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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기대하고 고대하던…(6)
“으응? 뭐, 요즘엔 서울에 더 좋은 게 많아. 별거 없어. 그나저나 옛날보다 더 예뻐졌네.”
그는 어지간해서는 남의 칭찬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여배우에 대해서는 칭찬을 극도로 꺼린다.
칭찬을 하다보면 그 여배우의 기가 끝도 없이 올라 스탭진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나름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안 하니까 살 것 같더라구요.”
“크흠… 그래?”
“저도 몰랐는데 영화판에 가니까 나름 연기력도 인정받았지 뭐예요? NG도 잘 안내고…”
그녀는 마지막 말을 느리고 강하게 내뱉었다.
“음… 연기가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 응, 잘 됐네. 김 대표, 시작할 때 됐지? 내 자리가 어디지?”
“아, 이리로 오시죠.”
둘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평식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성격 어디 안 가네. 방금 들었지? 내가 이혼하고 시골 가서 살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하는 거. 이거 완전 엿 먹이는 거 아니냐?”
솔직히 10년 전이야 우현이 보지 못했으니까 몰라도 예전에 한창 일할 때에 비하면 얼굴이 좋아진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한번 작품에 들어가면 며칠씩 밤을 새는 일 따위는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기에 건강이 좋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 이혼을 당했다고 해도 일을 쉬고 산에 들어가 여유 있게 프라모델이나 만들고 있으니 얼굴이 좋아 보일 수밖에.
하지만 그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당연하죠. 형님 얼굴 살이 쏙 빠진 게 눈에 보이는 구만.”
“그렇지? 내가 와이프랑 이혼하고 얼마나 힘들게 지냈는데… 고것이 아주 혓바닥에 날을 세웠어. 입으로 사람의 속을 파헤친다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형님이 참으세요. 일단 작가부터 만나 보셔야죠? 아, 대본도 아직 안 보셨죠?”
“네가 줬어야 말이지. 장르가 막장이라는 것 밖에 더 말했냐? 주연이 강소연이라는 것도 쏙 빼놓은 놈이…”
“크흠… 잠깐만 기다리세요.”
얼른 제작진 한명에게서 대본 하나를 구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주희 작가를 찾아 그에게 소개시켰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인사도 못 했죠? 우리 이주희 작가입니다. 대본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주 똑똑하고 감각있어요. 제가 팍팍 밀어주는 작가니까 신경 좀 써주세요.”
“안녕하세요. 극본을 쓴 이주희입니다.”
“아이고, 젊은 분이시네. 반가워요. 나 윤평식이에요. 이놈이 설레발이 심하기는 해도 사람 가지고는 헛소리 안 하는데, 저도 기대가 큽니다.”
“대표님이 절 너무 띄워 주시는 거죠. 잘 부탁드릴게요.”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하하하!”
원래 윤평식 피디는 자기주장이 강해서 작품을 하다가 작가에게 이런저런 의견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른 피디들도 작가와 서로 의견을 조율해가며 찍곤 하는데 평식 같은 경우엔 조금 심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시청률이 잘 나온다거나 작가의 짬(?)이 많을 때는 군소리 없이 대본대로만 찍는다.
그렇기에 평식이 이 작가를 휘두르지 않도록 일부러 띄워준 것이다.
이후 평식은 이 작가 옆에 앉아 대본을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 중간 ‘어허 이런…’, ‘음음…’, ‘크… 좋네’를 연발해댔다.
“저는 잠시 일이 있어서…”
평식의 유난에 이 작가가 민망함을 느껴 자리를 떴고 우현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다가갔다.
“거 조용히 좀 봐요. 작가가 옆에 있는데 뭘 그렇게 시끄럽게 보고 그래요?”
“인마, 나는 대본 볼 때 이렇게 봐야 맛을 느낀다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보면 그게 드라마냐? 문학소설이지. 캬… 근데 잘 쓰네. 작가가 극의 재미를 알아.”
“거 봐요. 내가 뭐랬어요? 차려진 밥상에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된다니까?”
“글쎄다. 과연 내 입에 들어가는 게 밥일지 똥일지는 일단 다 찍어봐야 알겠다.”
그 똥을 누가 줄런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그 똥이 작품에만 튀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조금 있으니 모든 배우들이 들어왔다. 어제 일이 있어서인지 다들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감돌았는데 그런 분위기를 느낀 탓인지 평식이 먼저 분위기를 띄웠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스태프 분들이나 배우 분들 중에서는 저 아는 분들 계시죠? 윤평식입니다. 어쩌다보니 중간에 대타로 들어오게 됐는데 원래 대타 잘 쓰면 홈런도 치고 역전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제 불미스러운 일은 잊고 파이팅 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래 저렇게 말이 많은 양반이 아닌데 은근히 신경 쓰이나보다. 아니면 이혼하고 심경에 변화가 생겼든가 말이다. 아, 술 마실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 저리 가라 할 수다쟁이다.
이후 이 작가를 지나 강소연에 이르렀을 때 모든 이들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첫 공식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강소연입니다. 좋은 작품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담백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서로 싸우더라도 작품을 만드는데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뜻일 테니 안심이 된다.
