우리 윤 작가님 작품이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방향 잃고 헤매는 거 싫은데…”
“걱정 마세요. 안 되는 거 억지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다니까요.”
“알겠어요. 일단 윤 작가님이 나이도 있으신데 얼마 전에 종영했기 때문에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알죠?”
“그럼요. 저도 윤 작가님 차기작이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는걸요?”
“그래서 이번에도 사전제작으로 하고 싶어요.”
“어머, 이번에도요? 음… 다른 분도 아니고 윤해연 작가님이니까 안 될 것도 없긴 한데…”
“그렇죠?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사전제작으로 합시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번에도 타임슬립물이잖아요? 전에도 비슷한 거 했다고 세트장 같은 거 쓰지 말고 제대로 투자 받아서 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 방송국들이 윤해연 작가님이라고 하면 서로 투자하겠다고 달려들 거니까요.”
“솔직히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 싶은데, 김은선 작가가 회당 제작비로 6억 받았다면서요? 못해도 5억 이상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그거야 저희가 바라마지않는 일이긴 하지만… 작가님 자존심 때문에 그러세요?”
“네. 당연히 이번에 김은선 작가가 받는 원고료만큼 받고 싶어요.”
“아… 그건 제가 장담하기 힘든데요.”
“그럼 다른 데랑 계약할 겁니다. 저는 윤해연 작가가 완전히 김은선 작가만큼이나 시청률과 화제성을 끌어올려줄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기 때문에 원고료 역시 그만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마뱀이 어렵다고 하면 저는 다른 곳과 계약할 수밖에 없어요.”
이 정도로 강하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회당 원고료는 김은선 작가 수준으로 맞춰볼게요, 꼭.”
“좋습니다. 그럼 저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아, 그리고 여배우는 일단 제가 작가님이랑 상의할 테니까 그 부분은 시간을 주세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는지 그녀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럼요. 저는 김 대표님께서 미는 배우에 한 표 행사할게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지여울 피디가 가고 나서 1시간 쯤 지났을까? 지나와 그녀의 매니저인 진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잔뜩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과는 다르게 뒤따라 들어온 진명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앉아.”
“대표님, 진짜 우리 지나 코믹 연기 시키실 겁니까?”
진명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조금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사무실에 오는 내내 그것 때문에 화가 났었나보다.
“코믹 연기는 저질 연기인 거야?”
“네? 그게 아니라…”
정색한 채 되물으니 그가 답을 못하고 버벅거렸다.
“톱스타는 코믹 연기하면 안 되는 거야? 코믹 연기는 수준 떨어지는 애들이나 하는 거냐고?”
“죄송합니다.”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지만 이건 비단 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기에 다시 이어갔다.
“코믹 연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지나더러 왜 이리로 오라고 했는 줄 알아?”
“…”
당연히 둘은 아무 말도 못한다.
“이거 윤해연 작가님 작품이야.”
“네? 진짜요?”
그제야 진명의 고개가 확 들리며 입을 벌린다. 지나 역시 윤해연 작가 작품이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탁자 위에 있는 시놉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근데 이번에는 내가 지나를 꽂아야 한다고 말을 못했어. 왜 그랬을까? 지나가 급이 떨어져서 말을 못했을 것 같아?”
“아니요.”
“지나야, 네가 한번 대답해봐. 내가 왜 윤 작가님한테 너를 강하게 푸시하지 못했을까? 별이나 은하가 이미 다른 작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 보자마자 네 생각밖에 안 났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제가 한 번도 이런 연기를 해보지 않아서…”
“비슷해. 정확히는 네가 이런 연기를 안 좋아하기 때문이야.”
지금껏 유지나에게 들어온 작품이 몇 개나 될까? 아마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만큼 수백편의 작품이 들어왔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필모그라피를 보면 그녀의 연기 성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네…”
“솔직히 이게 윤해연 작가님 게 아니라면 이거 보고서도 망설이겠지? 아니다. 윤 작가님 작품인 거 알고도 거절할 수도 있겠다, 그치?”
“아니에요.”
