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재수가 없으면…(1)
귀찮아서 안 받을까 하다가 받았다. 지금 안 받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의 하소연을 받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야! 김우현이! 너 기사 봤냐?”
얼마나 흥분했는지 이름까지 불러댔다. 예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기에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지금 그가 얼마나 흥분상태인지 짐작되어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흥분 가라앉히세요. 나이도 있으신 양반이…”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냐? 회당 6억으로 계약된 작품이야. 무슨 말인고 하면 도장이 꽝! 하고 찍혀서 아주 빼도 박도 못하고 집행되게 생겼단 말이라고.”
“그거야 알지만 일단 진정하세요.”
“알면서 그래?! 내 모가지가 지금 달랑달랑한데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어!”
“하하핫! 하여튼 오버는… 너무 심하게 엄살떠는 거 아닙니까? 김은선 작가예요. 천하의 김은선 작가가 주연배우 하나 날라 갔다고 작품을 망치겠습니까?”
“알지, 막상 카메라 돌아가고 방영되기 시작하면 시청률이야 잘 나오겠지. 하지만 그 전이 문제잖아. 광고는 이미지가 생명인데 초반에 광고 완판 안 되면 우리는 손해라고. 아니, 그걸 다 떠나서 너 알고 있었지?”
역시나… 그게 궁금했던 거다.
“하하하! 어떻게 김은선 작가랑 똑같이 물어보십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뭐? 김은선 작가가 우현이 너한테 연락했었어?”
“예, 국장님하고 똑같이 물어보던데요, 알고 있었냐고. 제가 무슨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이야… 그럼 너는 전생에 무슨 복을 그렇게 쌓았길래 이렇게 화를 피해 가냐?”
“국장님이 몰라서 그렇지, 저 매니저 하기 전에는 꽤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전에 엔터주 투자했다가 말아먹은 돈만 얼만데요. 제가 말했죠? 저 대리운전하고 살았다고. 전생에 복을 그렇게 쌓은 놈이 대리운전이나 하면서 살았겠습니까? 건물주 아들로 태어나서 골프나 치러 다니겠지.”
“하긴… 야, 김 대표. 그럼 네 생각에 앞으로 어떻게 되겠냐?”
“저보다 더 잘 아시면서 그래요? 뻔하잖아요? 남자배우 새로 캐스팅해서 대본리딩하고 촬영 들어가겠죠. 뭐, 배우는 도준혁보다 조금 떨어지긴 하겠네요. 이번엔 누가 봐도 도준혁 땜빵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아니다, 김은선 작품이라 다르겠네.”
“혹시 말이야…”
“설마 지금 도준혁이가 무혐의로 복귀하기를 기대하시는 거예요?”
“그건 어렵겠지?”
본인도 무리한 기대라는 건 아는지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바랄 걸 바라세요. 그게 방송 시작 전에 무혐의로 결정이 나겠어요? 못해도 한 달 동안 온갖 기사랑 루머가 쏟아져 나올 텐데, 도준혁을 그대로 끌고 갈 생각이신 거예요?”
“나도 무리라는 건 아는데, 기사 내용이 너무 황당하잖아. 아니, 성폭행이 말이나 되냐고, 말이… 생각해 봐. 걔가 뭐가 부족해서 성폭행을 하냐? 말마따나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눈웃음 몇 번만 보여주면 침대로 데리고 가는 건 일도 아닌 거잖아?”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그래? 그건 아닌가? 그래도 너나 나보다는 여자 꼬시기 훨씬 쉬울 거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왜 거기에 저를 끌어들이십니까?”
억울함에 한 마디 하니 국장이 대뜸 소리를 지른다.
“너도 못 생겼잖아, 인마!”
평소 외모에 그렇게 자신감이 있진 않았지만 은하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부쩍 자신감이 늘었기에 이런 부당한 발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제가 어디가 못생겼다고 그래요? 국장님 눈 희한하시네. 저는 국장님하고 달라요, 그렇지?”
자신도 모르게 옆에서 듣고 있는 은하에게 물었는데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대표님이 객관적으로 잘 생긴 편은 아니지.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어?”
순간적으로 ‘그럼 나랑 왜 사귀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쏙 들어갔다. 그렇게 어이가 없어 대꾸를 못 하는데 전화기 속의 국장 목소리가 들렸다.
“야, 옆에 혹시 유은하 있는 거냐? 너 보고 못 생겼다고 그러지? 거 봐. 어쨌든 나나 너 같은 인간들에 비하면 걔는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 성폭행이 말이나 되냐, 이 말이지.”
자꾸 자신을 국장과 동급으로 엮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말을 꺼내지는 못하지만 이미 자신은 유은하와 그렇고 그런 관계인 것에서 충분히 국장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혹시 알아요? 그런 쪽을 더 좋아하고 그럴지.”
“하… 진짜 그럴까?”
“괜한 기대하지 마시고 다른 배우 알아보세요.”
“알았어. 그리고 우리 이주희 작가님은 지금 차기작 생각하고 계신대?”
“국장님, 지금 ‘내 남편의 여자’ 마지막회 대본도 아직 안 나왔어요. 이 양반이 진짜…”
“알았어, 알았어.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래. 밤에 잠이 안 와요, 내가.”
“그만 좀 자요, 쫌! 사람 귀찮게 하기는…”
“너 이제 좀 컸다고 되게 비싸게 군다.”
“크흠… 어쨌든 너무 걱정하지 말고 김은선 작가 믿어 봐요. 시청률은 귀신같이 잡아내는 작가니까 남자 배우 바뀌어도 어지간한 작가들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김은선이 얄밉긴 하지만 그녀가 최고의 로맨틱코미디 작가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래, 그리고 이번에 유지나 ‘붉은 여우’ 잘 나가던데? 축하한다. 여러 소리들이 들리긴 하는데 신경 쓰지 말고.”
