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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쉽고 편한 길은 없다(8)
그런데 돌연 양재호 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렇네. 역시 박 책임이 센스가 있어. 응, 우리 영감님이 좀 그렇지.”
“그래서 궁금하네요. 과연 김우현 대표님이 우리 회장님처럼 상상을 초월한 안목을 가지고 계신 건지, 아니면 그냥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건지 말이에요.”
그는 우현의 머릿속까지 파헤쳐 보겠다는 듯 눈빛을 쏘아 보냈다. 이에 우현은 여유롭게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연예계에 발을 디뎠을 때, 처음 키운 친구가 유은하였습니다. 다들 아시죠?”
“유은하 모르면 간첩이지.”
정윤수 부장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유은하 모르면 간첩이죠. 기억하십니까? 유은하의 첫 드라마 데뷔작이 ‘눈물이 흘러내리면’이죠. 평균 시청률이 21%였습니다.”
“그랬나? 굉장히 자세하게 기억하네?”
“그럼요. 제 배우 첫 드라마였으니까요. 그리고 전 이상하게 드라마 시청률과 영화 관객 수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드라마는 주연으로 캐스팅 됐고 그게 그 유명한 ‘그대와 나’입니다. 그 때 시청률 30%를 찍었죠.”
“흐음… 유은하 씨의 필모를 나열하는 이유가 뭐죠?”
박 책임이라는 자가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작품을 고르는데 과연 누가 그걸 결정할 거라 보십니까? 유은하가 직접 결정했을까요? 이후 유은하가 파인 엔터를 떠나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와 두 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 한 개의 드라마 역시 시청률은 30%에 이르렀고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천만을 넘었습니다.”
이쯤 되니 장내 인물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더 말씀드릴까요? 이름도 모르고 사라져가던 걸그룹인 라라걸즈의 멤버 둘을 데려다 하나는 지금의 김별로 키웠고 하나는 지금의 유니로 만들었습니다. 아, 유니는 얼마 전 삼전그룹 임원 연수회에 행사를 갔다 오기도 했죠. 제가 알기로 행사비로 가장 높은 금액을 받은 게 유니라던데 맞습니까?”
“이 모든 성과를 이룩한 게 오로지 김 대표님 때문이라는 말이죠?”
박 책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유은하가 유은하가 아니었고, 김별이 김별이 아니었고, 유니가 유니가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성공할 수는 없었겠죠. 동네 지나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스타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처음과는 달리 양재호 팀장은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우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결국 자기자랑이긴 한데… 참 충격적이네요. 이렇게 쇼킹한 자기자랑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거 뭐 사실이니까 할 말이 없네.”
“이곳 회장님이 어느 정도나 대단한지는 지금 회사의 규모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겠네요. 제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이 연예계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영화에 투자할 기회를 말이죠. 과연 이 영화가 얼마만큼의 흥행을 기록할까요? 오백만? 칠백만?”
우현의 도발적인 질문에 저들은 아무 대답 없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양재호 팀장이 깊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알겠습니다. 내부 회의 마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그리고 늦어도 3일 내에 답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현은 곧바로 짐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의 뒤로 정윤수 부장이 따라 나왔다.
“고생했어. 회의 결과 나오면 연락 갈 거야.”
“자리 만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하하. 어쨌든 기다리면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우현이 가고 정 부장이 회의실에 들어오니 양재호 팀장이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부장님은 어떻게 저 친구 알게 되셨어요?”
“어, 광고 모델 협의 때문에 알게 됐지. 유니가 이번 우리 핸드폰 광고 모델이잖아. 그런데 어찌나 비싸게 구는지… 광고 시안을 바꾸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배짱을 튕기더라니까? 내가 그 때 생각하면 아주 어이가 없어서…”
“허… 완전 또라이네? 광고모델이 광고주한테 시안을 바꾸라고 통보하다니…”
“그렇지? 보통 또라이가 아니야. 남들은 시켜달라고 애걸복걸해도 안 되는걸 떠 먹여 준다고 해도 거절했으니까. 그런데 마냥 또라이라고 할 순 없는 게, 누가 갑인지 정확히 알고 있거든. 언뜻 보면 대기업인 우리가 갑 같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건 유니거든.”
