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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나도 내가 무섭다니까!(3)
“32회, 회당 천오백으로 하죠.”
“그건 너무 짧잖아.”
“아이고, 국장님. 우리 작가님이 지금 KBC 소속도 아닌데 그렇게 장기 계약에 묶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사실 2천이 많은 금액이긴 하지만 아예 못 받는 금액도 아닙니다. 바로 전에 원고료를 얼마 받았는데요. 2천만 원으로 생색내려고 하시면 저희야 말로 섭섭합니다.”
볼멘 목소리로 항변하니 양 국장이 얼굴을 감싸 쥐고 마른세수를 한다.
“아이고, 김 대표. 자꾸 나 힘들게 할 거야?”
“저도 힘들어요. 지금 국장님이 우리 작가님 몸값을 이렇게 대놓고 깎으려고 들지 않습니까?”
“좋아. 그럼 우리 딱 하나만 더 하자, 48회.”
“그럼 2천 주십쇼.”
“김 대표!”
“우리 작가님이 지금도 천오백 이상 값어치는 합니다. 지금도 크게 득보는 거래는 아니라구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아니다. 원고료를 떠나 지상파 미니시리즈에 16부작 2번을 안정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게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바로 며칠 전에 회당 6억 계약했다. 잊어버린 거 아니지?”
“국장님, 저 아직 머리 쌩쌩하게 잘 돌아갑니다. 그리고 막말로, 우리 작가님 작품이 김은선 작가 작품만큼 시청률이 나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원고료 추가로 주실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돈 너무 밝히면 머리 벗겨진다.”
“머리 벗겨질 만큼 공짜로 받는 거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32회에 천오백 괜찮으시죠?”
“좋아! 그럼 50회에 2천 가자.”
“예? 숫자 애매하게 50회가 뭡니까?”
“48회면 정 떨어지잖아.”
2회 애매하게 남겨놓고 다음에 더 계약하자는 수작이지만 사실 드라마가 잘 나가면 2회 연장으로 퉁 칠 수 있긴 하다.
“50회 할 거면 이천오백으로 해요.”
“이천이백. 더 이상은 안 돼.”
“이렇게 쪼잔하게 나올 겁니까? 세편 연속은 너무 해요. 그제 ‘내 남편의 여자’ 시청률이 얼마 나왔는지 아세요? 아시면서 지금 이천이백을 부르시는 거예요?”
시청률 10%는 진즉에 넘어선 ‘내 남편의 여자’는 어제 13%를 찍으며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이번 작품으로 강소연 신드롬을 일으키며 드디어 드라마로 자신의 인생작을 만나게 됐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지금까지 강소연은 연기력과 미모는 출중하지만 항상 흥행과는 인연이 없어 왔기에 주변에서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있었는데 드디어 국밥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된 거다.
드라마가 종영을 향해 가면서 그녀에게 혹여 회사를 옮기고 싶다는 말을 들을까봐 촬영장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흠흠… 알잖아? 한 작품 대박이 끝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몇 없다는 거. 아, 물론 우리 이주희 작가님이 그러리라는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난 국장의 자리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대비하고자 하는 거니까, 알겠죠?”
“그렇게 말 안하셔도 알아서 들을 겁니다. 어쨌든 이천오백에 50회, 더 이상 조정 없습니다. 안 그래도 다음 작품에 얼마 받을지도 모르는데…”
“에잇! 좋아! 아휴… 이제 난 죽었다. 이제 김 대표 때문에 잠은 다 잤다구.”
“충분히 그 이상 뽑아먹을 겁니다. 막말로 우리 작가님이 김은선 작가 작품처럼 회당 6억 달라고 하겠어요?”
“못하지. 자체제작 할 거니까! 우리 작가님, 다른 건 다 써도 되지만 우리 웬만하면 의학물은 빼고 씁시다. 그것만 아니면 내가 아주 팍팍! 밀어드릴게.”
