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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이루고 싶었던 것(2)
속으로는 오늘 카메라맨이 따라오지 않은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니, 그랬다면 김은선 작가가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려나?
“아, 그거야 작가님 다음 작품에 캐스팅할 배우를 염두에 두고 만나자고 하신 거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아직 누구를 마음속에 두고 있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머릿속에 차기작에 대한 생각은 어느 정도 섰다는 말일 거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차기작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했겠지.
“그럼…?”
“소식 들었어요. 엎어졌던 시나리오 일으켜 세웠다면서요?”
“아, 그랬죠. 워낙 좋은 시나리오라 저보다 다른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돌아가신 감독님의 아내분도 좋은 결정 해주신 거구요.”
“그거 저도 알아요. 예전에 봤었거든요.”
“보셨다구요? 영화 시나리오를요?”
“네, 제작사 측에서 지금 돌고 있는 시나리오라고 하나 보여줬거든요. 참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 그러셨어요.”
“저도 신인이던 시절에 엎어졌던 시놉이 있었어요. 지금이야 무슨 내용을 쓰건… 아니, 시놉을 보지도 않고 편성을 받아놓고 시작하지만 그 때는 그랬죠.”
“아…”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추임새를 넣었다. 도대체 이 아줌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드리는지 알 수 없어서다.
“생각해 놓은 시놉은 있는데 이상하게 오래 전에 엎어졌던 그것도 계속 신경이 쓰여요.”
“그럼 하시면 되겠네요. 10년 전에 묵혀놨던 거라도 얼씨구나 받아들일 텐데…”
그녀는 나직이 숨을 내쉬더니 드디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 윤해연 작가가 대표님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 시청률을 엄청나게 뽑아내고 있죠? 처음에는 윤 작가가 저런 면이 있구나 했는데, 들리는 소문에 윤 작가가 김 대표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런데 작가님 정도 되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위치가 아니신데요? 그럴 실력도 아니시고.”
“칭찬 고맙네요. 그래요.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게 웃기긴 하죠. 쪽팔리기도 하고…”
그녀는 말과는 달리 전혀 부끄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죠. 당연히…”
“그런데 궁금하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도움을 주셨길래 윤 작가가 그런 마법을 부렸을까?”
“그럼 제가 어떻게 도와주기를 원하시죠?”
“예전에 엎어졌던 그 시놉시스. 한번 봐줄래요?”
이 능구렁이 같은 아줌마. 이리저리 빙빙 돌렸지만 결국 자신이 궁금해서 나왔다는 거다. 아마 전에 엎어졌다는 그 시놉은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대충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죄송하지만 그냥 제 의견을 더해줬을 뿐이지 본래 윤 작가님의 실력입니다.”
“알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윤 작가 솜씨라는 거. 그런데 그 의견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궁금한 거예요, 나는.”
마치 맡겨놓고 찾으러 온 듯한 태도에 살짝 빈정이 상했다.
“제가 왜 그걸 알려드려야 합니까? 이건 제 나름대로의 영업비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흠… 좋아요. 다음 여주인공, 대표님이 원하시는 분으로 쓸게요.”
이런 대박이 있나! 순간적으로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시놉은 나왔습니까?”
“아직 안 나왔지만 대강 구성중이긴 해요.”
“지나랑 은하 중에 누가 더 마음에 드세요?”
“아하하! 김 대표님 진짜 추진력 있으시다. 너무 대놓고 들이대는 거 아니에요?”
“이건 서로간의 합리적인 거래 아닙니까? 일단 저희 소속 친구들이라 제가 누구 하나를 밀어주기 힘들어요. 그래서 작가님에게 맡기려는 겁니다.”
“그래야 화살이 나한테 돌아오니까 말이죠?”
당연하지. 안 된 친구에게 해줄 말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하하, 뭐 그런 거죠.”
“유은하로 하죠. 전에 같이 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만나네요. 난 은하 표정이 좋더라. 예쁘면서 도도해. 또 그러면서도 밉지가 않아. 참 그러기 쉽지 않은데… 어쨌든 나는 하나 줬어요.”
