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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해야 할 일은 많고…(4)
이건 대답을 잘 해도 문제고 못 해도 문제다. 괜히 정답에 가깝게 말했다가 무당취급을 받으면 인생 피곤해질 것은 당연하고 너무 어이없는 답을 했다가 허세남 취급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한… 5백만 정도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예상보다 조금 부족하게 답했다.
“와, 5백만이면 대단하네요.”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었다고 하니 그 정도 들어도 큰 수익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5백만 관객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요?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대화 이후로 대화가 끊기고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찍었다.
점심을 먹고 느즈막한 오후가 돼 몰려오는 졸음을 애써 참으며 업무를 처리하는데 이정민 작곡가가 회사로 찾아왔다.
아직 그가 만들었다는 음원도 못 들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이야…
“안녕하세요.”
그는 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감지 않은 것처럼 덥수룩한 머리와 일주일은 안 깎은 것 같은 수염은 그대로였다.
“예, 앉으세요.”
달라진 게 있다면 전에는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실내를 둘러보며 손을 비비는 것에서 뭔가 초조한 것이 느껴졌다.
“다시 오니까 느낌이 또 다른 것 같네요.”
그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파인 엔터가 지금 잘나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가요? 저번 주말에 우리 유니랑 만나셨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음악에 관해 서로 잘 통하던가요?”
“아, 예. 유니 양이 워낙에 똑똑하고 섬세한데다가 음악을 참 다양하게 받아들이더라구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오늘 오신 건 저희랑 계약하려고 오신 거죠?”
“네, 네. 그렇죠.”
“조건은 들으셨나요?”
“예? 아니, 그냥… 일단 와서 상의하자고만…”
음악은 잘 만들지만 이런 거래는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아, 그래요? 전에는 계약하지 않을 것처럼 하셔서 우리와는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크흠… 그 때는 제가 여유가 있어서 혼자 활동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요즘 혼자 살기가 버겁네요.”
“그렇죠? 집세는 물론이고 식비에 휴대폰 요금에…”
“그래서 계약하고 조금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싶어졌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까? 자존심도 많이 상할 텐데 말이다.
“그러셨구나. 뭐, 꼭 전속 계약이 아니라고 해도 이번에 데뷔하는 파이브 걸즈가 잘 나가면 음원 수익이 상당할 겁니다.”
“그거 정산 받으려면 까마득하니까요.”
“그래요. 그럼 계약하도록 합시다. 저희 회사에 작사가도 있는데 언제 같이 한번 식사라도 하죠.”
“작사가가 있나요?”
“네, 이조은날 작가라고 이번에 유니 앨범에 수록된 곡 상당수가 그녀가 작사한 겁니다.”
“아… 이번에 수익 상당하셨겠네요.”
“그렇죠. 글 쓰면서 돈 벌어 살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익을 얻고 계시죠. 뭐, 작곡을 스스로 한 유니에 비하면 못하겠지만.”
“유니 양의 재능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싱어송라이터가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제 음악을 듣고 좋아해주니 그건 또 그것대로 신기하더라구요.”
“제가 이 바닥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친구들을 꽤 봤는데, 사실 유니 만큼 놀란 친구는 없었어요. 걔는 정말… 천재죠. 그럼 계약서 드릴 테니까 검토하시고 동의하시면 서명하면 됩니다.”
그와 무사히 계약을 마치고 식사 스케줄까지 잡은 다음에 집에 보냈다. 계약금으로 천만 원을 송금했으니 당분간 막혔던 숨통이 트일 거다.
시간이 흘러 ‘붉은 여우’의 일반 시사회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건 그 입소문이 좋은 쪽으로 돈다는 것.
오랜만에 대표실로 얼굴을 보인 경수는 우현 옆에서 노트북으로 댓글을 쓰려다 멈칫했다.
“지금 이런 분위기면 굳이 저희가 보테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그래도 써. 정성스럽게 써라.”