보통 의학물 하면 병원을 빌려서 찍는다고 생각하는데 종종 세트를 만들어 촬영하는 경우가 있다. 병원에서 허가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제작진 입장에서도 촬영을 더 쉽고 편하게, 작품성을 더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한다.
문제는 그렇게 세트장을 지어버릴 경우, 제작비가 뻥튀기 하듯 치솟게 된다. 특히 자체 제작이기 때문에 광고가 완판 된다고 해도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아, 제가 그런 쪽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특별히 영감이 생기지 않으면 그 쪽은 안 쓸 것 같아요.”
“하하하! 우리 작가님을 딱 보는 순간 알았지. 나랑 정말 잘 맞을 것 같아.”
“하여튼 그 설레발 좀 줄이세요.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세요?”
“이게 무슨 설레발이야? 난 딱 보자마자 알았다니까?”
“알았어요. 나중에 제작비가지고 쪼지나 마세요.”
“제작비는 서로 간에 잘 타협해서 하는 거지… 뭘 벌써부터 선을 그으려고 해?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시리.”
“하여튼 잘 해봐요. 다음 작품은 이제 KBC에서 하게 생겼으니 졸지에 김은선 하고 비교되게 생겼네.”
“완전 부담 돼요.”
이주희 작가는 좋으면서도 부담되는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어차피 같은 시간에 붙지 않으면 사람들은 경쟁으로 보지 않거든요. 월화에 김은선이 들어가고 수목에 작가님이 들어가면 아예 종목이 다른 걸로 봐요. 같은 시간끼리는 비교해도 요일이 다르면 아예 비교조차 안 하니까. 그건 예능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긴… 예능도 날짜가 다르면 아예 비교 선상에 놓지를 않았죠.”
“거 봐요.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김은선은 김은선이고, 작가님은 작가님이니까. 그리고 사실 작가님이 다른 작품 준비하고 편성 잡힐 때쯤이면 이번 김은선 작가의 ‘사랑과 영혼’은 이미 종방연까지 끝내고도 남았을 시간이니까…”
“아… 맞다. 아직 시간이 많은데, 바보 같이 벌써 작품 들어가는 줄 알고 긴장했네요.”
보고 있던 양 국장이 웃으며 한 마디 보탠다.
“그러지 마시고 바로 하나 더 하셔도 됩니다. 오래 쉬면 머리만 굳잖아. 안 그래, 김 대표?”
“창작자에게는 쉴 시간도 필요한 겁니다. 그래야 머리가 잘 돌아요.”
“알았어, 알았어. 작가님 그럼 우리 계약서에 도장 찍을까요?”
그렇게 무사히 계약을 마치고 사무실에 오니 의외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공자 같이 잘 생긴 석호가 쑥스러운 표정을 한 채 사무실 한켠의 소파에 앉아 있었던 거다.
“오늘 연기 연습하는 날 아니었어?”
“아, 아뇨. 오늘 그 날이라…”
“아… 오늘이 오디션 보는 날이었어?”
“네. 그래서 가기 전에 들렀어요.”
말을 더듬지 않는 대신에 말하는 속도가 상당히 줄었다. 마치 1.5배 느리게 돌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연습은 좀 했어?”
“많이 했어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 마, 말씀대로 경험하는 셈치고 보려구요.”
말하는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그 목소리 하나만큼은 정말 사람을 빨려들게 한다. 오히려 말을 천천히 하니 뭔가 더 분위기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 그냥 연습한다 생각하고 다녀 와. 부담 가지지 말고.”
“네. 그리고 저희 이모가요…”
“응?”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그의 이모는 바로 강소연인데…
“이모가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달래요.”
“아… 하하하! 그래그래. 소연 씨한테 이번 드라마 마무리 잘 하라고 전해 줘.”
괜히 긴장했다. 석호가 나가고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기를 얼마나 됐을까? 어느덧 퇴근 시간이 다가왔을 때쯤 인터넷에는 김은선 작가의 ‘사랑과 영혼’ 여주인공 캐스팅 기사가 떴다.
“어? 이건 좀 심한데…”
[한여름, 김은선 작가의 ‘사랑과 영혼’에 전격 캐스팅!]
