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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쉽고 편한 길은 없다(7)
결국 그날 조상우로부터 출연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출연 계약은 다음날 ‘타이거 스튜디오’ 측에서 조상우 매니지먼트 회사랑 하기로 했다.
윤석은 조상우와 출연 계약을 성사시키자마자 우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도장 찍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대표님이 하셨죠. 저야 가서 도장 찍어온 것밖에 더 있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죠.”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남았네요.”
“그렇죠. 그 전에 배우 한분만 더 캐스팅 해주세요.”
“아, 감초 같은 조연 말씀이시죠? 시나리오 상에도 등장했던…”
“네. 여주 사수로 등장하는 박사인데 감독님이 이 인물을 쓰면서 누구를 떠올렸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런가요? 그게 누굽니까?”
“최달수요.”
“천만요정 최달수요? 그 배우도 굉장히 바쁠 텐데… 어쨌든 알았습니다. 조상우 씨도 계약했으니 안 될 건 없죠. 일단 지금부터 저는 스탭진을 꾸리겠습니다. 이 방면 최고 전문가들로 모셔올 테니까 저는 이제부터 김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우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가 문제네…”
시나리오 판권을 사 왔을 때, 그냥 ‘타이거 스튜디오’ 측에 다시 넘겼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다. 그럼에도 시나리오를 꽉 쥐고 놓지 않은 건 어설프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돈에 쪼들려 이상한 작품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고인의 작품에 대한, 그리고 남은 아내를 위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우현은 전화기를 들어 최고기획 최호선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표가 어인 일이실꼬? 유니는 더 이상 광고 안 찍는다며?”
“우리가 꼭 광고 이야기만 할 사이입니까? 하하.”
“하여간 넉살은… 그래, 아침부터 안부나 물으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뭐야?”
“삼전그룹 정윤수 부장하고 다리 좀 놔주세요.”
“누구? 정윤수 부장? 전에 얼굴 보고 알만큼 아는 사이인데 정 부장은 왜?”
“개인 번호는 모르는 사이에요. 아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친해져 놓는 건데 괜히 대기업 부장에다가 그 때 분위기 좀 안 좋았다고 거리를 뒀네요. 만나게 해 달라는 건 아니고 연락처를 주시거나, 아니면 저에게 전화 좀 달라고 해주세요.”
“회사에 전화하지 않는 걸 보면 부탁할 일이 있는 거야?”
“네,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 회사의 가장 높은 분이 그 분이라서요. 그리고 우리 회사에 나름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야… 천하의 김 대표가 부탁할 일이 있단 말이지? 그것도 삼전그룹 정 부장에게 말이야. 스케일이 큰가 보네?”
“아주 큽니다. 그리고 정 부장님한테 직접 부탁할 건 아니에요. 그 분한테 누구를 연결시켜 달라고 할 셈이지.”
“뭐야, 한 다리 건너 또 한 다리야? 궁금해 죽겠네.”
“잘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전화 끊고 기다려봐.”
최 팀장과 전화를 끊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결국 점심까지 먹고 들어와서 잠시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 느낌이 왔다.
“여보세요?”
“김우현 대표 핸드폰 맞죠?”
목소리가 기억난다. 정윤수 부장이 맞다.
“네, 안녕하십니까?”
“내 목소리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럼요. 전 한번 본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잊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 참 부러운 능력이네. 그래, 부탁할 게 뭐예요? 나보다 최 팀장이 더 궁금해 하던데?”
“전화니까 말 돌리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그거 좋지.”
“제가 영화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물론 제작사는 따로 있구요. 제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데, 투자를 받아 보려고 합니다.”
“하하하! 삼전그룹의 돈을 받고 싶다?”
부탁이 오가는 와중이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온다.
“네, 알아보니 삼전투신에서 운용하는 영화투자펀드가 하나 있더라구요. 그동안 투자한 영화들 목록을 보니 주로 CS나 샤롯에서 만든 대형 영화들이었는데 흥행기록은 마음에 내키지 않을 것 같더군요.”
투자를 준비하기 위해 ‘타이거 스튜디오’ 최윤석 대표로부터 받은 자료에는 개인 투자자부터 대기업까지 총 망라되어 정리돼있었는데, 그 중 우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삼전투신이 운용하는 영화투자펀드였다.
“알겠지만 나는 삼전투신 사람이 아니야.”
“그거 모르겠습니까? 다리만 놔 주시죠.”
“흐음… 제작비를 어느 정도나 생각하고 있나?”
“백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억? 하하하! 이 사람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구만. 백억이라는 돈은 쉽게 집행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야.”
“원래 몇 백만 원 대출 받는 것보다 수십억 대출 받는 게 더 쉽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백억을 투자해서 얼마만큼 이익이 남을까 하는 것이죠.”
어이가 없는지 잠시 전화기 너머 말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좋아, 연결시켜주지. 하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는 거 알지?”
“당연합니다.”
“준비 잘해야 할 거야. 그 친구들은 나처럼 물렁하지 않거든.”
“걱정하지 마십쇼. 부장님 체면 구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정윤수 부장 입장에서는 단순히 소개시켜 주는 일이기에 손해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거야 남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의 입장에서 괜히 어쭙잖은 놈 소개시켜줬다간 회사 내에서 개창피를 당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도 상당한 부담을 안고 소개시켜주는 거다. 때문에 결과가 좋든 아니든 그에게 빚을 하나 진 셈이나 다름없다.
