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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이루고 싶었던 것(1)
쇼박수의 참여로 ‘28시간’의 투자가 완료되고 나니 본격적으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그간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최 감독은 시나리오에 살을 갖다 붙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가 작업실에 처박혀 있던 사이 최윤석 대표는 촬영에 들어갈 스탭진을 구성했다.
촬영부터 특수효과까지 나름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 사람들만 모았다. 당연히 많은 비용이 들어갈 테지만 최윤석 대표는 반드시 흥행할 거라 믿었기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첫 촬영을 앞두고 고사를 지냈다. 촬영장소로 대여한 한 건물 안쪽에 돼지머리와 각종 과일을 올려놓고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떼지어 섰다.
“요즘에 이런 거 잘 안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큰 작품이 들어가니 괜히 마음이 쫄려서 안 할 수가 없네요.”
최 대표는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듯이 말했다.
“하하하!”
“이런 거 안 하면 촬영할 때 사고 나요. 잘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신 김우현 대표부터 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작품에 들어가며 고사는 몇 번 지내봤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렇게 첫 번째로 절하게 되자 느낌이 묘했다.
특이 이번에는 자신의 뒤로 카메라 한 대가 열심히 찍어대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마 주변 사람들도 카메라를 의식할 게 분명하다.
“부디 우리 영화 꼭 대박 나게 해주십쇼!”
엎드려 절하고 나서 품에서 미리 준비한 수표 세 장을 꺼내 돼지머리의 입에 꽂았다.
“어엇! 백만 원짜리 수표 세장 입니다! 자, 이걸로 삼백만 관객 확보!”
스태프 중 하나가 신나게 외치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제가 첫 타자로 삼백만 확보 했으니 나머지 분들 합쳐서 칠백만 관객 모아 주십쇼!”
그렇게 첫 스타트를 끊고 일어났다.
“아이고 내사 큰일 났구만. 꼴랑 십만 관객 준비했네.”
“난 그래도 삼십만 관객 준비했지.”
“막내들은 무리하지 말고 오만 관객 이하로만 해!”
스태프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이 최 대표가 다음 타자를 소개했다.
“자, 다음은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 조상우 배우님!”
조상우는 신발을 벗고 자리에 올라서며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여기 최 대표님께서 큰 실수를 하셨는데 앞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배우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면 나 오만 원짜리 한 장 내고 나갈랍니다.”
“하하하!”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자, 대한민국 최고 미남배우인 조상우 배우님!”
그제야 만족한 웃음을 보인 조상우는 절하고 난 뒤 돼지머리 입에 수표 한 장을 꽂으며 말했다.
“내가 더 할 수 있는데 차마 우리 김 대표님 체면에 금이 갈까 백만 관객만 동원하겠습니다.”
“에이…”
“약하다, 약해.”
“하하하!”
그렇게 화기애애한 고사 자리가 끝나고 모두 회식장소로 이동해 고기파티를 벌였다.
“벌써 가시게요? 조금 더 먹고 가시지…”
“나 일 있다. 얼른 들어가 봐야 해. 상준이 네가 최 대표님한테 나 급한 일 있어서 먼저 들어갔다고 잘 말씀드려.”
“직접 하시지…”
“지금 거하게 술 들어갔는데 내가 간다고 하면 ‘그럼 언능 가소’ 하겠냐?”
우현은 별이와 함께 자리를 지키다 별이 매니저인 상준에게 그녀를 맡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역시나 그의 뒤로 카메라 한 대가 따라붙었다.
“그렇게 계속 카메라 들고 다니려면 힘들겠어요.”
“일이니까요.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어제 장승효 연출에게 들은 이번 다큐의 이름이 ‘성공한 사람들 ; 연예계 미다스의 손’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어차피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고, 쪽팔리게 대낮부터 대리기사 불렀네.”
회사에 도착했는데도 쉽사리 술이 깨지 않아 잠시 눈을 붙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세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술은 깼지만 몸이 찌뿌둥한 게 그냥 오피스텔에 들어가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에휴, 일어나야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안무실로 향했다. 오늘 경수에게 데뷔 테스트를 본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 시간 맞춰 일어난 게 다행이다. 뭐, 늦었다면 경수가 뛰어올라 왔을 테지만.
“오셨습니까?”
자기가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경수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눈동자가 우현의 뒤에 따라붙는 카메라를 스쳐 지나간 것도 알고 있다.
“네가 시험 보냐? 왜 쫄고 있어?”
“제 새끼들 시험 보는데 당연하죠. 어쨌든 잘 좀 봐주세요.”
“실력이 있으면 되는 거지, 잘 봐주기는…”
“헤헤, 그래두요.”
경수를 지나쳐 안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섯 명의 소녀들이 저마다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우현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응, 모두 연습하느라 고생 많았지? 알고 있어. 그래도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건 없으니까 너무 처지지 말자.”
“네.”
그녀들은 이미 데뷔준비 오디션 다큐를 한번 찍어봤기에 우현의 뒤에 있는 카메라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럼 이번 데뷔할 노래 불러볼까? 반주 소리 줄이고 해보자.”
다들 마이크를 끼고 부르는 것이 아니기에 반주소리를 줄였다.
그녀들은 이미 준비한 안무대형으로 서서 서로간의 눈을 맞추고 음악을 기다렸다. 이윽고 강렬한 템포의 반주가 시작됐다.
쿵!쿵!쿵!쿵!
시작부분에서는 현수가 가장 앞에서 그 특유의 매력 있는 음색으로 인트로를 시작한다. 음색 덕에 시작부터 확실하게 무대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메인보컬인 강미래의 파워풀한 보컬은 이미 선배인 기존 여아이돌들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정도다.