“유니가 언제까지 갈 것 같답니까?”
박 책임이 코웃음을 쳤지만 정윤수 부장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 박 책임도 들었지? 지금까지 저 또라이가 손을 댄 친구치고 실패한 친구가 없어. 그럼 유니 다음에 아무도 없을까? 그거 알아? 얼마 전에 파이브 걸즈라고 걸그룹 데뷔 프로젝트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 했어.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고 해. 그 친구들 데뷔할 때 과연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십니까?”
“나는 말이야. 지금 이대로 간다면 저 또라이 회사가 대한민국 3대 기획사를 4대 기획사로 만들 것 같단 말이지. 뭐, 어쨌거나 나는 이 결정에 당연히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양재호 팀장이 정 부장을 향해 투덜거렸다.
“아… 거, 옛 직원들한테만 책임 떠넘기는 겁니까?”
“몰라, 나는 이제 여기 사람 아니야. 자네들이 알아서 해. 그럼 수고하라고.”
정 부장도 자리를 떠나고 나자 양 팀장은 남은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하… 오십억 짜리 폭탄을 던지고 가네. 박 책임은 일단 시나리오 다시 검토해보고 송 선임은 저 또라이 행적을 다시 좀 살펴봐. 진짜 저 친구가 말한 게 맞는지 확인해보자고.”
“정말 맞으면요?”
송 선임이라는 직원이 되 묻자 양 팀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쩌긴 뭘 어째? 성공률 백프로라며? 그럼 못 먹어도 고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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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돌아온 우현을 경수가 반겼다. 한 손에 반쯤 먹은 피자 한 조각이 들려있는 걸로 보아 간식으로 시킨 것 같다.
“오셨어요? 잘 되셨어요?”
“응, 그런데 웬 피자야? 점심은 먹었을 테고, 출출했어?”
“애들이 선생님들한테 칭찬 받았거든요, 많이 늘었다고. 그래서 고생했다 생각해서 피자 좀 시켜줬습니다.”
“그래? 체중관리도 하는 거지?”
“그럼요. 다들 연습하고 식이요법하느라 굉장히 힘들어했거든요.”
“잘했어. 내일 내가 확인한다고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삼전에서 뭐래요? 잘 됐으면 투자 한다고 한 거예요?”
“아직 아니야. 그 정도 큰 자금을 집행하는데 그 자리에서 오케이 할 수는 없는 거지. 내부 회의 거친다고 했으니까 며칠 기다려야 할 거야.”
“아… 그렇구나. 마음이 쫄깃해지네요. 만약 우리가 투자 받아서 잘 되면 회사 입장에서도 돈 버는 거죠?”
“그렇지. 손익분기점만 넘으면 상당한 수입을 기대할 수 있지. 거기에 다른 나라 수출까지 되면… 네 월급도 지금보다 더 오를 거다.”
“크… 좋네요. 하지만 전 우리 애들 데리고 돈 벌 겁니다.”
“2년 동안 잘 키우면 너한테도 수당 지급할 테니까 잘 해봐.”
“옛썰!”
대표실로 들어온 우현은 곧바로 ‘타이거 스튜디오’의 대표인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케줄이 잡히고 그에게 알려줬으니 아마 아침부터 내내 우현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여보세요? 대표님? 잘 되셨습니까?”
“아이고, 숨 넘어 가겠어요. 일단 삼전투신운용 영화 투자 펀드 측 사람들하고 만나서 프리젠테이션 했습니다. 반응 보니까 괜찮던데요?”
“괜찮다구요? 긍정적으로 본다는 말이죠?”
“네.”