[한여름, 김은선의 페르소나 되나?]
일부러 그런 거다. 전에도 유은하를 까고 한여름을 캐스팅 해놓고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지금껏 한번 주연으로 쓴 배우는 다시 주연으로 쓴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 관례를 깨고 다시 캐스팅할 정도로 화가 나긴 했나보다.
어쨌든 이번에 한여름이 김은선의 ‘사랑과 영혼’에 캐스팅 되면서 다시금 시청자들의 관심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특히 기사 댓글들은 가관이었다.
[세상에… 유은하가 이걸 마다하고 영화를 찍는다니… 미쳤나 봄.]
[김은선 작가 작품은 무조건 해야 하는 거 아님?]
[과연 누구의 선택이 옳은 것일까? 나는 김은선에 한 표.]
모든 댓글들이 유은하의 선택이 잘 못 됐음을 말하고 있었다. 뭐, 자신조차도 박우진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면 같은 말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조금 기분이 나쁘네?
지이잉…
역시나 기분 나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오빠! 아니, 김 대표님. 방금 기사 보셨어요?”
화가 잔뜩 오른 은하의 목소리다. 얼마나 열이 났으면 자신에게 존댓말을 할까.
“무섭게 왜 존댓말을 하고 그래? 나도 기사 봤어.”
“반박 기사 좀 내 봐. 우리 영화 홍보 좀 하라구. 내가 바보 취급을 받고 있잖아! 댓글 봤어? 이것들이 진짜…”
“봤어. 신경 쓰지 마. 네가 언제부터 기사 댓글 신경 썼다고…”
“신경 안 쓰게 생겼어? 그리고 왜 하필 한여름이야?”
나이도 비슷하기에 둘은 서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김은선 작가 작품에서 은하를 까고 그녀가 여주를 차지한 적도 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유은하가 반대로 김은선 작가의 작품을 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면 그녀 대신에 한여름이 들어간 건 같았다. 이러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뭐, 캐스팅 이야기가 나오다 보면 별의별 말들이 나오잖아. 그러다보니까 한여름까지 이야기가 나왔나보지. 전에 윤해연 작가 때문에 물 먹고 좋은 작품 찾고 있었을 테니 한여름 입장에서도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을 테고.”
“그래도 열 받잖아!”
“참아, 별거 아니야. 결과는 어차피 나중에 나올 거니까 너무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너도 시나리오 봤잖아? 이거 분명 대박 친다.”
“진짜?”
그제야 음성이 조금 누그러진다.
“진짜야. 내 말 틀린 적 있었어?”
사실 많이 쫄린다.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모르니… 그냥 기본 이상만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녀를 진정시키고 시간이 흘러 파이브 걸즈의 데뷔 쇼케이스를 하루 앞둔 날. 우현은 은하와 함께 ‘도마뱀 미디어’의 사무실에 있었다.
출연 계약이야 진즉에 도장을 찍었고 오늘은 감독과 만나서 캐릭터 분석도 하고 제작진들과 다른 배우들과도 얼굴을 익히고 대본을 맞춰보러 온 것이다.
사실 은하 매니저만 따라가면 되는 일인데 오늘은 사무실에 일이 없어 놀러온 거다.
“석호 매니저는 구했어?”
은하는 앞에 대본을 두고 눈으로 읽으며 우현에게 말을 건넸다.
“응, 경수 친구가 왔는데 애가 싹싹하더라. 그래서 매니저 시키기로 했어. 뭐, 그렇다고 차를 구해주지는 않고 당분간 회사에서 일 배우고 석호는 대중교통 타면서 이동하기로 했지.”
놀랍게도 오디션에 단박에 합격한 석호는 우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모인 소연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응, 걔 괜찮더라. 확실히 보는 눈은 있어.”
시선은 대본을 향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하는데 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구를 칭찬하는지…
그 때, 지여울 제작 피디가 황급히 회의실로 들어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어? 대표님! 기사…”
“네?”
“‘사랑과 영혼’ 기사가 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