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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쉽고 편한 길은 없다(4)
“그 아저씨 지금 놀고 있을 걸? 연락해보고 결정되면 말해줄게. 일단 시나리오 가져가서 캐릭터 연구하고 있어. 아, 그냥 혼자서 연구만 하면 답 안 나오지. 흐음… 일단 집에 가있어 봐. 질병관리연구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나 물어볼 테니까.”
“아직 제작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너무 빨리 진행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 내가 손 댄 작품치고 엎어진 거 하나라도 있는 것 같아? 손을 안 댔으면 몰라도 일단 내 손을 거치면 무조건 만들어진다. 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옙! 알겠습니다.”
우현의 장담에 별이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나가자 바로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시간이 늦었기도 했지만 오늘 ‘내 남편의 여자’ 촬영 전 전체 회식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미 경수가 출발하긴 했지만 지금 가면 늦지는 않을 거다. 강소연이 호시탐탐 이적을 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기는 해도 아예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면 일부러 피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회식 장소는 을지로의 한 고깃집.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기를 먹고 있는 상태였고 그 중에 윤평식 피디는 발그레하게 술이 올라와있었다.
“여기 술 혼자 드셨어요? 초장부터 달리고 그러세요?”
“어이, 김 대표.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래.”
“그렇겠죠. 시골 구석에 혼자 처박혀 프라모델이나 만들고 있었으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연이 피식 웃으며 평식을 놀렸다.
“왜 이래? 내 취미를 무시하지 말어.”
“무시하지 않았어요. 그냥 외로우셨을 것 같다, 그거지.”
“크흠… 어쨌든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니까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래. 일단 앉아서 같이 먹자고.”
“네, 안 그래도 오늘 고기가 땡겼는데 잘 됐네요.”
“그런데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아, 지방에 일이 좀 있어서 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지방 어디?”
이 사람의 단점이라면 눈치가 좀 없다는 거? 보통 다른 사람들은 상대방이 곤란해 할 것 같은 질문은 피하기 마련인데 윤평식 피디는 그런 게 없다.
“거 뭘 굳이 물어보고 그러세요?”
“궁금하니까 그러지? 아까 네 직원 말하는 거 보니까 되게 말하면 안 될 것처럼 굴기에 더 궁금해졌잖아.”
직원으로서 회사 사장의 스케줄을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한 거지만 대충 모른다고 둘러대지는 못한 것 같다. 경수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가끔 이상한 곳에서 임기응변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창원 갔다 왔어요. 가서 누굴 좀 만나야 해서요.”
“창원? 이야…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네가 창원까지 갔으면 되게 중요한 일이었겠다?”
그의 말처럼 우현은 어지간해서는 지방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지금은 사장이 돼서 많이 움직이려고 하지만 예전 은하 매니저를 할 때는 귀찮은 마음에 지방 촬영은 아래 로드만 보내는 일이 일쑤였다.
그 때문에 은하에게 자신을 챙기지 않는다며 들들 볶이기도 했지만 좁은 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그만큼 이번 창원행은 마음 먹고 간 거라고 할 수 있다.
“어머, 그러면 양평에 감독님을 모시러 갔던 것도 큰마음 먹고 간 거네요?”
“흐흐. 내가 그래서 나왔지. 이놈이 여간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더라고.”
의외로 소연이 사람 다룰 줄 안다. 아니, 원래 저런 사람인데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긴, 같은 회사도 아닌데 사람 속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사실 오늘 회식도 명목은 첫 촬영 스태프와 배우들 간의 단합을 도모하는 거지만 실은 윤평식 피디와 강소연의 화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긴장했는데 의외로 두 사람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해 보였다.
그날 생각 밖으로 평화로운 회식을 보낸 후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에 얼굴만 비추고 바로 충무로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건물의 ‘타이거 스튜디오’. 전에 별이가 출연했던 피아니스트를 제작했던 영화사다.
“돈 좀 벌었을 텐데 아직 사무실이 그대로네.”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운 날씨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워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니 등에 땀이 한 바가지나 흘러내렸다.
“어서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직원이 그를 반겼다.
“대표님 계세요? 저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녀는 전에 한번 얼굴을 봤기에 별다른 말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고마워요.”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윤석이 책상 위에 김밥을 한줄 놓고 먹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김 대표님이 웬일이세요? 거기 앉으시죠.”
“그나저나 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세요? 식사를 하고 오시지.”
“이게 편합니다.”
그는 먹던 김밥을 한 쪽으로 치우더니 소파에 앉았다.
“피아니스트로 돈 좀 버시지 않았어요? 사무실 좀 옮기지 그러세요?”
“아이고, 영화판에서 하나 잘 됐다고 사무실 막 바꾸다간 간판 남아나지 않습니다. 잘 될 때일수록 돈을 모아놔야 해요. 그래야 언제가 큰 고비가 올 때 넘어갈 수 있거든요.”
삶의 지혜 같은 말이다.
“그렇군요. 제가 배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혹시 김별 씨 영화 시나리오 찾습니까? 시나리오라면 저희가 얼마 전에 다 드린 걸로 아는데… 아, 혹시 그 중에 마음에 드신 게 있었나보죠?”
“아뇨, 그게 아니라… 실은 제가 시나리오 판권을 하나 샀거든요.”
“시나리오 판권을 사셨다구요? 혹시 영화 제작을 해보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네, 그런데 이건 제가 영화사를 차리고 만들 생각은 아닙니다.”
“으음…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제공해 주시고 저희가 제작에 참여해달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윤석은 등을 소파 등받이에 붙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순 제작업체로 들어오면 큰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다. 대신, 제작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리스크는 없다시피 하다.
