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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쉽고 편한 길은 없다(6)
“변죽만 올리지 말고 얼른 얘기해 봐요.”
“글쎄, 조상우 씨한테서 연락이 왔지 뭡니까?”
세상에… 명단에 써 놓기는 했지만 송강후를 잇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인 조상우에게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조상우요? 지금 뮤지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뮤지컬이 이달 말 까지라고 하네요. 시나리오 보고 바로 연락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는 거죠.”
“미팅은 언제로 잡혔습니까?”
“내일 당장 잡았습니다.”
조상우가 그 정도로 스케줄에 여유가 있었나?
“빨리 잡았네요?”
“대신 밤 10시입니다.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면 될 것 같네요. 제가 문자로 약속장소 찍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영화에 대한 열의라고 봐야 할까?
“아… 네. 그럼 내일 저녁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문자로 약속장소가 도착했다. 장소는 대학로의 한 술집. 우현도 익히 아는 곳이다.
은하를 데리고 있을 때, 또 다른 신인 연기자를 찾겠다고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관람하고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주로 다닌 밥집과 술집이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데 그 중 한 곳이다.
허름하지만 안주가 싸고 맛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연극인들이 주로 다니는 곳인데 특히 닭똥집과 제육볶음을 기가 막히게 한다.
“아주 소박한 톱스타네.”
충분히 더 좋은 곳을 미팅 장소로 정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일 끝나고 소주 한 잔 하기 좋은 장소로 불러낸 것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았다.
대표실 문을 열고 나오니 경수가 왼손에 케잌 상자 하나를 들고 우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팅 잡혔답니까?”
“응, 조상우한테 연락 왔단다.”
“조상우요? 대박! 미쳤다 진짜!”
“대박은 대박인데, 일단 내일 만나봐야 알겠지. 도장 찍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케잌은 맛있는 거 사왔냐?”
“당연하죠. 프렌차이즈 제과점 가서 사 온 게 아니라 수제 케잌 전문점에 가서 주문한 겁니다.”
“잘했다.”
우현은 경수의 손에 들린 케잌 상자를 받아 들었다.
“혼자 가시게요?”
“어, 금방 올 테니까 네 새끼들 잘 챙기고 있어. 아, 맞다. 내가 안 챙기니까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애들은 서로 친해졌냐?”
“그럼요. 일단 제 앞에서는 서로 끔찍하게 챙겨줍니다.”
“그래? 여자애들 특성상 겉으로 표현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네가 유심히 지켜봐. 혹시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혼자 겉도는 애는 없는지 말이야.”
팀워크가 흔들리는 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특히 공동체 생활에서는 그 사소함이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된다.
“알겠습니다.”
워낙 여자들을 많이 만나본 놈이니 이런 건 잘 할 거다.
사무실을 출발해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어머, 대표님이 여기에 웬일이에요? 우와… 양손에 한 가득이네.”
제대로 씻지 못하고 부스스한 얼굴의 이주희 작가가 그를 반겼다. 그리고 그녀의 보조 작가인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가 어색하게 인사한다.
“이제 첫 촬영 들어갔으니까 고생한다고 선물 좀 가지고 왔죠. 자, 받아요.”
경수가 사 가지고 온 케잌과 홍삼선물세트를 내밀었다.
“어쩜, 센스도 있으셔라. 일단 들어오세요.”
파인 엔터가 얻어준 오피스텔은 20평정도로 꽤 넓었는데 월세만 해도 상당했다. 그래도 그녀가 한번 작업할 때마다 상당한 매출을 올리니 이 정도 오피스텔을 얻어주는 건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이제 회사가 조금 더 커지면 월세가 아니라 아예 괜찮은 오피스텔을 몇 개 사서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으로 주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다.
식탁에 앉아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가져온 케잌과 커피를 내어왔다.
“스토리는 잘 나오고 있어요?”
“제가 막장드라마를 좋아해서 그런지 잘 나오고 있어요. 미드에서 봤던 막장 스토리도 영감을 주고… 하여튼 지금까지는 좋아요.”
“다행이네요. 그 또라이만 아니었으면 더 편하게 작업했을 텐데, 하여튼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구요.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하고 같이 작업했으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제 대본을 얼마나 씹어댔을지 생각하면… 아휴…”
“그러니까요. 그리고 생각보다 감독님이랑 소연 씨랑 큰 잡음 없이 촬영하는 것 같던데요? 스태프한테 슬쩍 들어보니까 촬영 전에 다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흘러가서 오히려 당황했다고…”
“하하! 그래요?”
둘 다 프로니까 작품을 만드는 데는 차질 없게 할 거라고 믿었지만 이렇게 잘 흘러가니 흡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했던 제가 민망해졌죠. 어쨌거나 대표님이 와주시니 든든하네요. 시청률이 올라가면 더 예쁨 받겠죠?”
“당연하죠. 어디 20%만 넘어봅시다.”
“헐… 케이블에서 20%를 바라보시는 거예요? 내가 무슨 김은선이라고…”
“20% 찍고 김은선 바라보는 거죠. 고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20%를 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소연의 드라마 복귀작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작가의 급이 다르니까.
똑같이 재미있어도 김은선 작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은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만으로도 감사하네요. 그리고 감독님께서 대표님더러 언제 한번 촬영장에 들러달라고 하네요.”
“그걸 왜 이 작가님한테 얘기했대요? 저한테 전화하면 될 일 가지고…”
“전화로 직접 하기가 뭐했나보죠. 직접 전화하면 정말 볼 일이 있어 부른 게 되잖아요. 그냥 지나가다 겸사겸사 한번 들려달라는 거죠.”
