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187화 (18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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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달리는 말에 올라타라(7)

[신당역 1번 출구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첫 번째 큰 골목에서 우회전, 직진하다 왼쪽 중국집 만리장성끼고 좌회전하면 우측 세 번째 붉은 벽돌로 된 빌라가 보일거야. 바로 그 집으로 가.]

이게 휴지에 쓰여진 내용이었다.

“이게 뭐죠?”

어리둥절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냥 읽으면 돼.”

석호 옆에 앉아 있던 소연도 뭔가 해서 우현이 건네준 휴지를 슬쩍 보았다. 그리고는 그 휴지를 낚아채고 빠르게 읽어 내렸다.

“이거 대본이죠?”

“대본 아닙니다. 그냥 제가 생각나는 대로 끄적인 거니까.”

“그러니까, 이거 대본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라는 거잖아요? 왜 노래를 부르게 안 하고 이걸 읽어보라고 해요?”

아무래도 소연을 설득시키지 않고서는 진행하기 힘들 것 같아 그냥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소연 씨, 저 자선사업가 아닙니다. 돈이 안 되는 사람은 키울 수가 없어요. 반대로 말하면 돈이 될 것 같고, 스타의 자질이 보이면 당연히 키우고 싶겠죠? 그런데 회사 여건 상 남자가수까지 케어할 수는 없어요. 인력도 부족하고, 아직 데뷔도 안 한 파이브 걸즈 띄우기도 벅차거든요.”

“그래서 아예 노래도 안 듣겠다는 거예요?”

“노래를 봐서 잘 하면? 어차피 우리 회사에서는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데, 결국 다른 데로 가라는 말밖에 안 되잖아요? 얼마 전에 기획사에서 나왔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 테니 그것도 말이 안 되고.

단순히 석호 이 친구의 재능만 보려고 했으면 이 동네에 널리고 널린 보컬트레이너 여러 명 찾아갔겠죠? 소연 씨가 나한테까지 온 건 결국 내가 석호 이 친구 봐주길 원하는 거 아닙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소연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답했다.

“맞아요. 난 대표님이 이 아이를 키워줬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물론 재능이 있다는 전제 하에요. 재능이 없다면 굳이 맡기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결론은 하나군요. 나는 노래 잘하는 남자 가수는 필요 없어요. 설령 재능이 있다고 해도 ‘너는 재능이 있으니까 다른 기획사 잘 찾아봐라’ 정도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거든요. 하지만 가수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죠.”

“그래서 이걸 읽어보라고 한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 아이가 말을 좀 더듬어요. 물론 아주 심하게 더듬는 건 아니지만 연기를 하기엔 부족하다구요.”

“보셨어요? 연기하는 거?”

“네?”

그녀는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석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연기를 해봤겠는가? 석호 역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노래할 때는 더듬지 않는다고 했죠? 저는 정신분석 이런 쪽은 잘 몰라요. 그런데 노래할 때 더듬지 않는다면 연기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노래도 가사가 있고, 연기도 전부 대본이 나와 있는 거니까.”

그리고 처음 석호를 볼 때 느꼈던 묘하게 신경 쓰이게 하는 그것…

“그러니까 그거 한번 읽어 볼래요? 긴장되면 외울 수 있는 시간도 줄게요. 아니면 내가 잠깐 나가 있을까요?”

“아, 아닙니다.”

“그럼 5분 시간 줄게요.”

느긋하게 라떼를 마시며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려는데 석호가 다급하게 불렀다.

“저, 저기…”

“네?”

“이게 어, 어떤 상황인 거죠?”

웃음이 나온다. 느낌을 알고 싶다는 건데… 진짜 대본처럼 읽으려고 해?

“읽어보니까 어떤 상황 같아요?”

“…”

석호가 소연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젓고는 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왕 이렇게 되니 믿어보겠다는 거다.

“연기는 자신의 느낌이 가장 중요해요. 대본에서 그걸 읽어내는 것도 능력이죠. 그리고 이건 비교적 쉬운 편인데?”

“아, 알겠습니다.”

석호는 그 휴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집중하는 눈빛이 아주 좋다. 저 눈빛으로 여배우를 바라본다면?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애초부터 그의 연기를 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 남자아이돌을 꿈꿔왔던 그였는데 언감생심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나와 주니 제법 흥미가 돈다.

시원한 라떼를 마시며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다 보니 5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준비됐으면 읽어봐요.”

“후우…”

석호가 크게 숨을 내쉬는데 소연이 그보다 더 긴장한 듯 두 손을 꼭 쥐고 그의 손에 들린 휴지를 바라보았다. 차마 석호가 긴장할까봐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것이다.

“신당역 1번 출구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첫 번째 큰 골목에서 우회전, 직진하다 왼쪽 중국집 만리장성끼고 좌회전하면 우측 세 번째 붉은 벽돌로 된 빌라가 보일거야. 바로 그 집으로 가.”

비교적 담담하게 읽어 내렸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은 분명 살아있었다. 어떤 상황을 가정하고 읽어 내린 게 분명하다.

소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대사를 외운 석호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 안 더듬고 말할 수 있어?”

“어… 이것도 노, 노래하는 것처럼…”

대강 노래하는 느낌을 가지고 대사를 읽어 내렸다는 건데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음률을 타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모양이다.

“잘하네.”

생각보다 잘 읽어 내렸다. 더듬지도 않았고 그 안의 긴장감도 나름 잘 살렸다. 하지만 가장 큰 수확은 왜 그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알았다는 거다.

곱상한 생김새와는 달리 목소리에 울림이 있다. 주변인들을 모두 집중시킬 만큼 매력적인 울림이다. 지금까지 더듬거리는 것 때문에 주변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제대로 대사를 치니 확연해졌다.