‘붉은 여우’는 개봉하자마자 예매율을 끌어올리며 현재까지 관객수 300만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문제는 배급사와 멀티플렉스에서 너무 많은 상영관을 확보해 스크린 독점 논란을 야기한 것.
물론 유정완 감독 작품이기에 극장 입장에서는 많은 상영관을 배분하는 게 그들의 이익에 맞겠지만 너무 많은 상영관 확보가 영화 관계자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다보니 영화 흥행에도 반감이 섞인 기사가 간간히 나오는데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자신이 제작사 대표라면 그렇게까지 상영관을 많이 확보하지 않았을 텐데 제작사와 극장주의 욕심이 맞물린 결과로 잘 나가는 영화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을 영화인데… 하지만 유지나 소속사의 입장에서는 제작사의 움직임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잘 흘러가기를 바라며 기도나 할 뿐.
“신경 안 쓰고 싶은데 괜히 우리 지나한테까지 욕이 돌아오니까 조금 답답하긴 하네요. 사실 제작사에서 무리하긴 했죠. 이제는 뭐,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래, 괜히 나서지 말고 그냥 우리 이주희 작가님 새 작품 구상에 도움 주도록 노력이나 해.”
“아이고,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 은하랑 지 피디가 무언의 표정으로 통화 내용을 말하라고 종용한다.
“별 거 아니야, 그냥 궁금했던 거지. 알고 있었나 해서…”
“그런 내용이야. 별 건 없어. 이 양반이야 이주희 작가 글 언제 내놓느냐고 닦달하고 싶겠지만 어쩌겠어? 아직 마지막회 대본도 안 나왔는데, 먹지도 않고 똥 싸라는 격이지.”
“이주희 작가가 이번에 두 번째 작품이었지?”
“응, 두 작품 다 괜찮게 나와서 그런지 양 국장이 기대를 많이 하네. 뭐, ‘사랑과 영혼’이 지금은 이렇게 논란이 많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슈몰이도 톡톡히 한 셈이지. 그리고 도준혁이 똥을 왕창 뿌렸기 때문에 동정론도 생겼을 테고. 망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힘들긴 하겠죠.”
지 피디의 말이 정답이다. 망하지는 않을 테지만 분명 이 논란을 헤치고 정상적으로 복구하는데 상당히 힘이 들 거다.
“아, 그리고 지나 언니는 왜?”
“으응, 이번에 스크린 독점 논란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는 거지. 이런 논란이 한두 번도 아니고, 상영관에서 내려가면 또 이런 논란이 언제 있었냐는 듯 흐지부지 되면서 없어지니까.”
“그렇긴 하지.”
은하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지 피디가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런데 조금 웃기긴 해요. 헐리우드 영화가 스크린 독점하면 무슨 천인공노할 만행이나 저지른 것처럼 광분하다가 막상 우리나라 제작사들도 돈 좀 많이 들어간 영화 개봉할 때는 입 싹 닦고 스크린 독점하는 행태요.”
“그건 지 피디 말이 맞아요.”
“물론 극장주들도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면 헐리우드 영화가 스크린 독점할 때는 말이나 하지 말던가… 나도 영화를 이제 제작하려고 하지만 그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우리부터 스크린 독점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잘 만든 영화는 스크린 수에 상관없이 대박을 치는 거니까.”
“제 생각이 딱 지 피디 생각이네요.”
“지나 씨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통 이런 일에는 제작사를 욕하지 배우를 욕하진 않잖아요?”
“저도 알지만 애초에 이런 논란이 없는 작품에 출연하는 게 더 좋긴 하죠. 흐음… 이번에는 제작사가 욕심을 부려서…”
“그래도 일단 지금 300만 돌파했고, 이 기세를 타고 가면 못해도 600만은 족히 넘겠네요. 지나 씨가 영화로 이 정도 흥행한 건 처음 아닌가요?”
“그렇죠. 첫 영화도 망했고, 두 번째 작품은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긴 수준? 뭐, 손익분기점도 처음보다 많이 낮췄다는데, 어쨌거나 잘 된 영화는 없었죠. 지나는 드라마로 떠서…”
“어쨌거나 축하드려요. 그럼 수다는 충분히 떨었으니 이제 우리 일을 해볼까요?”
“아… 또 일 해야 하는구나.”
“돈 벌어야지. 언능 엉덩이 떼고 일어나.”
심드렁한 얼굴의 은하를 데리고 대본 연습하는 곳으로 오니 다들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자자! 다들 좀 쉬셨죠? 감독님! 이제 다시 시작해요.”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요?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가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행운의 여신은 유은하를 말함이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행운의 여신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럼요. 은하 씨가 계시니 우리 영화는 대박날 게 분명한 거죠.”
그렇게 기분 좋게 대본리딩을 마무리하고 크랭크인 준비에 들어갔다.
우려했던 것처럼 투자를 받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유은하의 흥행파워가 대단했기에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투자를 성사시켰다. 또한, 거기에는 삼전투신의 도움(?)도 있었다.
그들도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준혁의 스캔들이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 제작비의 절반을 투자하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준혁의 스캔들은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불씨를 키워갔다. 성폭행 당한 여자가 계속해서 추가되며 그의 범죄를 증명하는 발언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거다.
결국 ‘사랑과 영혼’ 제작사는 기사가 터지고 나서 사흘 만에 주인공 교체를 선언했고 방송 날짜를 한 달이나 연기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의 고난을 즐겁게 지켜보는 와중에 오랜만에 유지나를 데리고 회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화가 흥행중이니 기분이나 좀 내려던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