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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달리는 말에 올라타라(6)
“하여튼 전화로 말씀드리긴 어려우니까 만나서 이야기 하죠.”
너무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니 안 만나주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예, 그럽시다. 스케줄은 소연 씨 매니저랑 협의해서 잡을게요.”
“그러세요. 그럼 그 때 봬요.”
전화를 끊고 나니 곧바로 그녀 매니저의 번호가 찍혀왔다. 드라마 제작진에게 도움을 받아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걸 보니 단순 소개팅 따위는 아닌 것 같고.
전화를 거니 그녀의 매니저는 이미 소연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 바로 줄줄이 스케줄을 쏟아냈다.
“아무리 봐도 내일 점심 전 11시가 어떠십니까? 앞으로 줄줄이 촬영이고 전부 콜타임이 10시 전이라 그 전에 만나기에는 누나가 새벽 5시에 일어나도 힘드니까…”
강소연 원톱 드라마이기에 그녀의 촬영 스케줄은 헉 소리가 나올 만큼 어마어마하다. 때문에 마치 짜맞춘 것처럼 내일 당장 만나게 생겼다.
“그러시죠. 마침 저도 그 시간대에는 조금 한가하니까. 그럼 제가 현장 근처로 갈까요?”
“아닙니다. 다행히도 내일 현장이 강남이라 그냥 누나가 대표님 사무실 근처로 갈 수 있다고 하던데요.”
어째 갈수록 불안해진다. 부담되니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세요. 그럼 소연 씨한테 내일 그 때 만나자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수고하십쇼.”
꼭 돈 없는 사람한테 돈 빌려주러 가는 심정이 된 것 같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기분.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리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타난 이는 해외여행을 하며 쉬고 있던 유지나였다. 안 그래도 베이글의 대표주자였던 그녀는 보기 좋게 탄 피부로 인해 건강해보이기까지 했다.
“어? 언제 왔어?”
“방금요. 나가시는 거예요?”
“응, 마침 잘 됐네. 점심 안 먹었지? 진명이는?”
“진명 오빠는 밑에 있어요. 주차하고 있을 거예요.”
지나와 그녀의 매니저인 진명까지 데리고 근처 유명한 낙지볶음 가게로 향했다. 아까 기자 때문에 먹는 둥 마는 둥 했기에 스트레스도 풀 겸 매운 것이 먹고 싶어졌다.
“와… 이 매콤한 향… 너무 그리웠어요.”
“그러게 일찍 좀 들어오지.”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거고, 언제 이런 시간이 생길 줄 모르는데 일단 최선을 다해 쉬어야죠. 그래야 다음 작품 할 때도 힘이 나죠.”
“잘했다. 언론시사회 일정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럼요. 그러니까 들어왔지. 늦지 않게 오려고 가장 빠른 비행기편 구해서 왔어요. 지금 집에서 짐 풀고 바로 온 거예요.”
“편집 끝나고 들리는 말이 전부 생각보다 괜찮다는 이야기더라. 뭐, 언제나 그렇지만 일단 개봉을 해봐야 정확한 결과가 나오겠지.”
“정말 괜찮게 뽑혔대요?”
잔뜩 기대어린 그녀의 눈빛을 보니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를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렇지만 사실 어느 영화나 너무 이상하지만 않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잖아. 일단 언론시사회 대비해서 관리 좀 받아야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안 그래도 대표님하고 헤어지면 바로 피부과 가려고 했어요.”
“지금처럼 건강한 피부도 좋은데, 여배우는 뭐니 뭐니 해도 하얀 피부가 드레스도 잘 받고 하는 거 알지?”
“알죠. 제가 무슨 섹시컨셉 여가수도 아니고… 준비 잘 할게요.”
“이번 ‘붉은 여우’ 홍보에 집중하고 차기작 관련해서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자.”
“눈여겨 보는 작품이라도 있어요?”
“그게 없어. 너 소식 못 들었냐? 별이 주연 작품 찾으려다가 너무 없어서 아예 내가 영화 제작한다는 거?”
“아! 푸하하하! 나 그거 듣고 엄청 웃었잖아요. 어떻게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그거 사이즈가 좀 되어 보이던데?”
“긴 이야기니까 여기서 말하기에는 좀 그렇고, 하여튼 그거 투자 받는다고 등골이 휘겠어. 게다가 유은하 들어왔다는 말 들었지?”
“네. 걔 들어온다는 뉴스 보고 저 조금 불안해진 거 알아요?”
그럴 거다. 아무래도 주연급 여배우만 셋인 회사다 보니 원하는 작품이 겹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로 보면 유지나가 은하보다 나이가 많지만 인기는 은하가 훨씬 높기 때문에 그녀가 밀릴 거라고 생각할 것은 자명했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잘 조율할 테니까. 지금 은하한테도 작품 들어갈 거 없으니 놀고 있으라고 말해뒀어. 일단 별이 크랭크인 들어가야 나도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으니 말이야. 뭐, 그 때쯤이면 윤 작가님도 새 작품 시놉 들고 오지 않겠어? 게다가 슬슬 김은선 작가가 새 작품 이야기를 꺼낼 때도 됐고…”
사실 다른 작품들을 꾸준히 살피고 있지만 한쪽으로는 김은선 작가의 행방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하는 작품마다 대박을 치면서도 최소 일 년에 한편은 꼭 쓸 만큼 다작 능력까지 겸비한 그녀이다 보니 지금쯤 그녀의 차기작 소식이 들릴 때도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나 김은선 작가님 작품 진짜 하고 싶은데…”
대한민국 여배우 치고 김은선 작가 작품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단언컨대 단 한명도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만약 지나와 은하가 동시에 하겠다고 들이댄다면? 생각만 해도 암담하지만 뭐, 그거야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되겠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거나 너 놀리지 않고 작품하게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이번 영화 대박을 위해 달려보자.”
