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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다음 주자는?(2)
“제목까지 다셨네?”
시놉에 제목을 다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대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경우일 때인 거고, 전작이 종영한지 고작 몇 달 지났을 뿐인데 새로운 작품에 제목까지 달았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거다.
“제목은 어때? 보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딱 오지 않아?”
제목은 ‘애기씨와 핸드폰’이다. 확 와 닿는 제목이 아니라서 나중에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딱 보니 타임슬립물이긴 한데… 여주가 조선시대 사람이에요?”
“보통 남자 주인공이 조선시대 사람인 경우가 많잖아. 선비였다던가, 아니면 장군이었다던가, 의원이었다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여주가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인 거지.”
“오호… 그럼 한번 볼까요?”
사실 여자건 남자건 조선시대 사람이 현대시대로 넘어오는 건 이미 몇 번이나 써먹은 패턴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런 패턴이 꾸준히 먹힌다는 건 그만큼 이야기의 구조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때문이다.
내용은 못생긴 남자에게 시집가기 싫어서 집에서 도망쳤던 여주가 자칫 실수로 강에 빠지게 되었는데 예상했듯이 죽지 않고 현대시대로 오게 된다.
그녀는 처음에는 당황하고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에 슬퍼하지만 이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신의 특기인 바느질 솜씨를 살려 자그마한 옷 공장에서 미씽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크크큭… 이거 뭐예요? 웃기는데?”
“그렇지? 재밌지?”
윤해연 작가 스타일인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선호하지만 말만 그럴 뿐이지 코미디의 비중이 크지는 않다.
“이거 쓰실 수 있겠어요? 이건 윤 작가님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이주희 작가 스타일 같은데? 작가님이 쓰셨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절대 몰랐을 거예요.”
“와… 역시 김 대표 귀신이네.”
“왜요? 이거 이주희 작가가 쓴 거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썼으니까.”
“그런데 왜 귀신이에요?”
“내가 원래는 작품을 쓸 때 아무것도 못 해. 내 안의 모든 세포는 오로지 하나, 시청률에 집중하고 있거든.”
“그거야 뭐… 작가님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들이 그렇죠.”
김은선 작가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3, 4회 시청률이 나오기 전날은 술로 밤을 지새운다고. 그리고 3, 4회 시청률이 1, 2회 시청률보다 많이 나오면 그제야 잠을 잘 수 있다고 한다.
1, 2회 시청률은 작가보다는 배우 빨이기에 진짜 재미있다고 평가를 받는 건 3, 4회 시청률을 봐야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은선 작가도 이럴진데 다른 작가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작품은 그렇지 않았어. 마음이 편하더라구. 자기가 내 작품이 재미있다고 해주니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더라. 막… 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은 없었어. PPL 때문에 화가 나기는 했어도 ‘이게 재밌을까? 시청률이 높게 나올까?’ 하는 정신적인 피로는 느끼지 못했거든.”
“그것 참 다행이네요. 원래 그게 힘든 거잖아요.”
“맞아. 글을 쓰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드니까. 그런데 그게 없으니까 글을 쓰고 나서 여유가 생기는 거 있지? 사실 그 전에도 시간 여유가 없다기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니까.”
물론 거기다 반 사전제작이나 마찬가지여서 생방으로 찍어대는 것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네… 그럼 혹시…?”
“후훗! 맞아. 만약 이 작가가 우리 회사였다면 안 봤을 텐데, 한번 봤어. 궁금하더라. 전에도 이 작가 작품을 VOD로 몰아서 보긴 했지만 김 대표가 끌어들인 이유가 그게 다인 것 같지는 않았거든. 게다가 강소연까지 캐스팅 한 걸 보니까 왠지 이번 작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그녀는 케잌을 크게 한 스푼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죠?”
“재밌더라. 난 코디미는 극의 양념을 쳐주는 것 정도면 충분하고 더하면 질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막장에 개그 코드를 적절히 쓰니까 시청자들의 몰입감을 다른 방법으로 극대화 시키는 거 있지? 그래서… 나도 해보고 싶었어.”
드라마 극본의 성질이라는 게 해보고 싶다고 바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사람의 성격이 쉽게 바뀌지 않듯.
“시놉이야 충분히 재밌고 웃기는데, 막상 대본 쓰게 되면 쉽지 않을 텐데요?”
“그거 알아? 나 어렸을 때 개그동아리였어.”
이 무슨 충격적인 말이란 말인가? 차라리 바둑동아리가 더 어울릴 것 같은 분이…
“진짜요?”
“내가 대학생 때 개그우먼으로 데뷔 하려고 MBS에 시험까지 봤다가 떨어졌잖아.”
놀라움의 연속이긴 하지만 개그동아리였던 것과 극본을 웃기게 쓰는 건 다른 문제다.
“뭐, 놀랍기는 하네요. 그래도 16회를 끌고 갈 만큼 재미있게 나올까요? 일단 시놉으로만 보면 재미있어요.”
“그래? 진짜?”
분위기를 보아하니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르를 이제 와서 들고 나온 것 같다.
“네, 하지만 아시죠? 어설프면 오히려 욕 먹는다는 거.”
“알지. 김 대표는 캐스팅이나 신경 써줘. 나는 김 대표가 재미있다고 했으니까 1, 2회 대본 만들어 올게.”
“하하하! 작가님 자신감 장난 아닌데요?”
“김 대표가 내 개그감을 못 봐서 그런데, 나도 이주희 작가처럼 만들 수 있어, 왜 이래?”
