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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쉽고 편한 길은 없다(3)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와 감독들을 만나며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자부했는데 김진원이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었다.
전문 작가가 아닌가? 그럼 이름 없는 감독인가?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오피스텔로 돌아가 그 시나리오를 들고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다음 날,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던 영진 영화사로 전화를 걸었다.
영진 영화사는 이 바닥에서 꽤나 오래된 제작사로 예전에는 충무로 원탑 영화 제작사였다. 하지만 큰 자금이 투자된 영화 몇 개가 연속적으로 망하면서 이제는 간간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이다.
갈 곳을 잃은 시나리오가 거치고 거쳐 이르는 곳이니 엎어진 시나리오가 많을 수밖에 없다.
“안녕하십니까? 저 파인 엔터 김우현입니다.”
“아, 김 대표? 무슨 일이에요?”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남자가 반색하며 맞았다. 아마 김우현이 누군지도 잘 몰랐을 테지만 반갑게 맞이하는 걸로 보아 여간 심심하지 않았나보다.
“제가 얼마 전에 모아놓았던 시나리오들을 가져갔었는데요.”
“아… 아아! 그래요.”
역시나 몰랐었다.
“거기 김진원이라는 작가인지 감독인지가 쓴 시나리오가 있던데… 이 사람 누굽니까?”
“김진원이? 잠깐만… 김진원이가 누구더라…? 김진원이… 김진원이…”
이거 아무래도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닌가 싶을 때쯤 그 영감이 전화기 너머로 우렁차게 외쳤다.
“아! 그래그래, 김진원이… 걔가 그 독립영화 한다는 젊은 친구가 맞을 걸요?”
“독립영화요? 그리고 젊어요?”
“맞아요. 아직 서른도 안 됐었지요. 그럴 거야. 걔가 군대 갔다 온지 얼마 안 돼서 그걸 썼거든. 그리고 아가 참 성실했어요.”
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젊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도 서른조차 되지 못한 감독을 믿고 가야할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김진원이 시나리오 보고 전화한 거지요? 그거 못 할 건데요?”
“네?”
“그 아가 죽었거든요.”
“네? 죽었다구요?”
시나리오의 주 내용은 지금껏 나타난 적이 없던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 내용이 한 번 보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흡입력이 대단했다.
한국 특유의 신파나 억지로 답답한 고구마를 먹이는 전개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데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친구가 죽다니…
“그래요, 내가 이제야 생각나네. 참 성실한 친구였는데 글쎄 배우들 캐스팅 한 번 못 해보고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래서 엎어졌지요.”
“아… 그렇군요.”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을까? 독립영화 감독으로 고생하다가 상업영화에 첫 발을 뗀 그 순간에 미처 빛도 못 보고 죽은 것이다.
“나도 참 아까웠는데 말이에요.”
“그럼 혹시 시나리오 판권은 대표님이 가지고 계십니까?”
그래도 이 시나리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요. 그 시나리오 판권은 그의 아내한테 있지요. 내가 안타까워서 조금 더 쳐줘서 사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팔지를 않았었지.”
아내까지 있다면 더욱 안 됐다.
“아… 혹시 그의 아내 연락처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그 영화사 대표에게서 연락처를 받아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의외로 흔쾌히 만나주겠다고 한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아내가 사는 창원으로 향했다.
“어디를 가십니까?”
“아, 나 잠깐 창원 갔다 올 거거든?”
“창원이요? 혹시 경상남도 창원 말씀이십니까?”
“응, KTX타고 올 거기는 한데 아마 늦을 수도 있어. 아, 오늘 저녁에 ‘내 남편의 여자’ 팀 회식 있다고 하니까 혹시 내가 도착 못 하면 너라도 가라.”
“제가요?”
“그래, 가서 이주희 작가 옆에서 잘 챙겨줘. 그리고 혹시 거기 피디랑 강소연이랑 문제 생기면 즉시 연락하고.”
“그 둘이 문제 생길 게 있습니까?”
“그런 게 있어. 하여튼 잘 해라.”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쇼.”
창원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점심을 먹지 않고 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그녀가 우현을 부른 곳은 한 돼지국밥집. 그녀가 남편을 떠나보내고 일하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박에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젊은 여자가 그녀였으니까.
꾸미지 않아 정확히는 알기 어렵지만 20대 후반처럼 보이는 그녀는 일하기 편하게 머리를 질끈 뒤로 묶고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진원 씨 아내 분 되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혹시 식사 하셨어요?”
“아뇨, 아직…”
“아주머니! 여기 국밥 하나 가져다주세요.”
그녀가 나이 많은 아주머니를 능숙하게 부린다. 그제야 그녀가 여기 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없으니 어렵게 살 거라 지레 짐작해서 그녀가 여기서 종업원으로 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머쓱해져왔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얘기하실래요? 지금 바쁜 시간이라…”
“네, 그렇게 하시죠.”
가게는 장사가 잘 되는지 사람이 거의 꽉 차 있었다. 느긋하게 맛있는 돼지국밥을 먹으며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니 그녀에게 유일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계산대를 지키고 있는 60대는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이거나 시어머니 일 것으로 추측됐다.
국밥을 다 먹고 한참을 기다렸을 때 가게가 조금 한산해지고 그녀가 음료수를 들고 우현에게 건네며 앞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가게가 바쁘다보니 이제야 시간을 내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만나자고 했으니까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죄송하네요. 그런데 우리 오빠 시나리오 때문에 오셨다구요?”
“네. 안타까운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후우…”
그녀는 잠시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밝게 웃었다.
