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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나도 내가 무섭다니까!(2)
파이브 걸즈의 뮤직비디오 촬영이 순조롭게 끝나고 데뷔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특히 데뷔 쇼케이스 장소와 컨셉, 사회자를 섭외하느라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화통에 불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우현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양 혼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유유자적 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일을 그의 손 하나하나 거쳐 가며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기에 그저 결과물이 올라오면 보고 방향만 지시해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팬카페 분위기도 좋고… 기대가 되네.”
노래는 확실히 좋다. 분명히 뜬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기에 데뷔 후 어느 정도나 반응이 올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님, 이주희 작가님 오셨는데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금 나가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대표실을 나가니 이주희 작가가 한껏 차려 입은 채 우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은 병든 오이처럼 생기가 없어 보인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에휴, 얼굴을 보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겠네요. 작가님 부모님이 보시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아요.”
“아니요. 아쉽게도 저희 엄마, 아빠는 제가 보내드리는 돈 덕분에 지금 해외여행 가셨거든요. 어제도 더 재미있게 쓰라고 닦달하셨다니까요.”
“하하하! 그건 작가님 얼굴을 못 보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봤어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네요. 제가 방송국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별 걱정 안 하셨던 분들이라… 뭐,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돌아올 때 선물 기대하라고 했으니 그거나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럼 오늘 미팅 끝나고 제가 근사한 곳에서 쏠 테니까 몸보신 좀 하세요.”
“고기로 사주세요. 소고기가 좋겠어요. 아무래도 소고기는 꽃등심이죠?”
“그럼요. 제가 꽃등심으로 쏘겠습니다.”
“이래서 사람이 잘 나가야 하나 봐요. 전에는 누가 밥 사준다고 해도 4,500원 짜리 구내식당이면 감지덕지 했는데 말이죠.”
“그게 정답입니다. 일단 가시죠.”
오늘은 그녀와 함께 KBC에서 계약 관련 미팅을 하기로 한 날이다. 방송사측에서는 그녀와 장기 계약을 하기를 원하는데 보통 자기네 드라마 공모전을 통해 키워진 작과들과 그런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하면 싸게 계약할 수 있고 만약 그 작가가 대성하게 되면 큰 이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주희 작가와 계약하고자 하는 경우도 그런 식의 장기계약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건 이주희 작가처럼 이미 확 떠버린 상황이면 쉽지 않다. 따라서 오늘 미팅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예측할 수 없다.
방송국에 도착해 약속된 드라마국 회의실로 들어가니 이미 자리에는 KBC 드라마국장인 양세종 국장이 와 있었다.
“아이고, 김우현이! 이제 대표라고 불러야지? 김우현 대표! 이거 진짜 오랜만이네. 그리고 이 분이 이주희 작가님? 반가워요.”
양세종 국장은 긴 회의탁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는데 50대 중반임에도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이었다.
“그렇네요. 1년하고도 반 만에 뵙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째 그 때보다 흰 머리가 더 는 것 같은데요? 국장으로 승진하셨으면 얼굴이 더 좋아지셔야 하는데…”
양세종 국장은 처음 우현이 매니저 일을 시작할 때 많이 도와주면서 상당한 친분을 쌓았었다.
그 때는 젊지도 않은 나이에 매니저를 처음 시작한다는 우현이 안타깝다며 은하를 비롯해 옛 파인 엔터 소속 배우들을 많은 작품에 연결시켜 줬었는데 그 결과가 좋아 우현을 많이 좋아했었다. 행운의 사나이라고 말이다.
“아휴, 나 놀리는 거야? 우리 미니시리즈 시청률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래서 이번에 김은선 작가랑 작업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거 잡는다고 회당 6억을 베팅했다고. 지금 위에서 이거 대박쳐야 한다고 난리야. 그런데 나 하나만 물어보자. 유은하 지금은 네가 데리고 있다며?”
탁자 건너편에서 슬쩍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은근히 물어온다.
“네, 얼마 전에 우리 회사로 옮겼죠.”
“물어보니까 도준혁 때문에 한다, 안 한다 하다가 결국 손 털고 나갔다고 들었는데, 맞아?”
“맞습니다.”
“좋아, 내가 도준혁 관련돼서는 뭐 때문에 싫어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을게. 무슨 이유가 있겠지. 네가… 아니, 김 대표가 괜히 그러지는 않겠지. 근데 그게 김은선 작가를 깔 만큼 큰 이유였던 거야? 아니면, 그거를 까고 지금 영화 한다는 기사가 났던데…”
“김은선 작가보다 잘 나갈 것 같냐구요?”
“응, 내가 궁금해서 잠을 못 잤잖아. 뭐야? 뭐 때문이야?”
“아휴, 국장님, 지금 이주희 작가 데려다 놓고 김은선 작가 이야기만 하실 겁니까?”
“으응? 아, 그래, 내 정신 좀 봐. 이주희 작가, 우리 KBC 식구였죠? 그 때는 예능에 계셔서 내가 얼굴을 모르네. 혹시 그 때 서운한 게 있었더래도 조금 이해해 주세요. 원래 예능 쪽 사람들이 말도 거칠고 행동도 거칠어.”
“아, 괜찮아요. 그 때, 잘 지냈어요.”
전에 듣기로 이주희 작가는 예능 쪽에서 일할 때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단지 그 쪽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래요? 하하하! 원래 우리 KBC 사람들이 착해, 응? 원래 회사를 나가면 안 좋은 감정이 들게 되는데 우리 이 작가님 봐봐. KBC에 감정이 남아 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걸?”
우쭐하면서 말하지만 표정으로는 다행이라 여기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럼요. 그랬으면 안 왔을 거예요.”