다년간 영업사원으로 지냈던 감으로 봤을 때 느낌이 좋았다. 특히 그가 나갈 때 심각한 표정을 짓던 양 팀장의 얼굴을 떠올려 봤을 때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결정은 언제 된답니까?”
“며칠 걸리지 않겠어요? 늦어도 3일 내에 답을 달라고 했으니 그 전에 결과가 나올 겁니다.”
“투자금은 얼마나 말했어요?”
“오십억 말했는데 어느 정도나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오십억이라… 그 정도면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건 문제 없겠습니다.”
“아뇨, 백억 다 들어오면 시작할 겁니다.”
“네? 굳이 그럴 필요가… 후반기 작업과 마케팅 비용은 차차 들어오는 돈으로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요? 물론 다 들어오면 좋긴 하지만…”
“중간에 돈 안 들어와서 이거 빼고 저거 빼고, 이런 짓 안 하려구요. 그리고 중간에 돈 들어올 거 생각하면 자꾸 온 신경이 그쪽으로만 가게 되잖습니까?”
“하긴 그렇죠.”
“조금 기다려보시죠. 일단 스탭진들 꾸리는 건 어떻게 돼갑니까?”
“유은하 씨가 출연했던 영화 ‘부산으로’의 촬영감독하고 특수효과 팀이 합류했습니다. 나머지 확정되면 말씀드릴게요.”
“훌륭하네요. 그럼 더 수고해주십쇼.”
전화를 끊고 시간이 흘러 퇴근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경수가 후다닥 대표실로 들어온다.
“대표님, 기사났습니다. ‘28시간’의 주인공으로 조상우가 확정됐다구요. 벌써 기사까지 나고 일 진행이 팍팍 되나 봅니다.”
‘28시간’은 이번 시나리오의 제목으로 확정됐다. 28시간의 제한시간 내에 원인모를 전염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확산을 막아야 하는 게 시나리오의 주 내용이기 때문이다.
“벌써? 잠깐만.”
아직 돈도 안 들어왔는데 벌써 기사가 나가니 이상해서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게 지금 시나리오가 돌고 있는 것 같아서 미리 기사를 냈습니다.”
“시나리오가 돌아요?”
“네, 지금 배우들 측이랑 투자자 측에서 이리저리 찔러보는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요. 기자들도 냄새를 맡았는지 자꾸 오기도 하고… 귀찮은 찰나에 조상우 측에서 자기네가 주연으로 확정된 거 아니냐면서 불만을 표출하니 그냥 기사를 냈습니다. 내지 말 걸 그랬나요?”
너무 섣부른 게 아닌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잘됐다 싶었다. 어쩌면 이 기사가 삼전의 투자 결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삼전이야 조상우가 출연하는 걸 모를 리 없지만 다른 투자자들 입장에서 매력적인 투자가 될 수도 있고 자칫 기회를 놓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잘 하셨습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기사 내실 때 저희랑 상의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상의하고 기사 내도록 하겠습니다.”
웃긴 건 기사의 제작사 이름에 파인 엔터와 타이거 스튜디오가 나란히 나가서 그런지 그 때부터 회사에도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어디서 얻었는지 어느 배역에 자신의 배우 누가 잘 맞을 것 같다는 전화와 오디션 일정이 있는지 묻는 전화, 그리고 혹시 투자를 할 수 있겠냐는 문의였다. 물론 대부분이 개인 투자자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을 때, 기다리고 있던 삼전투신운용에서 전화가 왔다. 투자계약을 위한 스케줄을 잡자는 것이었다.
“투자금은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오십억 전액 투자할 생각입니다.”
전화를 한 이는 양재호 팀장이다.
“좋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말이죠.”
“말씀하시죠.”
“투자 계약서에 한 가지 조항을 넣었으면 해서 말입니다.”
“흐음… 어떤 조항을 원하십니까?”
“투자자는 영화 시나리오와 캐스팅, 제작방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