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달리는 말에 올라타라(4)
“그렇게 말하던데? 무슨 내용을 찍을 거냐고 물으니까 그건 김 대표한테 직접 이야기 하겠다고 하네. 그래서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어.”
뒷말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우현이 그녀에게 다 이야기 해줄 거니까 굳이 캐묻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나를 찍는다고? 흐음… 뭐 하는 인간이지?”
“궁금하면 전화해 봐. 연결해줄게.”
“아니야. 그냥 번호만 줘. 내가 내일 전화해볼게.”
“칫, 무슨 이야기하나 궁금했는데…”
“어차피 다 이야기해 줄 건데 뭘… 자, 술이나 마십시다. 상우 씨 잔 비었네. 내가 소맥 기가 막히게 말아 드릴게.”
새벽 2시까지 이어졌던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다음날이 돼서야 은하에게 받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장승효 씨 되시죠? 저 파인 엔터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은하 통해서 저랑 연락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맞습니다. 그냥 회사로 연락할까 하다가 은하 씨가 대표님네 회사로 간다고 해서 부탁 좀 드렸는데, 어떻게 바로 연락을 주셨네요.”
“네, 은하한테 들은 말이 조금 이상해서요. 저를 찍고 싶다고 하셨다던데… 다큐멘터리 찍는 분 아니세요?”
“아… 하하하! 그러셨어요? 은하 씨가 제대로 전한 게 맞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으흠… 그러시죠. 언제 괜찮으세요?”
“저는 언제든지 좋습니다. 지금 당장도 괜찮구요.”
“제가 점심때까지는 시간이 비는데, 회사로 오시겠어요?”
“물론이죠.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는 통화가 끝나고 1시간 쯤 지났을 무렵 회사에 도착했는데 짧은 스포츠 머리에 훤칠한 키, 구릿빛 피부만 보면 막 제대한 군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현재 KBC에서 자연다큐멘터리 조감독을 맡고 있는 장승효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네요?”
“그런가요? 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머리하는 걸 귀찮아해서 항상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니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습니다. 나이는 서른둘이구요.”
“생각보다 나이가 있으시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표님도 젊어 보이세요.”
“아이고 됐습니다. 저는 그런 공치사 안 좋아해요. 아침에 거울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데요, 뭘…”
젊어서부터 고생을 해서 그런지 어딜 가든 그의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심지어 은하에게까지도 말이다.
전에 궁금해서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런 답변을 들었다.
“오빠는 나이보다 덜 들어보이지는 않아. 그런데 왜? 젊어 보이면 뭐하려고? 누구를 꼬시고 다니려고 그래?”
그 이후로는 자신이 젊어 보이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저는 진심이었는데요. 어쨌거나 그 이야긴 그만 하고… 바쁘신 분이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죠.”
“다름 아니라 제가 이번에 기획하고 있는 다큐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연출하게 되는 작품이라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국장님께서 허락을 해주셨거든요.”
“축하드립니다.”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여서 형식적인 축하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프로그램의 내용이겠죠? 제가 관심 있었던 건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대박 음식점이나 보험왕, 창업신화, 뭐 이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쭉 조사해왔었는데 이쪽, 바로 연예계에도 그런 스토리가 있더라구요.”
그제야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았다.
“그럼 그게 제 이야기라는 말씀이신 거죠?”
“맞습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시고…”
“하하하! 제가 유은하 씨 처음 데뷔할 때부터 팬이었거든요. 조연으로 나왔을 때부터 딱 눈이 가더라구요. 마침 그 때가 제가 막 입사했을 때라 나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표님한테 눈이 더 가더란 말입니다. 마치 될 작품과 망할 작품을 기가 막히게 가려 가시면서 은하 씨를 톱스타로 키우는데 정말 운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맞습니다. 운이 좋았죠.”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던 건 딱 대표님께서 은하 씨를 데리고 있었을 때까지 였습니다. 김별 씨를 데리고 회사를 키우기 시작하고 유니를 최고의 아이돌로 세우면서 다시금 대표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거든요.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말이죠.”
이걸 어떻게 받아야 하나? 자신의 능력이 이렇게 알려지면 곤란하다. 자기가 무슨 점집을 낸 것도 아닌데 개나 소나 몰려들어서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겠는가? 아니면 온갖 연예계 지망생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나 좀 키워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흐음…”
“혹시 방송되는 게 부담스러우신 건가요? 어떤 게 부담스러운지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충분히 편집해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얼굴이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 저는 제가 그냥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저를 띄워주시면 저로서는 앞으로 회사를 운영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건 예능이 아니라 다큐이기 때문에 최대한 객관적이게 나갈 겁니다.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을 거기 때문에 우려하실 만큼 많은 불편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물론 방송 전보다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테지만 그렇다고 대표님을 연예계의 신처럼 생각하지는 않겠죠. 사람들이 그렇게 비이성적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흐음…”
그냥 안 하겠다고 하면 귀찮은 일도 없고 좋겠지만 이게 또 나중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 고민이 된다.