“좋습니다. 시놉 건네주시면 제 의견 적어서 보내드릴게요.”
“그럼, 메일 주소 적어주세요.”
그녀는 백에서 아기곰이 그려진 아주 귀여운 수첩과 명품 몽블랭 펜을 하나 내밀었다. 주소를 적어주자 그녀는 그 주소를 외우려는 듯이 한참 바라보았다.
“수첩이랑 펜이 잘 어울리네요.”
“지금 놀리는 거죠?”
“아뇨, 아뇨. 제 스타일입니다.”
“으흠… 그 스타일 마음에 드네요. 후훗! 그럼 일어날까요?”
“네, 그러시죠.”
“혹시 간장게장 좋아해요?”
가게에서 나와 이제 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그녀가 뜬금없이 묻는다. 시간도 어설프게 저녁 5시인데 저렇게 물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서라면 설사 점심을 두 번 먹더라도 해야만 한다.
“아이고, 없어서 못 먹죠.”
“그럼 가요. 내가 여기서 간장게장 기가 막히게 하는 곳 알거든요. 오늘 제가 만나자고 했으니 제가 쏠게요.”
조금 제멋대로인 듯해 보이지만 사람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이거 작가님한테 얻어먹으면 다른 사람들이 욕하는 거 아닙니까? 사도 제가 사야죠.”
“얻어먹는 게 더 맛있긴 하지만 원래 먼저 먹자고 하는 사람이 내는 거예요.”
그렇게 그녀를 따라 삼청동의 한 음식점에서 배터지게 간장게장을 먹었다. 그녀는 먹을 때 돈 계산하고 먹는 게 가장 싫다며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했고 아마 못해도 식사비만 20만 원이 넘게 나왔을 거다.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저 역시 작가님 작품이 언제 기사가 뜨나 눈 크게 뜨고 인터넷만 보고 있겠습니다.”
“흐음… 그럴 필요 없는데… 어쨌든 알았어요.”
생각보다 오늘의 만남이 큰 성과가 있었다. 오로지 김은선 작가의 궁금함 때문에 일이 잘 풀린 것인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과정이야 어쨌든 당장 오피스텔로 돌아가며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내가 오늘 누구 만났는지 알아?”
“뭐야, 그 기대에 들뜬 목소리? 호오…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 할 정도면 분명 나와 관련된 이야기겠지? 얼마 전에 작품 구해달라고 떼를 썼으니 혹시 작가라도 만났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
“너 배우 하지 말고 사설 탐정하는 거 어때?”
“아쉽게도 내 어릴 적 꿈이 명탐정 코난처럼 탐정이었거든.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설 탐정이 법으로 금지됐잖아. 안타까워. 내 추리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니 말이야.”
“그래, 안타깝네. 어쨌든 작가는 맞다.”
“후훗! 역시 우리 오빠가 일은 참 빨라. 나는 최소한 몇 달은 걸려야 할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누굴 만났다고 곧바로 나한테 전화할 정도면 굳이 시놉을 평가할 필요가 없는 작가일 테고… 혹시 김은선 작가야?”
“헐…”
“크크큭… 좋아. 아주 좋아. 김우현 짱이다!”
“그냥 김은선 만나고 왔는데 뭘 그렇게 좋아해?”
“설마 그냥 ‘나 김은선 작가 만나고 왔어. 짱이지?’ 이딴 소리하려고 전화했겠어? 분명 캐스팅 이야기까지 됐겠지. 맞지? 내 말이 맞지?”
평소 저렇게까지 들뜨지 않는데 아주 신나서 열변을 토한다.
“그래, 맞다. 아직 네 말대로 시놉을 본 건 아니야. 아직 시놉이 나오지도 않았대.”
“구상중인 거야?”
“그렇다네. 그런데 일단 여주로 너는 확정 받았어.”
