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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달리는 말에 올라타라(5)
“꼭 지금 일을 해야 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왜? 바빠서 지금은 힘들어?”
“아니… 너도 알다시피 지금 벌려놓은 일이 워낙 많다 보니까…”
“뭐, 능력 좋은 대표님이다 이거지?”
“그렇게 봐주면 나야 고맙지. 일단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제작자나 다름없이 들어가는 영화 있잖냐? 너도 투자한다는 ‘28시간’. 그것만 정리되고 나면 나도 바로 네 작품 알아볼게. 그리고 이번에 별이 거 준비하면서 충무로에 돌고 있는 웬만한 시나리오는 전부 다 읽어 봤거든. 그런데 너한테 붙여줄 만한 게 없어.”
그건 사실이다. 현재 충무로에 돌고 있는 시나리오들은 대개 남성 중심적인 영화들이기에 은하가 끼어들만한 여지가 있는 작품은 없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 별이를 꽂아주려 안간힘을 썼을 거다.
“하긴, 그러니 기획사 대표가 영화 만든다고 투자받고 다녔겠지.”
“그랬으니까 너도 이번에 20억 투자하지 않았겠어? 일단 내 임무는 투자를 받는 거니까 그것까지만 완료되고 크랭크인 들어가면 이제는 나도 한결 여유가 있지. 그때부터 제대로 준비해보자고.”
“그 파이브 걸즈인가 하는 애들도 이제 곧 데뷔한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
“나는 뭐 TV, 인터넷 안하고 사는 줄 알아? 누굴 바보로 알고… 바보냐?”
“크흠… 나는 뭐, 네가 하도 바빠서 가수들한테까지 신경 쓸 줄은 몰랐지.”
“나도 오빠네 회사 프로그램이니까 봤지. 안 그랬으면 봤겠어?”
“어때? 나 화면빨 좀 받는 것 같았어?”
“바보같이 나오더라. 옷하고 머리 하고는…”
“이게 뭐 어때서… 어쨌든 파이브 걸즈는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케어하는 애들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경수가 걔들을 매니지먼트 할 거고, 보컬, 댄스 같은 경우는 전부 담당 트레이너가 있거든. 그리고 홍보, 마케팅은 외주업체랑 협의해서 의상, 컨셉 잡을 거라 나는 방향만 잡아주면 돼.”
“정말 그래도 돼?”
“가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해도 노래 아니냐? 그걸 내가 선정해줬으니 사실 내가 할 일은 다 해줬지.”
“흐음… 듣고 보니 그렇네?”
“나머지는 회사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야. 충분히 능력 있는 사람들이고, 또 그러라고 돈 주는 거니까.”
“그럼 유니는? 걔 요즘 장난 아니잖아.”
“걔는 이미 내가 전부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떴지. 정규앨범 내고 방송활동은 끝냈기 때문에 행사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도와줄 만한 것도 없어. 그리고 걔는 자기가 알아서 작곡 다 하는 녀석이라 나중에 다시 앨범 작업할 때 방향만 좀 잡아주면 돼. 천재과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대단한 녀석인데 그래서 내 손이 덜 가는 녀석이지.”
“완전 효녀네?”
“그렇지? 흐흐.”
“그럼 진짜 별이 영화 크랭크인하면 나 신경 써줄 거지?”
“당연하지. 내가 너 신경 안 써주면 누구를 신경 쓰겠어?”
“흐음… 좋아. 한번 믿어볼게. 나 배고프다.”
일 얘기는 끝났다고 생각하는지 은하는 몸을 편하게 뒤로 젖히며 소파에 푸욱 기대었다.
“아, 점심시간이지. 뭐 먹고 싶어? 초밥 먹을래?”
“으음… 뭐 칼로리 너무 높은 거 아니면 아무거나 괜찮아.”
“그래, 그럼 나가자.”
우현이 일어나 재킷을 들었다.
“오빠, 우리 그냥 여기 사무실에서 시켜 먹으면 안 돼? 요즘 배달대행업체에서 뭐든 배달해주잖아.”
“어? 왜, 사람들 알아볼까봐 귀찮아?”
“아… 뭐, 그렇기도 하고… 오빠랑 단둘이 오붓하게 먹고 싶네?”
은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우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애교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은하의 얼굴에 잠시 홀린 듯 멍해졌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아래로 눈길이 옮겨갔다.
“어… 뭐, 안 될 건 없는데…”
은하가 우현에게로 몸을 기울이자 은하가 입고 있던 하늘색 블라우스가 살짝 뒤틀리며 가슴께 단추 사이로 속살이 비치는 거다.
“응? 초밥 시켜 먹자.”
사무실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가만, 뭘 어쨌길래 이러면 안 돼?
“크흠, 그러지 뭐.”
우현은 신속하게 초밥과 은하가 좋아하는 커피숍의 커피까지 배달 주문을 했다. 그리고 민주와 경수를 점심 먹고 오라며 내보냈다. 천천히 들어오기를 바라며.
“크큭, 별 거 아닌데 되게 스릴 있네.”
“하여간 장난은… 그리고, 블라우스 입고 고개 숙이지 마. 아니, 가능하면 안 입었으면 좋겠네.”
“왜? 어머, 늑대.”
“쩝, 일부러 본 게 아니라구.”
우현은 괜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은하의 눈길을 피했다.
“후훗, 우리 대표님 엄청 귀엽네.”
은하가 놀리듯 우현의 볼을 꼬집는다.
“어허… 자꾸 늑대를 부르는구만?”
수다를 떨고 있으니 주문한 초밥과 커피가 도착했다. 은하가 보일세라 대표실 문밖으로 나가서 받아들고 들어왔다. 포장을 뜯어 초밥 하나를 들어 올리는 찰나,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낯선 목소리인데, 누구지?