‘28시간’ 같은 경우에도 70억의 투자를 받았지만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겨 나머지 투자가 힘들어질 수도 있고 또 다른 일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자신이 유명해지고 회사가 유명해지면 나중에 상장하게 될 때에도 엄청난 메리트가 될 것은 분명하다. 누구처럼 코스닥 등록 한번으로 수천억 자산가가 될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귀찮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일단 해보시죠. 비록 다큐멘터리라서 큰 시청률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업계 내에서는 상당한 반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려하시는 것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크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지금 3대 기획사를 보면, 대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그들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게 있으니 지금의 위치에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대표의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그럼 촬영은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소속 연예인들이 예능하시는 거 보셨죠? 비슷합니다. 저희는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간섭 없이 담담하게 촬영하기만 할 거구요. 기간은 약 한 달간 진행할 겁니다.”
“한 달씩이나요?”
“말이 한 달이지 매일 촬영하는 게 아니라 이틀 촬영하고 일주일 뒤에 또 하루나 이틀 촬영하고, 뭐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라 크게 무리는 없으실 거예요. 촬영하게 되는 날짜는 큰 이벤트가 없을 때는 일주일 간격이 되겠지만 만약 캐스팅 미팅을 하게 된다거나 소속 연예인들과의 특별한 일정이 있을 경우에 추가 촬영이 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촬영이 많을 수 있겠네요.”
“그 정도는 정말 적은 겁니다. 원래는 일주일에 최소 5일은 촬영하려고 했거든요. 대표님께서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 많이 줄인 겁니다. 참고로 촬영을 많이 할수록 내용은 더욱 풍부해지게 될 거구요.”
“그렇게까지 심하게 풍부할 필요는… 어쨌거나 그럼 그 정도의 촬영만으로 하죠.”
“하하! 역시… 허락하실 줄 알았습니다. 일단 촬영 계약은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맺도록 하죠. 스태프들은 꾸리는 중이니까 늦어도 다음 주에는 계약과 동시에 촬영이 시작될 겁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아직 은하의 내레이션이 끝나지도 않은 걸로 아는데…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줄 알았다면 아마 더 고민했을 거다.
“네, 현재 하고 있는 자연 다큐멘터리 업무는 다른 친구로 바뀔 겁니다. 저는 곧바로 이 업무에 투입할 거구요.”
“빠르기도 하시네요.”
“원래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타자인 대표님께서 이렇게 절 만나주시니 빨리 진행될 수가 있었네요, 하하하!”
결국 자신이 전화를 아주 늦게 줬으면 늦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궁금함을 못 참고 일찍 전화했는데 이래서 궁금하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나보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동네 시장에서 흥정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 다시 생각해 보죠’ 할 수 없어 그냥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잘 하셨습니다.”
장승효 조감독, 아니, 이제 감독이 될 그가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익숙한 목소리에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니 새벽부터 미용실을 갔다 왔는지 풀메이크업을 한 은하가 직원들을 향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나왔냐? 대충 인사했으면 언능 들어와.”
“뭐야, 지금 내 앞에서 텃세 부리는 거야?”
“대표한테 텃세 부리는 거냐니, 하여튼… 여기 유은하 다 알죠? 여기는 경리 봐주고 있는 민주 씨. 그리고 여기 바보처럼 웃는 애는 경수라고 앞으로 데뷔하게 될 파이브 걸즈 매니저야. 내 일도 같이 봐주고 있어.”
“만나서 반가워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나 알죠?”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말하면 재수 없고 뻔뻔스러워 보이지만 이상하게 유은하가 저렇게 말하니 멋있어 보인다.
“그, 그럼요, 헤헤. 그런데 대표님께서 제 이야기를 하셨나요?”
“네, 아주 똑똑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잘 도와주고 있다고 하던데요? 고마워요.”
“네? 뭐, 고마울 것 까지야… 하하하! 앞으로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십쇼.”
얼빠진 경수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진짜 여자 잘 꼬시는 거 맞아?
“네가 웨이터냐? 뭘 필요한 거 있으면 찾아?”
“아휴, 대표님.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래, 너는 네 새끼들 보러 가고 은하는 일단 들어와.”
대표실에 들어온 은하는 대표실을 찬찬히 둘러보며 이리저리 만져보고 쓸어댔다.
“네가 쓸 방 아니야. 누가 보면 네가 내 대신 일하러 온 줄 알겠다.”
“그냥 오빠 일하는 방 구경하는 거야. 흐음… 냄새 좋은데?”
“냄새 좋기는… 그나저나 여기 오는데 왜 샵까지 들렀어? 피곤하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역시 풀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오빠네 회사 처음 오는데 츄리닝 입고 올 수는 없잖아. 그래도 이제 내 회산데. 직원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그리고 알잖아? 연예인 만만하게 보이면 그 때부터는 엄한데서 뒤통수 얻어맞는다는 거.”
하긴 그 성격 어디가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은…”
“오빠는 이 바닥 다 아는 것 같지?”
새초롬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
“알았다. 미안하다.”
“칫! 좋아. 우리 이제 김우현 대표와 배우 유은하의 관계로 와서 일 이야기부터 해볼까?”
“일? 벌써부터?”
“그럼? 내가 오빠랑 놀려고 여기 온 줄 알아? 나도 배우야. 작품 욕심 있어.”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진짜 일을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몸이 두 개라고 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언제 은하 일까지 찾아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