얼마 후 정윤수 부장에게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월요일 2시 삼전그룹 신관 8층. 준비 잘해서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삼전투신 측에서 약속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그가 약속을 잡아버렸다. 이건 어떤 영화인지 확인조차 안 했다는 것인데…
정윤수 부장의 신뢰가 너무 두터워서 보지도 않고 오케이 했다는 건 생각할 수 없다.
삼전투신 측이 일처리를 원래 저렇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차피 결정하지 않을 거니까 부담 없이 보자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 부장의 얼굴을 봐서 시간이나 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그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닐 것이 분명하다.
이후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고 고심을 거듭했다. 은하는 주말에 너무 심하게 일하는 거 아니냐며 구시렁거렸지만 이내 몸 생각하라는 말로 위로해줬다.
약속한 날이 다가와 삼전그룹에 도착한 우현은 1층에서 복잡한 절차를 거친 후 긴장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8층에 내리니 정윤수 부장이 마침 눈에 보였다.
“부장님.”
“아, 빨리 왔네?”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렀다.
“미리 와야죠. 그런데 여기는 투신인데…”
“나 없으면 들어가기 복잡해서. 게다가 궁금하기도 하고…”
정 부장은 우현을 데리고 지문 인식 문을 열고 들어가 이리저리 복잡한 길을 거쳐 큰 회의실로 안내했다.
30분 일찍 왔으니 한참동안 앉아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인 엔터테인먼트 김우현입니다.”
우현은 미리 준비해온 명함을 쭉 돌렸다. 그러면서 그들 모두에게 명함을 한 장씩 받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가장 상석에 앉은 덩치 큰 남자가 결정권자 같았다. 마치 자다 나온 것처럼 나른하고 권태로운 눈빛, 귀찮은데 억지로 나온 것 같다.
“이거 정 부장님이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없으신 분이어서 주말 내내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말과 눈빛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하하, 그런가요?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양재호 팀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제안이라고 했지만 달리 말하면 부탁이나 마찬가지다.
정 부장은 그의 말에 아무 말 없이 미소만을 보이고는 한 쪽에 자리했다.
“그런데 엔터 회사 아니었어? 갑자기 무슨 영화야?”
정 부장은 앉아서 안경을 고쳐 쓰며 은근히 물었다. 처음에는 저 반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악의가 없다는 걸 아니 오히려 더 편해졌다.
의아한 건 직급은 높아도 회사 계열도 다르기에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치 원래 이 회사 직원이었던 것처럼 편해보였다. 그리고 이 자리 누구도 그런 정 부장을 불편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엔터 회사 맞습니다. 배우랑 가수 매니지먼트만 하고 살기에도 빡빡한데 운 좋게 기가 막힌 시나리오 하나를 구했거든요. 그냥 제작사에 다 넘길까 하다가…”
“하다가?”
“사실 이 시나리오를 만드신 분이 지금은 고인이 되셨는데, 그의 아내분이랑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현의 이런 말에 양재호 팀장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일을 감상적으로 접근하시네요?”
“감상적이고 직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적인 면도 잘 활용하면 큰 무기가 되죠. 특히 예술작품은 창작자가 고인이 되었을 때, 굉장히 큰 주목을 불러일으킵니다. 물론 영화가 재미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요.”
그제야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요?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대략 1시간 동안 시나리오의 내용, 특성과 장단점, 경쟁력을 설명했다. 확실히 저들도 시나리오의 내용을 듣고 난 후에는 더욱 관심 있는 모습을 보였다. 시나리오에 관한 질문도 몇 개를 받았다.
그리고 잠자코 있던 양재호 팀장의 입이 다시 열렸다.
“캐스팅은 어느 정도나 됐습니까?”
“남자 주인공에 조상우가 확정됐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현재 ‘예종의 여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별 씨가…”
“아, 그건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김 대표님이 이걸 만들 이유도 없었겠죠.”
“맞습니다.”
“조상우라… 남주는 임팩트 있네요.”
“게다가 조연으로 천만요정이라는 최달수도 확정됐구요.”
“조연이야 뭐…”
양 팀장은 우현이 나눠준 PPT자료를 손으로 툭툭 두들기더니 다시 물었다.
“제작비가 백억이라는 말은 들었고… 우리한테 얼마의 자금을 받길 원하세요? 설마 백억을 우리 혼자 일으키라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오십억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야… 이거 오랜만에 통 크신 분을 만나네… 그거 알아요? 우리는 아직까지 영화 한 편에 삼십억 이상 투자해 본 적이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오십억을 투자해 달라?”
“성공할 영화니까요.”
우현의 자신감에 황당함을 느꼈는지 어 팀장이 피식 웃으며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박 책임은 어때 보여?”
질문을 받은 이는 양재호 팀장과는 반대로 작은 체구에 날씬한 몸을 가진 40대 초반의 남자로 작은 눈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앞에 놓인 PPT 자료를 덮고 우현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PT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뭐, 자신감이야 다들 있는 거고. 이 자리에 와서 영화가 성공할 거라 말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뭐랄까… 조금 특이하네요.”
그는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마치 지금 이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를 보고 설명하는 것 같거든요. 꼭 영화를 미리 보고 온 것 같단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딱 두 명 봤는데 말이죠. 한 명은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이비가 되셨더라구요?”
“나머지 한명은요?”
“바로 우리 회장님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