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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누가 진짜 귀신인가?(3)
사실 큰 기대를 가지고 달라고 한 건 아니다. 어차피 석호는 아직 연기를 배워야 할 때이니 언감생심 한자리 끼워 달라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2년간 죽도 밥도 안 된 시나리오를 기어코 살려내겠다는 걸 보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전부였다.
“그래요, 아, 그리고 하나 더 보내드릴게요. 이건 이번에 들어갈 ‘살수’ 말고 또 준비하는 영화예요.”
“그래요, 보내주세요.”
메일로 온 그것을 출력해 읽기 시작했다.
“흐음…”
내용은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복수극인데 짜임새가 좋고 몰입감이 좋다. 특히 캐릭터 간의 개성이 살아있어 연출력만 뒷받침 된다면 괜찮은 영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게 다다.
역시나 무협은 한계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액션을 어떻게 살릴지… 무협 영화가 액션이 어설프면 아무리 내용이 재미있어도 관객 동원이 힘들다. 왜냐하면 무협 영화를 보러 오는 대부분의 관객은 액션을 보러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래도 여성 액션은 한계가 있는데 이 작품의 여주인공 역시 대단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 이걸 어떤 여배우가 살릴 수 있을까?
한 가지 욕심나는 게 있다면 지 피디의 말처럼 남자주인공의 하인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참 재미있다. 적당히 코믹스러운 장면도 있고 마지막에 주인을 위해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오디션으로 뽑을 거라는데 한 번 보내봐?
시나리오를 손에 쥐고 고민하다 이내 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습을 하는 중인지 한참동안 신호음이 가다가 받는다.
“어? 대표님?”
“응, 연기 연습중이니?”
“네.”
“잘 돼가?”
“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너 오디션 한번 볼래?”
“오, 오, 오디션이요? 지, 진짜요?”
놀랐는지 평소보다 말을 더듬는다.
“연습하고 있다면서 그렇게 더듬어서 되겠어?”
“아, 죄송합니다.”
신경을 쓰면서 말하면 확실히 달라진 게 느껴진다.
“이번에 ‘살수’라는 영화가 준비 중에 있는데 거기에 괜찮은 조연 자리가 있어서 말이야. 물론 오디션이라는 게 한 번에 붙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그러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연습한다, 또는 오디션을 한번 경험해본다는 마음으로 참가해 봐.”
이미 숱한 기획사 오디션에서 떨어져본 적 있을 것이기에 또다시 경험하라는 게 웃기는 말일 수도 있지만 노래 오디션과 연기 오디션은 분위기가 다르다.
또, 아직 발음이 완벽하게 고쳐진 것이 아니기에 기대는 하지 않지만 왠지 저 캐릭터와 석호의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 더듬는 버릇조차도 잘 써먹는다면 극의 씬스틸러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아무리 머릿속으로 조합을 잘 떠올려도 오디션장에서 연기를 개판으로 하면 아무 소용없겠지만…
“알겠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꼭 하, 합격 하겠습니다.”
“그래, 준비 열심히 하고. 회사에서 오디션 일정은 따로 보내주도록 할게. 수고해.”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지 피디가 하나 더 보내준 시나리오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민주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지금 기사 떴는데, 김은선 작가 차기작인 ‘사랑과 영혼’에 남자 주인공으로 도준혁이 캐스팅 됐다고 하는데요.”
“아휴… 빠르기도 해라.”
일부러 빨리 발표한 거다. 우리 쪽에서 압박을 하니까 아예 입도 뻥끗 못하도록 기사를 내버린 거다. 이걸 어떻게 받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바로 은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기사 봤어?”
“응, 나도 기사 봤다.”
“작가님은 뭐래? 아, 안 된다고 했으니까 기사 냈겠지. 제대로 항의는 한 거야?”
“싸울 뻔했다. 김 작가랑…”
“하아… 내가 우습다 이거지?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잖아.”
“일단 진정해 봐.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어떻게? 이거 해결할 수 있는 거야? 그냥 나 하차한다고 할래?”
“일단 기다려 보라니까. 무조건 빠지면 너만 우스워지잖아. 빠져도 그냥 빠지면 안 되지.”
“그럼?”
“그러니까 내가 방법을 찾아 본다구. 일단 전화 끊고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쓸데없이 이곳저곳 전화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알았어.”
마지막에 풀 죽은 소리로 전화를 끊는 걸 보니 또 안쓰럽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이 세게 말하지 않으면 그녀를 진정시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일단 다시 김은선 작가에게 전화를 하니 그녀는 전화기를 꺼놓은 상태다. 아예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결국 제작사로 전화를 하니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을 반복하다 다시 김은선 작가가 직접 전화를 주었다.
“김 대표, 나 정말 실망이에요. 이런 식으로 작품에 흠집을 내고 싶어요?”
“기사를 내기 전에 적어도 우리와 상의는 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캐스팅 기사를 왜 파인 엔터랑 상의하죠? 정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정 마음에 안 들면 은하 씨가 그만두면 되겠네요. 나 정말 김 대표한테 실망했어요. 작품만 잘 본다고 이 바닥에서 잘 나갈 거라는 생각은 오만인 거 알아요?”
언성이 점점 높아지며 쏘아붙이는데 더 이상 듣고 있기 힘들다.
“알겠습니다. 그럼 끊죠.”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후 곧바로 제작진에 연락해 유은하가 하차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제작진은 당황해서 이유가 뭐냐?, 지금 잘 나가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냐? 등등 집요하게 물어왔지만 김은선 작가와 이야기하라 하고 넘겨버렸다.