“미안해요. 그런데 오빠가 쓴 시나리오를 팔라고 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으음…”
그녀는 우현이 건넨 명함을 붙잡고 한참이나 고민한다. 그런데 왜 고민할까? 분명 전에 영화사 사장에게는 절대 안 팔겠다고 해서 각오하고 왔는데 그새 마음이 바뀐 것일까?
“왜 고민하시는 건지 제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으음… 그런데 파인 엔터테인먼트? 영화사가 아니라 연예기획사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럼 왜 우리 오빠 시나리오를 사려고 하는 거예요? 영화를 제작하실 생각인가요?”
“아닙니다. 영화 제작이라는 게 돈만 많다고 뚝딱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노하우도 필요하고 인력도 필요합니다. 제가 사려는 이유는 그 시나리오를 가지고 다른 영화사와 함께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저희 배우를 꼭 이 작품에 참여시키고 싶거든요.”
“아… 그럼 그 배우 때문에 이걸 사려는 거네요?”
“네, 맞습니다.”
“그 배우가 누군가요?”
“김별이라고 요새 ‘예종의 여인’에 나오는…”
“아! 알고 있어요. 그 김별 씨 회사 사장님이신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완전 재밌게 보고 있거든요. 세상에… 진짜 스타를 데리고 있으신 대표님이시구나. 저는 우리 오빠가 그 일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스타를 데리고 작업하는 걸 본적이 없었어요. 되게 신기하네요.”
원래 어디 가서 자랑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쯤 되니 그녀의 호감을 끌기 위해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김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유지나 알죠?”
“당연히 알죠.”
“얼마 전에 유정완 감독의 ‘붉은 여우’라는 영화 찍고 개봉 시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도 제가 우리 지나를 꼭 그 배역에 꽂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했었습니다.”
“유정완 감독 알죠. 우리 오빠 선배님이시거든요. 한번은 직접 뵙기도 했었어요.”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는 걸 보니 이쪽 일을 싫어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리고 가수 유니라고…”
“네? 유니요? 진짜 유니도 데리고 있어요?”
“네, 별이랑 유니랑 같은 걸그룹이었잖아요.”
“맞아요. 들어본 것 같네. 어머 어머! 웬일이야.”
“그리고 지금 ‘예종의 여인’의 윤해연 작가도 우리 회사 식구입니다.”
“세상에… 정말 큰 회사네요.”
“아닙니다. 저희보다 큰 회사는 많죠. 단지 요즘은 우리 회사 친구들이 많이 나올 뿐이죠.”
확실히 그녀는 처음보다 우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이런 큰 회사라면 믿을 수 있겠어요.”
“네?”
“솔직히 그 전의 사장은 믿을 수 없었거든요.”
자신이 알지 못한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저는 그냥 팔기 싫어서 안 파시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보네요?”
“우리 오빠가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인데 세상에 나온다면 얼마나 뜻 깊겠어요. 판권을 팔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왜…?”
“그 사장… 우리 오빠 작품을 제대로 만들 생각이 없었어요. 아니, 애초에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죠.”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오빠가… 죽었기 때문에 엎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거, 오빠가 살아있었어도 엎어졌을 거예요. 아니,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네요. 투자자에게 돈만 야금야금 빼먹고 영화는 걸레로 만들어서 내보냈을 테니까.”
“그런 적이 있었나요?”
“우리 오빠 선배인 유민석이라는 사람이 입봉작으로 사극을 하나 만들었었어요. 이름 들어봤죠? ‘병자호란’이라고…”
알고 있다. 형편없는 CG와 억지스런 스토리로 크게 망한 영환데…
“들어봤습니다.”
“원래는 그 정도로 망할 영화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제작에 들어갈 자금을 야금야금 빼돌리고 시나리오를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도대체 왜요? 아니, 영화가 잘 되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애초에 대박을 칠 영화가 아니라면 혼자서 돈을 빼돌릴 생각이었던 거예요. 반대로 그 해 만들어졌던 ‘조작’은 톱스타와 좋은 감독을 만나니까 ‘병자호란’과는 딴판으로 팍팍 밀어줬었죠.”
“하…”
손익분기점이 2백만이라고 치면 백만이 들던 십만이 들던 사장은 돈 한 푼 얻는 게 없다. 그래서 그랬나?
애초에 어중띠거나 흥행에 자신이 없는 작품을 골라서 투자자를 유혹해 수작을 부렸다는 것. 그러니 그녀는 이 시나리오를 그 사장이 어떻게 대할지 확신이 없어 팔지 못했던 거다.
“저 믿고 이 시나리오 판권 파시죠.”
“영화 제작자가 아니신데 가능할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제작진, 그리고 최고의 배우들로 무조건 흥행시킬 겁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는 단 한 글자도 안 바꾸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믿고 대표님에게 넘길게요.”
그렇게 시나리오 판권 계약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5천만 원을 송금했다. 시나리오 판권 치고는 비싼 금액이지만 그건 그녀 남편에 대한 부조금으로 생각했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오며 별이를 사무실로 불렀다. 어차피 지금 백수나 다름없으니 불러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별이가 그를 반겼다.
“너 이거 한번 읽어봐.”
“시나리오예요? 제목도 없네?”
“응, 한번 읽어봐.”
별이는 앉은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난 뒤 흥분된 음성으로 우현에게 말했다.
“제가 여기 주인공이에요?”
“응, 거기 나오는 최연주 박사가 너야. 남자주인공은 아직 안 정했지만.”
“그럼 감독님은요?”
감독은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