목소리는 가수에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배우에게도 중요하다. 단어 하나를 말해도, 문장 하나를 말해도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울림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건 특히 남배우에게 중요하다. 여배우는 기본적으로 연기가 조금 부족해도, 목소리가 앵앵거려도 스타가 될 수 있지만 남배우는 목소리에 힘이 없이는 스타가 되기 힘들다.

소연은 그가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다는 것에 기뻐했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느끼게 될 거다.

그리고 이런 울림을 가지고 있었기에 노래를 불러도 깊은 인상을 주었을 거다.

“정말 생각보다 잘하네. 이모는 네가 이렇게 잘 할지 몰랐어.”

“저, 정말요?”

소연은 석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소 얼음 같던 그녀의 모습과 많이 대비되었다.

“노래는 안 들어봐도 알겠네.”

“그럼 우리 석호 데려가실 거예요?”

남들 같으면 슬슬 눈치 보며 계약 얘기를 꺼낼 테지만 그녀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그럽시다.”

이번에는 그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이 자리에서 바로 콜을 외칠지 몰랐던 거다.

“의외네요. 판단이 정확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거든요.”

“남자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지금까지는 이게 중요하다 말할 수 있었는데 왠지 대표님 앞이니까 제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아 꺼내지 못하겠네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눈빛과 목소리, 이거 거든요. 눈빛 좋고 목소리 좋으니 계약 하자는 겁니다.”

소연은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석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긴, 그 두 개에 모든 게 담겨있긴 하죠. 난 네가 가수가 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모랑 같이 일하게 생겼네. 대신 이 일 아주 힘들 거야. 할 수 있겠어?”

“네.”

“나중에 힘들다고 술 마시고 늦게 다니거나 여자나 후리고 다니면 이모한테 혼날 줄 알아, 알겠어?”

“아, 안 그래요.”

“제일 조심해야 할 게 뭐다?”

“여자.”

“그렇지. 명심해.”

둘이 말하는 것만 봐도 소연이 그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 만하다. 하긴, 저 얼굴에 저 목소리로 연기하면 앞으로 여자들이 줄을 잇게 될 거다. 그럼 소연이 우려 할 만큼 많은 유혹이 있겠지. 그걸 이겨내는 친구도 있고 오히려 즐기며 사는 친구도 있다.

지금이야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지만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일. 그래도 진중한 눈빛을 보니 다소 마음이 놓이긴 한다.

“늦었으니까 이만 가 봐요. 지금 출발해도 콜타임 전에 도착하기 빡빡할 텐데.”

“계약은 언제 할 거예요?”

“미성년자니까 석호 어머니 모시고 회사로 와요, 물론 내가 있을 때. 이제 계약할 거니까 말 놓을게. 그래도 되지?”

“네, 네.”

“가수 할 생각하다가 갑자기 연기자로 전향을 한다니까 헷갈릴 텐데 충분히 생각하고 와. 정말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서 결정하면 전화해. 그러니 어머니 모시고 온다고 서두를 필요 없어.”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날게요. 석호는 집에 어떻게 가지?”

“내 차로 데려다 주면 돼요.”

그녀는 뭐가 됐든 조카가 우현의 회사와 계약하게 된 것에 만족했는지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라졌다.

“커피 맛있네.”

금방 나가려다가 탁자 위에 놓인 휴지를 보며 잠시 의자에 앉아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회사로 가서 노래 한번 들어보는 건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상하게 아까는 그를 그 자리에 앉혀서 저것을 읽어보게 하고 싶었다. 꼭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 그가 자신에게 인사를 할 때부터 자신은 그를 가수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런 억지를 부렸던 건 걸까?

그 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타이거 스튜디오’ 최윤석 대표.

“김 대표, 나예요. 지금 시간 되죠?”

“네. 무슨 일 있어요?”

“우리 투자 마무리 되겠어요. 쇼박수서 소액투자자 제외한 30억 투자하겠다고 연락 왔거든요.”

“그래요? 잘 됐네요.”

공연영화 전문 투자사이자 대형투자자인 쇼박수에서 결정했다고 하면 이제 더 이상 투자자에 목 멜 필요가 없다. 백억 모두 확정 받고 부족한 부분은 소액투자자들의 투자를 받으면 후반기 작업 끝날 때까지는 걱정 없을 거다.

“그렇죠? 일단 그 쪽에 서류 보내놓긴 했지만 한참 걸려서야 답변이 올 줄 알았는데 대표님 회사가 유명해지면서 그쪽에서도 빠르게 결정이 난 것 같아요. 특히 삼전투신에서 50억과 유은하 씨의 20억이 이미 결정난 상황이다 보니까 그쪽에서도 위험부담은 많이 줄었을 테구요.”

“은하랑 계약 하셨어요?”

“네, 어제 저녁에 와서 후딱 계약하고 오늘 아침에 20억 확인했습니다. 정말 쿨하시던데요? 보통 몇 번에 걸쳐서 들어오는데.”

톱배우의 자존심인가? 하여간 말도 안 하고 혼자 가서 계약하다니 간도 크다.

“원래 그런 쪽으로는 화끈합니다.”

“그러게요. 정말 화끈하시더라구요, 하하하!”

“어쨌거나 분명 쇼박수에서 투자 들어온 거면 배급까지 할 거라고 주장할 텐데, 그 부분에서 손해 안 보게 조율이 잘 되면 앞으로 걱정할 게 없겠네요. 저 이제 ‘28시간’에서 손 떼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그렇죠. 배급 관련된 부분도 사전에 잘 조율했습니다. 이제 대표님은 이번 계약만 끝내면 손 떼십쇼. 앞으로 저희가 다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에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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