“아니, 뭐 영화라도 보여주고 쓰라고 하셔야죠. 전 보지도 못했습니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 애들 지금 준비시키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새끼, 엄살은… 그리고 내가 줄거리 다 말해 줬잖아. 그거 듣고 알아서 쓰면 될 걸, 내가 네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 줘야 하냐?”
“그냥 영화라도 좀 보여 줬으면 덜 억울하겠다, 이 말이죠.”
“영화는 주말에 시간 내서 봐. 그리고 어제 자켓 촬영 잘 했어? 사진 나온 거 나한테 보내주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남자배우 지망생 하나 계약했잖아요.”
“석호?”
“네, 매니저 하나 더 뽑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데리고 올 사람이라도 있어?”
“제 친구가 지금 놀고 있어서… 이제 저희 회사도 끗발 좀 날리지 않습니까? 딱 파인 엔터라는 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여기서 일할 수 있겠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대표님께 말씀은 드려본다고 했습니다.”
“그래? 너, 내가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그래?”
“떨어지면 어쩔 수 없죠.”
“흐음… 인간성은 어때?”
“원래 4년제 대학 다니다가 돈 벌려고 알바 뛰고 있었어요. 지금은 놀이공원에서 숙식하면서 알바 하는데 진짜 성실한 건 보장합니다. 정말 열심히 사는 애예요.”
“그래? 그럼 한번 데리고 와 봐. 그런데 당장 처음부터 많은 급여를 줄 수는 없어. 최소 3개월은 수습으로 하는 거 봐서 정직원으로 고용할지 생각해볼 거야.”
“어? 저 때는 그런 거 없었잖아요?”
“그 때랑 지금은 다르지. 이제 회사도 커지고 관리해야 할 사람도 많아졌잖아. 그리고 너는 내가 다이렉트로 관리할 수 있었기도 하고. 사람 잘못 들이면 회사가 흔들리는데 아무나 들일 수는 없지. 그 부분 동의하면 데리고 와 봐.”
“알겠습니다. 사실 요즘 수습기간 없는 회사 없으니까 이해할 겁니다.”
“그래. 올 때 미리 내 스케줄 확인하고 불러라.”
“걱정하지 마십쇼.”
친구와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지 실실 쪼개며 나가던 경수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 멈칫했다.
“어? 작가님!”
“경수 씨, 오랜만이네? 전보다 살이 쏙 빠졌는데? 고생 좀 했나봐?”
윤해연 작가 목소리였다. 얼른 나가보니 휴양지에서나 쓸 법한 모자를 쓰고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오셨어요? 여행은 어떠셨어요?”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받아들며 묻자 그녀는 쇼파에 털썩 앉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휴, 말도 마.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그런데 이건 뭐예요?”
“우리 김 대표랑 회사 식구들 먹으라고 태국에서 파는 과자랑 향수 몇 개 골랐어. 김 대표는 향수 안 뿌리잖아. 좀 뿌리고 다니라고. 그래야 여자친구도 만들지. 이제 장가 갈 때 되지 않았어?”
“하하하! 이렇게 또 챙겨주시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냄새 맡아봐. 잘 어울릴 거야.”
잘 싸여진 포장을 뜯고 빈 휴지에 뿌려 맡아보니 시원하면서 깔끔한 향이 풍긴다.
“좋네요. 딱 제 스타일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이거 뿌리고 여자 좀 사겨. 삼십대 중반인데 여자도 없이 그러고 다니면 못나 보여.”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제가 여자 없을 것 같으세요?”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은하랑 윤 작가랑 친한 줄 알았는데 아직 말을 안 했나보다. 하긴, 전화 꺼놓고 여행 다니던 양반이니 연락하고 싶어도 못 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 전에도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 곤란해 했을 수도 있겠고.
“크흠… 그건 제가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어? 뭐야, 뭐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 달려들었지만 혹여 주위에 듣는 귀가 있을까봐 서둘러 얼버무렸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둘만 있을 때.”