그녀는 수긍하지 않았지만 믿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흔히 눈물 연기 같은, 감정이 잔뜩 들어간 연기를 잘하면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연기가 남을 웃기는 연기거든. 그거 쉽게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강하게 푸시하지 못했어. 난 아직 너의 연기 끝을 못 봤거든.”
솔직히 액션 연기는 체력과 유연성, 반사신경 등, 연기력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붉은 여우’에 적극 추천했지만 이건 다르다.
“…”
“일단 봐. 보고 마음에 들면 다시 이야기 하고,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괜히 할 수 없는 거 하겠다고 달려들지는 마. 우리 쿨하게 가자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에 살짝 서운해 하는 것 같지만 일부러 그렇게 했다. 윤 작가가 다른 회사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같은 식구이기에 그녀의 작품에 해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지나와 진명이 시놉을 다 읽은 것은 대략 20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 때까지 인터넷을 보며 기사를 훑었다.
“다 봤어요.”
“어때? 재밌을 것 같아?”
눈치를 보아하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 재미있어요. 역시 윤해연 작가님이네요. 아니, 윤해연 작가님 분위기랑 조금 다르긴 한데, 그래도 재밌어요.”
“진명이 네 생각은 어때?”
“재밌네요.”
아까는 괜히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반성의 눈빛을 가득 담고 말하는 게 웃기다.
“할 수 있겠어?”
“…”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것 같다. 하긴, 이 작품을 하고 싶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작품이 하고 싶을까? 대본도 안 나온 상태이긴 하지만 윤해연 작가의 내공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해야만 하는 작품이다.
“우리 지나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지나 대신에 진명이 나섰다.
“그래? 지나 네 생각은 어때? 잘 할 수 있겠어?”
그제야 지나는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해볼게요. 아니, 할 수 있어요.”
“흐음… 좋아.”
별다른 말없이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상대는 윤해연 작가였다.
“김 대표? 우리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화야?”
“하하하! 작가님이 일거리 하나 던져주고 가셨는데 미적거리면 되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죠. 그리고 요새 이 바닥에 워낙 다양한 소재들이 넘쳐나니 언제 비슷한 소재로 드라마 하나가 튀어나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작사랑 이야기 좀 한 거야?”
“네, 일단 도마뱀이랑 이야기 끝냈어요. 사전제작으로 못 박았고, 또 우리 윤 작가님 원고료 이번에는 업계 최고 수준으로 맞춰 달라고 했습니다. 잘했죠?”
“아하하! 역시 우리 김 대표가 최고야. 어쩌면 그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해?”
“하하, 그 마음 변치 마세요. 그리고 내일 점심 때 약속 있으세요?”
“점심? 없지. 나야 우리 김 대표 만날 때만을 하염없이 기다리잖아. 그런데 왜? 설마 캐스팅 미팅?”
“역시 척하면 척이시네. 맞아요. 내일 점심 먹으면서 앞으로 다가올 밝은 미래를 그려 보자구요.”
“뭐야, 만나기도 전에 썰부터 푸니까 더 불안한데?”
“제가 언제 작가님 작품에 초치는 일한 적 있습니까?”
“그래 그래, 점심 때 보자구. 그런데 누군지 이야기 안 해줄 거야?”
“알고 만나면 재미없잖아요? 원래 소개팅이 그래서 재밌는 거 아닙니까? 누가 나올지 모르는 거?”
“요즘 애들은 전부 사진으로 얼굴 보고 취미까지 공유하면서 만난다던데?”
“그래서 낭만이 없잖아요? 하하하!”
“하여튼 말은… 그래, 내일 보자구.”
전화를 끊고 지나를 돌아보니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약속 잡았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어.”
“괜히 말 안 한 거 아니에요? 실망하시면 어떡해요?”
“대한민국에서 유지나를 보고 실망할 사람이 있으려고? 뭐… 윤 작가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아직 네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을 테니까.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한번 정도는 넘어가 주잖아?”
“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작가님도 알고 있을 거야. 네가 나올 거라는 거. 그냥 한번쯤은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거라고. 아마 전화를 받기 전부터 속아 넘어가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을 걸? 그러니까 너한테 한 번의 기회를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