아무래도 걱정스럽다. 이주희 작가의 코믹적인 감각은 정말 대한민국 안에서 따라갈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만큼 대단했기에 어설프게 개그를 치려고 하면 질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작가님, 그럼 이렇게 하시죠. 딱, 극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큼만, 그 만큼만 넣어보죠.”
“왜? 나 못 믿어?”
시큰둥한 표정을 보니 실망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주희 작가랑 작가님은 색깔이 달라요. 뭐, 작가님이 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작가님의 장점을 없앨 필요는 없잖아요? 작가님이 가장 잘 하는 건 살리면서 해보자구요.”
“흐음…”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건 다르다. 취미로 할 거라면 모르겠지만 돈이 걸려있는 문제라면 일단 잘 할 수 있는 걸 주력으로 하는 게 우선이다.
“그럼 밍숭맹숭해지지 않을까?”
“아니에요. 이건 일단 기본적으로 여주의 캐릭터가 재미있어요. 중요한 건 이 여주를 누가 연기하느냐예요.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조금 밋밋한 상황에서도 충분히 맛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건 김 대표의 말이 맞긴 해.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다.”
아쉽다고 말했으니 일단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어간 셈이다.
“아쉬워하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요. 난 재미가 있을까보다는 작가님 체력이 받쳐줄 수 있을까가 더 걱정이네요. 진짜 하실 수 있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도 사전제작으로 할 수 있을까?”
“흐음…”
전작에서 사전제작으로 대박을 쳤으니 다음 작품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제작환경이라는 것이 작가 마음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방송국과 제작사, 투자자간의 협의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장담할 수만은 없다.
“일단 이야기를 해봐야 알겠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그래도 작가님이 누굽니까? 천하의 윤해연 작가가 사전제작으로 가자는데 아예 반대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도 방송국 편성이 어디서 잡히는 지는 봐야 하니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쨌든 잘 알아봐줘. 난 이거 두고 간다.”
“진짜 이대로 진행해도 되는 거죠? 대본 쓰다가 쓰러지시는 거 아니죠?”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 작가를 따라 일어서며 걱정스런 마음에 한 마디 덧붙이니 그녀가 획 하니 돌아본다.
“나를 무슨 칠순이 지난 할망구로 만들고 있어? 이러다 영정사진이라도 찍자고 할 분위기네?”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하십니까? 저야 작품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강행군을 하시려고 하니까 걱정돼서 그러죠. 드라마 작가 한다는 게 말이 쉽지, 16부작 완결 짓는다는 게 말처럼 쉽습니까?”
“그래서 사전으로 하게 해줄 거잖아. 뭐, 사전이라고 해도 일이 주는 건 아니지만 심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이상하게 일이 하고 싶어. 이러다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서 몇 년 작품 안 할 수도 있으니까 그 때는 나 괴롭히지 말고 지금 일한다고 할 때 잘 밀어줘. 알겠지?”
“후… 알겠습니다.”
“좋으면서 싫은 척은…”
“당연히 좋죠. 회사에 돈 들어오는데 싫어할 사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보다, 이미 머릿속으로 옳다구나 하고 있지?”
역시 윤 작가는 이걸 들고 올 때부터 우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걸 좋아하려나? 아니면 싫어하려나?
“무슨 그런 말씀을… 어쨌든 들어가세요. 제작진하고 이야기 진행되면 연락드릴게요.”
“흐음… 좋아. 연락 줘.”
윤 작가가 회사를 나가고 난 뒤 곧바로 ‘타이거 스튜디오’측에 연락을 해야 했지만 전화기만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어느 작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이 이 작품은 여주인공이 누가 캐스팅 되느냐가 중요하다. 당연히 우현으로서는 마침 좋은 작품을 찾고 있던 지나에게 이 기회를 잡게 하고 싶었다.
문제는 윤 작가 역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한데 아까 대화를 나누며 느꼈던 분위기로는 왠지 모르게 탐탁해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나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지나가 베이비페이스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오히려 작품에서는 그런 그녀의 매력이 부각되지 않는 작품들을 골라 했었는데, 그러다보니 이번 작품처럼 가볍고 유쾌한 코믹 연기와는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일수도 있었다.
또한, 자신 역시 지나가 이번 연기를 어떤 식으로 해나갈지 감이 안 온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일단 전화기에 떠 있던 지여울 제작 피디의 연락처를 지우고 지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지금 운동하니?”
“아뇨, 지금은 끝나고 매니저 오빠랑 식사중이었어요.”
“그래? 흐음… 너 오후에 ‘출발, 영화 산책’ 코멘트 녹화 끝나고 회사로 좀 올래?”
“회사로요?”
“응, 내가 시놉 하나 줄 게 있어서 말이야. 네가 이걸 봐줬으면 해서.”
“어머! 벌써 괜찮은 작품을 찾은 거예요?”
“그렇긴 한데…”
“그런데요?”
“일단 와서 네가 읽어 봐야겠어. 그래야 나도 감이 좀 올 것 같아.”
코믹 연기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잘 하기도 하고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은 오히려 영 살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스스로도 그녀가 어떤 연기를 보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상한 거예요? 이번에는 공포영화?”
“아니, 로맨틱 코미디야.”
“어? 좋은 거 아니에요?”
“좋긴 한데, 로맨스보다 코미디 비중이 더 많아.”
“아… 웃긴 장르구나. 저도 웃긴 거 좋아요.”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그 웃기는 걸 네가 해야 한다는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