어차피 개봉 전에 대략 어떤 영화가 나올지 짐작이 가능하기에 이번 ‘붉은 여우’의 흥행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들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연배우로서 개봉 후 영화 홍보에 주력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괜히 시사회 전부터 대박이니 뭐니 해서 그녀의 마음이 풀어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후 투자자와의 전화와 미팅으로 하루를 보냈다. 투자는 은하의 이적 기사가 나간 후 너무도 쉽게 진행되어갔고 지금 이대로만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30억에 대한 투자계약도 완료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오전 일과를 빠르게 처리한 후 곧바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평일임에도 청담동의 한 커피숍에는 점심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괜히 이곳으로 오라고 했나 내심 걱정했는데 소연은 누가 쳐다보든 상관없다는 듯 당당하게 우현의 자리까지 걸어왔다.
“오셨어요? 매니저는요?”
“걔는 밖에 있어요.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래도 둘이 앉아 있으면 아무래도…”
“대낮에 대놓고 이렇게 앉아있으면 아무도 의심 안 해요. 그리고 어차피 한명 더 올 거라고 했잖아요?”
“아…”
“뭐 드실… 어? 벌써 왔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앳된 청년이 문을 열고 허겁지겁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소연을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모, 나 안 늦었지?”
“응, 여기 김우현 대표님. TV에서 봤지?”
“아, 안녕하십니까! 가, 강석호입니다.”
90도로 인사하는 그를 보니 이제야 그녀가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 그래요. 반가워요. 일단 뭐 좀 마시면서 얘기하죠. 전 라떼 마실건데, 뭐 드실래요?”
“아… 전 아메리카노 주세요. 얘는 알아서 주시구요.”
앉아 있기 뻘쭘하기도 하고 생각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뭐라 하기 전에 바로 일어나서 카운터로 향했다.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겼고, 키는 대략 175정도로 보인다. 아직 스무 살은 안 돼 보이는데 체격은 호리호리하다. 게다가 긴장했는지 말도 더듬는다.
첫인상 치고 좋은 편이 아닌데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뭐지?
“일단 마시고 이야기 할까요?”
음료를 들고 다시 한 번 그를 살폈다. 잔뜩 긴장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보이는데 그래도 생긴 건 확실히 일반인을 넘어섰다. 남성적인 잘생김이 아니라 귀공자처럼 여리여리한 잘생김이라 해야 하나?
“바쁠 텐데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강소연 씨가 만나자고 하면 대한민국 남자인 이상 만나야죠, 하하하!”
긴장을 풀어주려 나름 머리를 굴려 농담을 했는데 석호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어떻게 웃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제가 회사 옮기는 건 막는 거예요?”
“크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역시 그녀 앞에서는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얘가 내 조카예요. 조금 크죠?”
“그러네요. 조카 치고는 나이가 꽤 돼 보이는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지금 고3입니다.”
“고3이면 열아홉이네. 별이랑도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네.”
“우리 언니랑 나랑 나이차이가 조금 많이 나요.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제 손을 많이 타고 자랐어요. 언니는 이혼해서 저랑 같이 살거든요.”
“아…”
“저 때문인지, 아니면 요즘 세상이 그런 건지. 사춘기에 들어서부터 가수를 하겠다고 그렇게 언니 속을 썩였어요.”
그녀는 석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안쓰러운 눈빛을 지었다.
“뭐, 요즘 아이들치고 연예인 꿈을 안 가져본 친구들 없겠죠.”
“아까 인사했을 때 들었겠지만 얘가 말을 조금 더듬어요. 그런데 웃기게도 노래를 할 때면 더듬는 버릇이 하나도 나오지 않아요.”
예전에 들었던 적이 있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던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면 전혀 더듬거리지 않는다는 말을. 그게 다 그런 건가? 아니면 몇몇 사람들만 그런 건가?
“노래도 곧잘 불러요. 그래서 기획사 오디션도 보고 최근 몇 년간은 작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도 했어요.”
“으음…”
“그런데 이제 얘가 곧 스무 살이 되는데 언니 걱정이 말이 아니에요. 저는 배우라 가수들은 잘 모르는데 얼마 전에 TV보고 대표님께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경수가 여아이돌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참 사람 일은 예측할 수가 없다.
“계속 도전해도 좋을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말인가요?”
“맞아요. 그래서 오기 전에 얘랑 약속한 게 있어요. 오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더 이상 미련가지지 않기로 했어요.”
전 기획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어지간해서는 꿈을 버리기 힘들 텐데 동의했다니 말이다.
“허, 참… 어려운 숙제를 주시네요?”
아무리 자신이 스타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해도 남의 인생에 안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되는 건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일.
결국 모든 건 당사자의 재능과 노력에 달린 일인데…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똑똑해서 공부도 곧잘 하니 제 생각에는 굳이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고집을 부리니 그런 거니까.”
“노래를 곧잘 한다구요?”
“제가 듣기에도 곧잘 하는 것 같고 몇몇 보컬트레이너에게서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떻게… 바로 대표님 회사로 이동할까요?”
이래서 본인이 직접 온 것이다. 어차피 우현의 사무실로 이동해서 노래를 들려줘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석호를 보니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게 보고 싶었다.
“이거 좀 읽어 볼래요?”
커피숍 직원에게 펜을 빌려 휴지에 휘갈기고 그에게 건네줬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