젓가락을 놓고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니 낯선 얼굴의 여성이 서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위클리 연예’의 송아영 기자입니다.”
순간 속으로 쌍욕이 흘러나왔다. 아마 기자가 아니었다면 진짜 입 밖으로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아, 네. 그런데 어쩐 일로…?”
“다름 아니라 이번에 유은하 씨가 회사를 옮긴 일로 많은 화제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취재를 하려고 하는데… 아, 당연히 담당자로부터 허락을 받았는데 혹시 이야기 못 들으셨나요?”
그제야 어제 홍보 담당자로부터 스치듯이 흘려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오늘 점심 때 연예 기자가 올 거라고 했던…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는데 하필 이 순간에 나타난 거다.
그리고 그녀 뒤편으로 홍보팀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우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다음에 오시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니요. 당연히 알고 있었죠. 안 그래도 유은하 씨와 같이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같이 드시겠어요?”
“정말요? 어머!”
“네, 이리로 오세요.”
기껏 약속까지 잡고 불러놓은 기자를 다시 쫓아냈다간 무슨 욕을 들어 먹을지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하는 안에서 미리 듣고 있었는지 전혀 놀란 표정 없이 기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저 예전에 뵀었죠? ‘피아니스트’ 언론시사회에서 인터뷰 했었는데… ‘위클리 연예’의 송아영 기자예요.”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여기 앉으세요. 안 그래도 언제 오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은하답게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기자를 능숙하게 대한다.
“정말요? 세상에… 은하 씨가 이렇게 부드럽고 자상한 분이신줄 오늘 처음 알았네요. 나 오늘 정말 계 탔나봐, 하하하!”
“일단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원체 초밥을 좋아하는 터라 일부러 1인분을 더 시켰는데 마치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송아영 기자와 같이 초밥을 먹고 후식으로 차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은하의 이적과 앞으로 파인 엔터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녀는 이렇게 환대를 받을지 몰랐다며 기사를 최대한 잘 뽑아주겠다는 말로 인사하며 회사를 떠났다.
송아영 기자가 회사를 떠났을 때는 경수와 민주 등 회사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기에 은하와의 오붓한 점심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아… 씨…”
“크크큭. 왜? 아쉬워?”
은하가 또 다시 은근슬쩍 다가왔지만 언제 어느 때 경수가 후다닥 들이닥칠지 몰라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눈치 없는 놈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구. 어쨌든 마이더스에서 계약한 샴푸 광고 찍을 때까지는 딱히 스케줄 잡지 않을 거니까 쉬고 있어.”
“응, 나야 쉰다고 해도 항상 관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지.”
“그래도 작품 들어갈 때보다는 낫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아, 맞다. 소연 언니가 어제 나한테 전화 했잖아.”
“뭐? 강소연?”
느낌이 쎄하다.
“그럼 누구겠어?”
“너 강소연하고 별로 안 친하잖아?”
“그랬지. 지금도 그렇게 친한 건 아닌데, 전에 ‘밀실’때 내가 조언을 좀 해줘서 그런지 그 때부터 종종 말하고 지내.”
종종 말하고 지낸다는 게 좀 웃겼지만 연예계에 별다른 친구가 없는 은하에게는 그것도 몇 없는 상대다.
“강소연이 뭐라는데? 설마 우리 회사로 올 수 있냐? 뭐, 이런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단칼에 끊었어. 내가 들어온 이상, 더 이상 여배우 영입은 없다고 말이야.”
기가 찬다. 하지만 단호한 그녀의 눈빛을 보니 항변했다간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그냥 수긍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여자 아티스트밖에 없기에 한 소리 듣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다른 배우를 영입한다고 해도 자신이 케어해 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이더스 사장과의 관계가 자신이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른 것 같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은하가 파토 내버렸는데…
“하… 뭐, 그래. 잘 했다. 어차피 강소연한테 뭐라 변명하면서 거절할까 고민했었거든. 너도 들어오는데 그녀까지 오면 내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야.”
“그렇지? 나도 그럴 것 같아서 단호하게 말했지. 그런데 의외로 쿨하게 알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조금 미안해하는데 대신 오빠랑 단 둘이 자리 좀 마련해 달라는 거야.”
“자리? 왜?”
“나도 물어봤는데 당연히 대답 안하지. 대답할 것 같지도 않았어. 어쨌든 뭐, 오빠를 꼬셔보겠다 이런 건 아닐 테고, 뭔가 부탁할 게 있어 보이던데?”
“그래?”
“응, 어쨌든 난 전했다.”
은하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우현의 볼에 쪽 입을 맞추며 몸을 돌렸다.
“아… 네일 케어나 하러 가야지.”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밖을 힐끔거리며 문을 닫았다.
“아휴… 쟤는 하여튼 거침이 없어.”
그래서 좋긴 하다만…
은하가 던져준 강소연에 관한 이야기에 한동안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괜히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연락을 했다가 행여 곤란한 일을 더 빨리 마주하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못 들었으면 몰라도 이미 들었는데 못 들은 척 무시하면 인간성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건다고 해도 꼭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쯤 한창 촬영을…
“여보세요? 김 대표님?”
“아, 안녕하세요. 지금 촬영 안 하고 계셨나봐요?”
“네, 방금 전에 컷 나와서 잠시 쉬고 있었거든요.”
타이밍 참…
“아, 그러셨어요? 다름 아니라 유은하 씨랑 통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해 듣기로는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하던데요?”
“네, 맞아요.”
“무슨 일로…”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일단 시간 좀 내주시죠? 아, 당연히 제 촬영이 없을 때로요.”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요?”
소개팅인가? 갑자기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