이유야 뻔했다. 현장에 와서 긴장 한번 풀어달라는 거지. 아무리 소연과 아무 일 없이 촬영하고 있다지만 본인 속으로는 언제 그녀가 뒤집어엎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테니까.
“알았습니다. 그럼 시간 너무 뺐으면 안 되니까 일어날게요.”
“그러세요.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의 오피스텔을 나와 충무로의 ‘타이거 스튜디오’에 들러 본격적인 투자자 유치 준비에 들어갔다. 제작사의 도움을 받아 어디의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떤 루트를 밟아야 하는지 검토에 들어갔다.
다음 날 저녁, 드디어 조상우를 만나러 대학로로 향했다.
“아이쿠,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약속장소인 허름한 지하 술집에 들어서니 조상우가 먼저 와 있었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과연 배우는 배우인지 얼굴에서 광체가 흘렀다.
“아닙니다. 조금 일찍 끝나서 한잔하고 있었죠. 이리 앉으시죠.”
“네, 파인 엔터의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건네니 그가 우현의 명함을 한참동안 뚫어지게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소개도 안 했네요. 조상우입니다.”
그는 화면에서 보던 것처럼 차분하고 젊잖게 말했다. 목소리도 좋아서 그 나긋나긋한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 같았다.
“조상우 씨를 모를 리야 없죠. 타이거 대표님은 곧 오실 겁니다.”
“네, 일단 잔 받으시죠.”
안주는 제육볶음. 둘이서 별 말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돌리는데 ‘타이거 스튜디오’의 대표인 최윤석이 도착했다. 그는 분명 약속시간보다 5분 일찍 왔는데도 상당히 민망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시나리오를 보내셨어요?”
대뜸 직설적으로 물어오니 답이 궁색해졌다. ‘그냥 톱배우들 중에 정말 적합하다 싶은 배우 다섯 명 정도를 명단에 적었는데 당신이 그 중에 가장 먼저 답을 해왔다’고 한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분명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신한테 제일 먼저 보냈다고 하다간 나중에 분명 들통 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답을 해줬다.
“제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다섯 분께 시나리오를 보냈습니다. 그 중에 상우 씨가 가장 먼저 답을 해준 거구요.”
“흐음… 그랬나요? 저는 일부러 저에게 보낸 줄 알았는데.”
캐스팅 미팅에서 가장 민망한 상황 중의 하나다. 톱스타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그저 상대방이 넓은 이해심으로 넘어가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를 보이던 조상우는 우현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시네.”
“네? 제가 모른다구요?”
“네. 여기 사장님도 모르시고…”
윤석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걸 모른다고 하시는지…”
“이거 엎어지기 전에 이미 캐스팅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전 감독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저랑 여기서 술 한 잔 하면서 출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랬는데요?”
이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감독님이 돌아가시고, 영진에서도 말이 없기에 그 계약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죠.”
이상하다. 조상우가 캐스팅 되었다는 걸 알았다면 영진에서 사활을 걸고 그 시나리오를 살리려고 했을 텐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감독님의 아내분께서 시나리오를 영진에다가 안 넘기려고 했다는 걸 알았는데, 고민하다가 그냥 안 하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마 영진 영화사는 내가 캐스팅이 된 줄도 몰랐을 겁니다. 남녀주인공을 모두 캐스팅한 뒤에 회사에 이야기 하겠다고 했거든요.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었으니 회사에서는 알 길이 없었겠죠.”
“아…”
남녀 주인공을 모두 톱스타로 했다면 영진에서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난도질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상황이 달라져서 어떻게든 영화를 띄우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나한테 왔네요. 그것도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는 감회가 새로운지 시나리오를 다시금 들춰봤다.
“일부러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제 촬영이 시작되면 세부적인 사항은 감독님께서 일일이 수정하고 대사도 만들어야 할 텐데요? 감독님은 누가 결정됐습니까?”
“최철성 감독 아시죠? 얼마 전에 ‘밀실’ 만들었던…”
원래 최 감독도 이 자리에 나왔어야 했는데 할머니께서 위독하다며 급하게 지방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아, 알고 있습니다. 머리 좋으신 분이던데…”
역시 감독의 이름만 듣고도 우현이 최 감독을 찝어낸 이유를 가장 간명하게 표현해 낸다.
“머리도 좋고 센스도 있죠. 이 시나리오를 죽은 김진원 감독의 의도에 가장 근접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은 최철성 감독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정말 같이 해보시죠.”
조상우는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서비스로 나온 오뎅 국물을 한 숟가락 뜨더니 말했다.
“이거 스케일이 큰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저야 김진원 감독을 생각하면 다시 하고 싶지만 또 엎어지는 건 원하지 않거든요. 뭐, 시나리오 들고 오신 거 보면 감독님 아내분하고 합의를 보신 것 같기는 하지만, 솔직히 제가 봤을 때는 이거 어설프게 하면 안 만드니만 못한 것 같아서요.”
애초에 안 될 거라 생각했으면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기에 조상우는 지금 확신을 주길 원하고 있다.
우현은 옆에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윤석에게 물었다.
“대표님, 제작비 견적 대강 나왔죠?”
“네? 네. 아직 시나리오가 정비되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백억 잡았습니다.”
백억. 말이 백억이지 엄청난 금액이다.
“조상우 씨. 캐스팅에 도장만 찍어 주시면 백억, 제가 책임지고 만들어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