“거 봐! 응응?”
“아휴, 알겠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물어본 거 답 좀 해줘. 나 지금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회당 6억이야. 그거 광고 다 붙어도 감당 안 되는 거 알지? 광고 완판에 수출까지 퍼펙트하게 돼야 내 목 안 날아간다고.”
사실 광고 완판되면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지만 확실히 방송국에서 받는 압박감은 클 것이다. 물론 김은선이기에 쿨하게 받아줬겠지만 만약이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겠네요.”
“그렇게 남 일 보듯이 말하지 말고, 말해 봐. 정말 그 영화가 김은선 작가 거 보다 더 괜찮았어? 아니면, 이번에는 영 그래?”
“그걸 왜 자꾸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야!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너, ‘연예계 미다스의 손’ 타이틀로 다큐 들어간다며!”
“아… 그게…”
“김 대표, 예전부터 행운의 사나이라고 내가 얼마나 도와줬어?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 예측이 아주 귀신같더라니까? 이제 와서는 그런 다큐도 찍는다고 하는데 내가 안 물어보고 배기겠냐고. 나 좀 살려줘.”
“아이고, 국장님. 김은선 작가가 누굽니까?”
“누구긴, 대한민국 최고 로맨틱 코미디 작가잖아.”
“그렇죠. 서울에서 최고도 아니고 KBC에서 최고도 아닌 국내 최고라구요. 그런 작가가 쉽게 실패하겠습니까? 진짜 김 작가 시놉이 이상해서 깐 건 아니에요. 그랬으면 애초에 캐스팅할 때 거절했겠죠, 안 그렇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그렇죠. 국장님께서 걱정하는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도준혁이 싫어서 그랬어요. 은하가 그 친구와는 절대로 연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 잘 될 것 같아서 캐스팅 됐지만 미련 없이 포기한 겁니다. 진짜예요.”
“진짜 그 이유밖에 없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그럼 이번에 영화 들어가는 거는?”
“그건 그거 나름대로 좋아서 들어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김은선 작가 작품보다 월등히 좋아서 한 건 아닙니다. 물론 시나리오가 별로였다면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겠지만…”
“그러니까 이제 보니까, 도준혁이 싫어서 까고 싶은데 마침 괜찮은 작품이 나와서 말을 바꿔 타게 됐다, 이거구만?”
“원래 인생이 처음 생각한 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오케이! 내가 밤에 잠을 못 잤는데, 이제 김 대표 말을 들으니까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
“하하, 그래야죠.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실까요? 우리 이 작가 너무 많이 기다렸어요.”
“아, 그래 그래. 우리 이주희 작가님, 작가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케이블이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해도 지상파 잘 나가는 건 못 이겨요. 알고 계시죠?”
“그럼요. 둘 다 잘 만들었으면 케이블보다는 지상파죠.”
“그럼 그럼. 그래서 말인데, 요즘 작가가 없어. 하나같이 전부 케이블로 가니 말이야. 전부 젊은 감각의 작가보다는 나이든 사람밖에 없어서 시청률이 영 안 나와.”
사실 그게 작가 탓인가? 예전부터 잘 통하던 공식만을 고집하는 지상파 드라마국의 고집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도 얼굴에는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죠. 그런데 요즘 케이블에서 작가들에게 엄청 공격적으로 투자하지 않습니까? 아시죠?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 김은선, 윤해연 등등… 전부 케이블로 가는 게, 투자를 많이 하니까… 안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알았어. 돈 많이 달라는 거지?”
“하하하! 역시 우리 국장님은 배려심이 이렇게 깊으시다니까!”
“배려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쨌든, 우리 이주희 작가님을 내가 이렇게 특~별히 모신 건 우리 KBC에 새로운 등불이 되어 주시라, 이 말씀입니다.”
이주희 작가는 저렇게 붕붕 띄워주는 국장의 말에 적응이 안 되는지 얼굴을 붉히며 ‘예예’만을 반복했다. 뭐,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결국 원고료를 정하는 건 자신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사람 비행기만 태우지 마시고, 금액을 말해주세요. 도대체 얼마를 주시려고 사람을 홍콩으로 보냈다, 뉴욕으로 보내다, 그러십니까?”
“허허… 성격도 급하기도 해라. 작가님, 회당 2천만 원 어떻습니까?”
“2천만 원이요?!”
놀란 이 작가가 눈을 크게 뜬다.
“놀랐죠? 김 대표도 봤지? 이 작가님 놀라신 거! 내가 이렇게 통이 큰 사람이야. 이 작가님 회당 2천만 원이면 단박에 최고 작가 반열에 드시는 겁니다.”
2천만 원이면 분명 지금 이주희 작가의 레벨로 봤을 때 아주 큰 금액이다. 문제는…
“계약을 몇 회 원하시는 거예요? 50회?”
“어? 50회라니! 김 대표 너무하네…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하여튼 저 설레발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래서 몇 회요?”
“백 회는 해야지.”
“백 회에 회당 2천만 원이다, 이거죠?”
“그렇지, 그렇지.”
양 국장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대단한 결심한 한 것 같지만 지금 이주희 작가의 추세로 볼 때, 회당 2천만 원은 몇 년 만 지나면 금방 추월할 수 있는 원고료다.
“너무 길어요. 안 된다는 거 뻔히 아시면서…”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자 양 국장은 다시 상체를 들이민다.
“에헤이, 이거 왜 이래? 이 정도 해주는 방송사가 있는 줄 알아?”
“줄입시다.”
“기간만?”
“기간이랑 원고료랑 둘 다.”
“크흠… 그래서, 둘 다 얼마씩 줄이고 싶은데?”
양 국장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