10여 분간이나 고민하던 윤석은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투자는…”
“당연히 제가 받아오겠습니다.”
당연히 윤석이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큰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일을 쉬지 않고 돈을 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메리트이기 때문이다.
“투자도 대표님이 하신다면 저희는 제작비가 어느 정도나 나올지 견적을 잡아야겠군요.”
“그렇죠. 그래야 어느 정도나 투자를 받아야 할 지 알 수 있으니까요.”
“감독님은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분이 계십니까?”
“최철성 감독님 아시죠?”
“아, 얼마 전에 ‘밀실’ 찍으셨던…?”
“맞습니다. 그 최철성 감독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영화에도 김별 씨가 참여하셨죠?”
“네, 그 작품이 별이의 첫 영화 데뷔작이었죠.”
“흐음… 시나리오가 조금 빡빡한가 봅니다?”
역시 전문가라 그런지 감독 이름만 듣고도 대충 시나리오의 느낌을 유추해낸다.
“여기 있으니까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미리 복사해놨던 시나리오를 그에게 건넸고 윤석은 찬찬히 읽어나갔다. 한참 후 그가 시나리오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이거 참… 이거 나도 본 건데… 흐음… 이걸 가지고 오셨다면 이 감독이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시겠고, 이 판권을 샀다면 그의 아내까지 만나고 오셨겠군요.”
“맞습니다.”
“역시 김 대표님의 재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저도 나름 이걸 얻어보려고 했었는데 씨알도 안 먹혔거든요.”
아마 그 때는 그녀가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있을 때였을 거다. 게다가 여기 ‘타이거 스튜디오’도 규모가 작으니 더더욱 믿지 못했겠지. 이래서 이름값이 중요한 것 같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최철성 감독이라… 이해가 가네요. 디테일이 좋은데다가 시퀀스의 흐름이 짜임새 있고 기발하죠. 극의 긴장을 계속 유지할 줄 아는 감독이니 이 시나리오에는 아주 적합해 보이네요. 좋습니다. 그럼 제작비는 넉넉하게 주실 거죠?”
“당연합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얼굴 붉히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만들지 말자는 주의라서요. 그렇다고 제작비 너무 부풀리기 없기입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자리에 버티고 있기를 10년도 넘었습니다. 영화 흥행은 못 시켜도 양아치 짓은 하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하긴, 그러니 임찬규 감독이 다른 곳을 다 제쳐두고 여기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며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겠나?
며칠 후, ‘내 남편의 여자’가 첫 촬영에 들어갔다. 당연히 회사 차원에서 밥차와 간식차를 보내주며 제작진들에게 파이팅을 불어넣어 줬는데 작가 측에서 밥차를 지원해 주는 것은 처음이라며 다들 고마워했다.
그리고 최철성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제 진짜 김 대표님으로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
“생각도 없으면서 무슨… 타이거 이윤석 사장한테 말 들었죠?”
“그래, 어디서 그런 시나리오를 구했어? 대단하던데? 사연 들어보니까 진짜 안타깝더라. 내가 봤을 때 진짜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죠? 아까운 인재인데 세상 일이 참 그렇네요. 어쨌거나 맡을 거죠?”
“사실 이 시나리오 받기 전에 CS 쪽이랑 이야기가 되고 있던 게 있었어.”
영화 시장의 공룡이나 다름없는 CS 엔터테인먼트면 감독 입장에서 출세했다고 봐도 좋다. 전작인 ‘밀실’의 흥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 거다.
“뭐예요.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은 아니죠?”
“너는 뭘 맡겨놓은 것처럼 말하냐?”
“솔직히 CS 좋죠. 자금 빵빵하겠다. 배급력 우수하겠다. 그런데 아시잖아요? 걔네 입맛에 맞춰 시나리오 다 난도질 한다는 거. 걔네가 만들어놓은 공식대로 해야만 제작할 수 있는데, 그거 형님 방식 아니잖아요?”
솔직히 최 감독이 CS에 넘어갔다고 할까봐 쫄리는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긁어댔는데…
“새끼…”
역시 CS 쪽에서 조건을 걸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지 말고 이거 하나 합시다. 형님 이거 시나리오 봤죠? 나 이거 천만 봅니다.”
“천만? 야, 인마! 너 천만이 옆집 애 이름이냐? 어디서 부정 타게 천만, 천만 거려?”
“오호… 부정 탄다는 말을 하는 거 보니 욕심이 나긴 하죠?”
“그 시나리오 보고 욕심 안 날 수 있겠냐? 그런데 그게 내 것이 아니라서 조금 그렇긴 한데…”
“젊은 인재가 그거 하나 남기고 갔어요. 우리, 남은 그의 아내를 위해서라도 이거 멋지게 되살려 봅시다.”
“네가 CS냐? 감성 팔이 하기는…”
CS가 괜히 감성 팔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지 그 낡은 감성이 먹혔다는 감이 온다. 아니, 이건 사실이기에 단순히 감성 팔이로만 볼 건 아니다. 심금을 울렸다고 보는 게 맞을까?
“이거 놓치면 아마 평생을 후회할 걸요? ‘그 때, 김우현의 말 들을 걸’ 하면서 말이에요.”
“좋아. 그럼 조건 하나 있다.”
“아니, 조건은 내가 걸어야 되는 건데… 알았어요. 뭔데요?”
“너, 이번 작품 여주인공 별이로 하려는 거지?”
“당연하죠.”
“좋아. 그럼 내 다음 작품 여주인공 네가 물어와 주면 내가 이거 할게.”
이번 작품에 별이를 여주로 쓰니 다른 여배우를 원하는 것일 텐데, 설마…?
“그게 누군데요?”
“유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