“흐음… 알았어. 진짜 말해주는 거다? 나 궁금한 거 못 참는데, 말 안 해주면 진짜 섭섭해.”
“알았다니까요.”
“아, 그리고 오면서 기사 봤는데, 은하가 우리 회사로 왔다며? 그리고 이번에 김은선 작가 캐스팅 됐다던데? 내가 그거 보면서 우리 김 대표, 입이 귀에 걸리겠구나 생각했지.”
“뭐, 귀에 걸리긴 했습니다.”
“그런데 은하랑 사이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좋아졌어? 전에는 나한테 그냥 예전처럼 된 것 같다고만 하던데…”
“하하,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건 그렇고 차기작은 좀 구상 하셨어요? 이번에 ‘예종의 여인’ 대박나면서 회사 전화에 불난 거 알죠? 난리 났습니다. 당장 차기작 어디서 할 거냐고 말이에요. 지금 회당 6천을 먼저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시놉도 보기 전에 저러는데 진정시키느라고 혼났어요.”
“회당 6천? 정말?”
“지네가 먼저 6천 불렀으면 말하기에 따라 7천도 가능하다는 거 아시죠?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르신거라구요.”
“오호호호! 나 김 대표 덕분에 부자되겠네.”
“뭘 또 제 덕분입니까? 작가님께서 잘 쓰신 거죠. 어쨌거나 생각해 두신 거는 있으세요? 그냥 놀고만 오신 건 아니죠?”
은근히 기대하며 물어봤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건 어이없어하는 반응뿐이었다.
“김 대표, 나도 좀 놀자. 나 놀러가기 전에 하루에 두 시간씩 밖에 못 잤어. 오죽하면 의사가 제발 좀 쉬라더라구. 이러다 병 걸린대. 늙은이를 그렇게 부려먹고 싶어?”
“흠흠… 늙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으신 거 아닙니까?”
“일찍 결혼한 내 친구는 벌써 애가 결혼 날짜 잡았대. 이거 완전 할머니 된 거지. 어쨌든 아직 차기작 이야기는 꺼내지 마. 난 더 쉬고 싶단 말이야.”
“알겠습니다. 큼… 그런데 말이죠.”
“응? 뭐가?”
“이번에 은하가 김은선 작가 차기작에 들어가면서 조금 이상하다고 하더라구요.”
“뭐가 이상해?”
“이건 그냥 은하의 전적인 느낌일 뿐이지만 김은선 작가가 저 때문에 은하를 캐스팅했다면서… 뭐,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당연히 아니라고 했지만 글쎄 은하는 무조건 자기 말이 맞다는 거예요.”
윤 작가의 표정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대?”
“제가 김은선 작가 차기작을 조금 손봐줬거든요.”
“뭐? 김 대표가 왜 김 작가 시놉을 손 봐줬어?”
“그냥 한번 봐달라고 해서 한번 봐줬죠. 그러면 은하가 캐스팅 될 수도 있으니까… 여튼 그래서 은하는 그렇게 느꼈나봐요.”
“으음… 뭔가 기분이 좀 나쁜데? 김 대표는 막 아무나 도와 달라면 도와 주나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세하게 봐주지도 않았어요. 우리 식구도 아닌데… 그렇잖아요?”
“그렇지? 만약 김은선 작가가 우리 회사로 들어오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안 되죠.”
펄쩍 뛰면서 거부하니 그제야 윤 작가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아니야, 꼭 거부할 필요가 있겠어?”
“에이, 우리는 윤 작가님이 계신데 더 이상 드라마 작가는 필요 없죠. 오랜만에 오셨는데 우리 회에다 소주 한잔 할까요? 얼큰한 매운탕에다가…”
“좋지! 나 밖에서 한국 음식 너무 그리웠잖아. 매운탕 좋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돌면서 차기작으로 생각한 게 있긴 한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