곡이 여느 여아이돌들의 데뷔곡 같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노래가 아니라 파워풀한 곡이기에 다른 팀들처럼 군무의 비중은 낮은 편이다. 예쁘기 보다는 멋있는 군무로 이루어져있고 중간에 민지아의 화려한 독무 파트도 있어 계속적으로 눈길을 사로잡아 두기에 아주 좋다.
그리고 동경하는 래퍼 ‘타잔’에게 쓴소리를 들은 양지현은 절치부심하여 연습에 매진했는지 발성도 더 좋아지고 여유로움도 묻어났다. 가장 실력이 좋아진 친구는 한미소였다. 예쁜 얼굴로 센터를 꿰찼으나 다른 멤버들의 실력이 워낙 월등해 부족해 보였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파트에도 센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일 만큼 보컬과 댄스 실력이 늘어 우현을 흡족하게 했다.
다큐 장 피디에게 파이브 걸즈의 데뷔곡과 안무는 편집을 부탁했다. 먼저 유출되면 곤란하니까.
“수고했어요. 그리고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대표실로 올라오자 잠시 카메라맨에게 촬영을 꺼달라고 부탁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회사 기밀일 수 있기에 양해를 구한 거다.
“어떻습니까?”
“괜찮네.”
“네? 그러면…”
“그래, 데뷔 준비해보자. 일단 홍보, 마케팅팀이랑 상의해서 노래에 맞는 컨셉 정하고 뮤직비디오 찍을 거니까 감독이랑 업체 리스트 뽑아서 가지고 와. 홍보팀에서 인력 부족하다 싶으면 외주업체 정해줄 거니까 그것도 가지고 오고.”
“어? 뮤직비디오 찍습니까? 디지털 싱글인데두요?”
뮤직비디오를 찍는 경우와 아닌 경우의 비용 차이는 억대가 넘어간다.
“인마, 유니 같은 경우야 처음 데뷔할 때 드라마 OST로 시작했으니까 굳이 뮤직비디오를 찍을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얘들은 달라. 여아이돌이고 이미 TV에 얼굴까지 팔렸는데 당연히 방송사에서 밀어주려고 하겠지. 특히나 다큐 찍어준 m.met 같은 경우는 더. 그런데 뮤직 비디오가 없으면 어떻게 밀어 주냐? 뭐가 있어야 틀어줄 거 아냐?”
“그럼 비용이 엄청나게 들겠네요.”
“내가 그래서 아이돌 생각 안 했던 거야. 하지만 어쩌겠어? 이왕 시작했으니 확실하게 밀어줘야지.”
“하하하! 감사합니다!”
“너는 이제부터 방송국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음악프로 피디들한테 잘 보여야 할 거야, 알지? 걔네들 어깨에 뽕 무지하게 들어간 거. 드라마 피디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손바닥 비비는 건 자신 있습니다.”
“그래, 리스트는 최대한 빨리 올려. 그래야 빨리 진행하니까.”
“넵!”
이미 준비되어 있는 친구들이었기에 생각보다 빨리 데뷔하게 돼서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데뷔하기에 충분한 것 같으니 더 늦출 수는 없다. 괜히 이것저것 재보다가 조금이나마 생긴 팬덤이 흩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럼 나 나갔다 올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어? 오늘 또 스케줄 있으십니까?”
평소 자신에게 어떤 스케줄이 있는지 민주와 경수에게 이야기한다. 그래야 일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인데 물론 자신이 없는 시간에 농땡이 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어, 김은선 작가랑 약속 생겼거든. 만나러 가야 해.”
“헐… 김은선 작가 말입니까? 대박… 다음 차기작 결정 난 거예요?”
“아니, 그냥 한번 보자고 했어. 안 될 줄 알았는데 보자네.”
사실 연락처도 모르고 물어물어 그냥 만나서 식사나 하자고 전달 부탁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어제 밤에 연락이 왔다.
혹시나 해서 차기작을 생각해둔 게 있는지 물었더니 그런 건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만나자고 했다는 건 아직 시놉시스는 만들지 않았더라도 대략 머릿속에 구성하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혹시… 이번에 우리 회사 배우가 김은선 작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네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김은선 머릿속에 누가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사무실을 나와 삼청동의 한 분위기 좋은 와플가게로 향했다. 대략 1시간을 운전에서 근처에 어렵게 주차하고 도착하니 약속시간에서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고, 늦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도착해서 아이스크림 와플을 한 입 먹고 있었다.
“아, 김 대표님? 화면보다 실물이 낫다. 어서 앉아요.”
그녀와 수많은 접촉 시도를 했었지만 이제야 와서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 가수들 나오는 오디션 예능 말씀하시는 거죠? 민망하기도 하고 작가님께서 보셨다니까 영광스럽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거 첫 만남부터 실례하게 됐습니다.”
“괜찮아요. 여기 주차하기 힘들죠? 이 동네가 원래 그런데, 그래도 난 여기가 좋더라. 얼른 와서 먹어요. 이 집 맛있어요.”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와플을 다 먹을 때까지 음식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작품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꺼낼 수는 없기에 그녀의 입에서 얼른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예전에 한번 만날 뻔했었는데 알아요?”
아이스크림 와플을 다 먹어갈 때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런가요? 으음… 예전에 은하를 데리고 작가님 작품에 꽂아달라고 한창 쫓아다닐 때였던 건가요?”
“맞아요. 사실 난 그 때 은하 씨를 캐스팅하려고 했었어요.”
느낌 좋은데?
“아아… 아쉽네요.”
“거짓말.”
“네?”
“내 거 까이고 선택한 영화, 그거 천만 넘었잖아요.”
“하하하! 그렇다고 작가님 드라마를 놓친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 영화는 블록버스터였고 사실상 남자주인공이 이끌고 간 영화였잖습니까?”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좋아요. 오늘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