“오오… 어떻게? 지나 씨도 오빠가 김은선 작가 만난 거 알면 분명 원했을 텐데? 나중에 원망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물어봤지. 지나랑 너 중에 누구를 하겠냐고.”
“둘 중에? 왜? 김은선 작가가 왜 둘 중에 하나를 꼽아? 둘 중에 하나를 꼽으라 했다고 진짜 꼽았어? 그 자존심 센 양반이?”
“흐흐흐, 오빠가 이 정도야.”
“헐… 사랑해.”
“아하하하! 어쨌든 선택은 김은선 작가가 했어. 만약 김은선 작가가 너 말고 지나랑 하겠다고 했으면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칫,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긴 하겠지만… 쪼끔 서운할 뻔했다.”
“마찬가지로 지나도 이 소식 들으면 조금 서운하겠지. 다른 작품 좋은 걸로 찾아봐줘야겠어.”
“이번에 액션영화 찍은 거 내일 언론시사회라며? 잘 나왔대? 그거 언니 원톱 영화잖아.”
그래도 한 식구 됐다고 씨가 아니라 언니라고 붙여준다.
“들리는 말로는 괜찮다고 하던데? 뭐, 나와 봐야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너 VIP시사회 때 나와라.”
“당연하지.”
그렇게 희희낙락하며 오피스텔로 돌아와 씻고 맥주 한 캔을 따 컴퓨터 앞에 앉으니 벌써 그의 메일 우편함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빠르기도 하셔라. 성격은 참 급하시네.”
김은선 작가가 성격이 급하다며 뭐라 했지만 솔직히 자신도 내용이 궁금해 그 좋아하는 TV도 틀지 않고 컴퓨터에 앉았기에 조금 민망하긴 했다.
“어디보자… 제목도 안 적어 놨네? 엎어졌었다면서 제목도 없어?”
파일이름도 그냥 별 의미 없는 ‘김은선 시놉’이었고 파일을 열었을 때도 상단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러니까 괜히 더 궁금해져 바로 읽어나갔다.
내용은, 행복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자가 암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남은 여자는 슬픔에 못 이겨 폐인 같은 생활을 하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여기까지는 흔한 패턴인데…”
당연히 죽기 1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여자는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그의 병을 미리 예방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은 원래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던가? 본래 둘은 서로 스터디 공부를 하며 여주인공의 도도함에 남주인공이 끌려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과거로 온 여주는 그가 이번에도 자신을 좋아해줄 줄 알고 대뜸 들이대기 시작하니 남주로서는 여자가 다른 사람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그렇게 과거 부부였던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엇갈리게 되고 서로는 각기 다른 짝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로맨스 물이다.
“재밌네.”
A4용지 4페이지 분량의 짧은 시놉이지만 순식간에 읽었다. 부부였던 이들을 다시 엮어주는 패턴이 뻔한데 그 기대를 비틀어가면서도 흡입력을 잃지 않는다.
특히 나중에 보면 부부였던 남주와 여주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상대역이 되는 인물들까지도 상당히 매력이 있다.
이건 김은선 작가만의 능력인데 남주와 여주 말고도 서브남주와 여주를 참 매력 있게 그린다는 거다.
“흐음… 진짜 초창기 작품이라 그런가?”
문제가 있다면 김은선 작가 특유의 발랄함이 없다는 거? 그녀의 대사들이야 언제나 기가 막히지만 언제 어느 때든 항상 가벼움을 잃지 않는다는 게 장점인데 이 작품은 조금 무겁다.
아직 대본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 분위기대로 가면 그녀의 색깔과는 조금 다른 작품이 될 거다. 뭐, 시청률이야 언제나 빵빵하게 나오겠지만 그녀가 조금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조금 부족하다 싶은 부분들을 지적해서 메일을 보내고 나니 살짝 불안해진다. 설마 이걸 차기작으로 꺼내지는 않겠지?
처음에 부부였던 이들이 끝에 다른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면 이건 지금까지 있었던 드라마의 공식을 파괴한 거나 다름없다. 일종의 실험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