그렇게 사고를 치고 나니 화는 머리끝까지 나는데 대책은 서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앞에 있는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머리라도 식힐 요량이었다.
내용은 과거 어떤 이유로 인해 피해망상과 같은 정신병을 앓던 여인이 조선족 조폭들과 국정원과 엮이면서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뭐야? 이런 게 있었어?”
지금 충무로에 돌고 있는 시나리오는 거의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처음 보는 거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다. 마치 첩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좋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이거지?”
당장 지여울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시간 되시죠?”
“대표님, 제가 이 시나리오 보내고 대표님한테서 다시 전화 온다에 십만 원 걸었던 거 아세요? 후훗! 저 지금 이십만 원 땄네요, 우하하!”
여기에도 귀신이 있었나?
“그, 그래요?”
“그럼요. 어때요? 이번에 김지원 감독님 또 대박 내실 것 같죠?”
헛다리를 짚었지만 전화 올 것은 맞췄으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 시나리오 쓴 사람이 누굽니까?”
“그거요? 윤명세 씨라고 지금 김지원 감독님하고 같이 계세요.”
“아니, 그거 말구요.”
“네?”
“‘살수’ 말구요. 다른 거 보내줬잖아요.”
“아… ‘지옥도시’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거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그거는 아직… 설마 그거에 꽂히신 거예요? 대박…”
“왜요?”
“그거 쓴 사람 아직 조감독이라서… 입봉도 못 한 감독이거든요.”
이걸 어찌해야 하나? 입봉도 못 한 감독이면 연출 스타일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시나리오만 기가 막히게 쓰고 연출력이 개판이면 출연 안하는 것만 못하다.
“그래요? 이거 하기는 할 거예요?”
“원래는 김지원 감독님이 연출하는 ‘살수’를 일차적으로 하고, 그 다음에 하려고 했는데… 이거에 꽂힌다 이거죠?”
지여울 피디도 우현의 작품을 보는 능력은 인정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심하는 듯했다.
“이걸로 갑시다.”
어차피 지금은 못 먹어도 고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다. 은하는 까이기 직전이고 저쪽은 도준혁으로 못을 박았다. 그럼 이대로 죽느니 패는 까봐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귀신인지 말이다.
“누구를 줄 건데요?”
“유은하요.”
“어? 은하 씨 지금 김은선 작가 드라마 출연 확정지었잖아요?”
“그거 까고 이거 들어갑니다. 받을 거예요?”
지 피디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유은하를 준다는데 안 받으면 이 짓 하지 말라는 거죠. 계약관계는 확실히 정리되는 거죠?”
“네, 아직 입금 안 됐거든요.”
아직 방송사에서 돈도 안 들어왔을 텐데 은하에게 줄 출연료가 당연히 입금될 리 없다.
“좋아요. 그럼 저희도 이거 진행해요. 물리는 건 안 된다는 거 알죠?”
“당연하죠.”
“하… 오늘부터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겠네요. 어쨌든 회사에 보고할게요.”
보고한다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작품의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지여울 제작 피디다. 그만큼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마음을 먹었다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진행될 거다.
은하가 하차한다고 제작진에 먼저 말해놔서 그런지 지금도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김 작가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오는 걸 보니 일단 질러놓긴 했는데 진짜로 하차할 줄은 몰랐나 보다.
두 시간쯤 지나자 지 피디에게서 오케이 됐다고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 입봉하게 되는 조감독과 미팅 약속까지 잡은 뒤 곧바로 아는 기자에게 연락해 기사를 요청했다.
내용을 알려준 지 1시간도 안 돼서 포털에 단독기사가 떴다.
[유은하, 김은선 작가의 ‘사랑과 영혼’ 하차]
제목도 그렇지만 내용은 더 파급력이 컸다. ‘사랑과 영혼’보다 하고 싶은 작품이 있어 그 작품을 선택하기로 했다는 것. 쉽게 말하면 김은선 작가를 까고 다른 걸 선택했다고 기사를 낸 거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왔다. 이제는 우현의 전화가 아니라 회사 전화에 불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피할 필요가 없어져 김은선 작가의 전화를 받으니 그녀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김 대표! 나, 김 대표 이렇게 안 봤는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 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나도 아는데 그래도 상도의라는 게 있어! 그런데 지금 김 대표가 하는 짓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제작진들을 전부 물 먹인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알죠. 그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도준혁과는 같이 할 수 없다구요. 그런데 그 이유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기사부터 터뜨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저희도 하차하는 수밖에 없죠.”
“흥! 어이가 없네, 정말… 이 작품 까고 얼마나 잘 될 것 같아요?”
솔직히 입봉 감독 작품만 아니라면 훨씬 더 잘 될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잘 안되면 두고두고 쪽팔릴 것 같아서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누가 흥행의 신인지 말입니다.”
“당신… 정말 실수하는 거야.”
그녀는 우현이 말도 꺼내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후아… 하하하!”
뒤는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통쾌함에 속이 후련해졌다.
“대표님, 지금 기자들이 단독 기사 나간 거 진짜냐고 계속 문의해 오는데 어떡할까요?”
민주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물어보자 시원하게 내뱉었다.
“진짜라고 하세요. 유은하가 김은선 작가 작품 까고 영화 시작한다고. 그렇게 말해요. 그 아줌마 처음부터 재수 없었다니까. 아, 이건 혼잣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