모든 배우들과 제작진들의 인사가 끝나고 시작된 대본리딩도 큰 잡음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배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본에 빠져들었고 중간 중간 웃음도 터져 나왔다.
“휴… 진즉에 이랬어야 했는데…”
지여울 피디의 얼굴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게 왜 그런 놈을 거기에 앉혔어요?”
“윗선에서 정한 걸 제가 어떻게 바꾸겠어요? 게다가 마땅히 그 자리에 앉힐 사람도 없었단 말이에요. 물론 그 인간 정신상태가 그 지경인 걸 알았다면 무조건 반대했겠지만 그것도 몰랐고.”
“저 둘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긴 하네요. 소연 씨가 이렇게 음… 자기 성격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요.”
아마 성질을 죽였다고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이게 다 대박을 위한 희생 아니겠습니까? 물론 지 피디님이 손수 챙겨둔 소품이 큰 힘을 발휘했겠지만요.”
지금도 강소연은 지 피디가 챙겨둔 방석에 앉아 무릎담요를 덮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조금 더웠는지 휴대용 선풍기를 틀고 있기도 했었다.
“그 정도야 뭐… 어쨌든 윤평식 피디님이 잘 이끌어주실 것 같네요.”
“아까 분위기를 보니까 싸운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느낌이던데. 현장에서도 별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오늘처럼 소연 씨를 잘 케어 해주셔야 할 거예요. 욱하면 현장 뒤집는 거 아시죠? 요즘은 나이 먹고 조금 유해졌다고는 해도 저 성격 어디 가는 거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그 후, 두 시간 정도가 더 지나서야 대본리딩이 끝났다. 끝날 때는 처음과는 다르게 모두들 얼굴에 웃음꽃이 펴있었고 미리부터 준비시켜둔 기자는 그 분위기를 꼼꼼히 기록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윤 피디님은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응? 으응, 그래.”
윤 피디를 잡고 나가는 우현을 강소연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촬영 날짜 잡힌 거 알죠? 삼일 뒤 을지로에서 첫 씬인데.”
“날짜만 알지. 그런데 왜?”
오늘 처음 대본을 봤는데 미리 짜여진 촬영순서를 알 리가 없었다. 감독이 바뀌었으니 촬영스케줄도 다시 조정해야 하겠지만 첫 씬은 회사 건물을 빌려 촬영하는 것이기에 변경은 불가능했다. 미리 대여료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 날 강소연 혼자 촬영이에요.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건 없지. 어차피 오늘 얼굴 보고 인사도 했는데…”
“그러니까… 그 촬영 전에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지난 일은 잊고 다시 시작하자, 뭐 이런 대국적인 관점으로다가…”
“술이라도 마셔라?”
“그렇죠. 아니, 언제까지 그렇게 눈치보고 있을 거예요?”
“내가 언제 눈치를 봤다고 그래?”
“뭘… 아까도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드만. 걔가 대사 칠 때마다 형님 긴장하는 게 나한테까지 느껴졌어요. 아니,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30번 NG낸 게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
“그럼요. 작품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걸 가지고… 어쨌든 오늘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합시다.”
“뭐야. 이미 스케줄 잡아 놓은 거야?”
“네. 소연 씨네 매니저 측이랑 이미 합의 봤어요. 그 쪽에서도 제발 소연 씨 기분 좀 풀어달라고 성화예요. 코디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심장병 도지겠데요.”
“큼… 걔가 사람 긴장시키는 데 뭐가 있긴 하지.”
“하여튼 가지 말고 있어요.”
제작진들과 배우들을 다 보내고 윤평식 피디를 대동한 채 강남의 한 선술집으로 향했다.
이주희 작가도 데리고 가려 했는데 그녀는 둘 사이에 끼어 있으면 체할 게 분명하다며 홀랑 도망쳐 버렸다.
늦은 저녁쯤에 도착하니 이미 그 곳에는 강소연과 그 매니저가 앉아있었다.
“벌써 오셨어요?”
“우리 매니저가 운전을 좀 험하게 해서요. 너는 이제 나가있어.”
“아이 누나, 저 상무님한테 혼나요.”
소연의 매니저는 이제 20대 중반처럼 보였다. 180 정도 되는 키에 덩치도 상당했지만 소연의 눈빛에 쩔쩔매는 게 보였다.
“우리끼리 마실 거니까 너는 밖에서 혼자 마시든지 아니면 피씨방이라도 가 있어. 정 뭐하면 혼자 룸싸롱이라도 가던가.”
“아… 죽겠네.”
“어른들 마시는데 끼는 거 아니야. 빨리 안 나가?”
“알았어요. 끝나면 전화 주세요.”
고급 회를 앞에 두고 소주 한잔씩 돌자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감독님 그 때 저한테 잘못하신 거 인정하죠?”
“크흠… 그래. 내가 실수했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언제는 자기가 가르침을 줬다니 하며 큰소리 뻥뻥 치더니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린다. 이러니 남자는 미인 앞에서 약자가 되는 거다.
“그 때, 다들 제가 감기가 걸려서 병원에 간 줄 아는데 그거 아니었어요.”
“아니었어? 그 때 비 맞고 그래서…”
“그랬죠. 그래서 그 냄새나는 우의… 그 군대에서 입는다는 그거. 그거 입고 피부병이 나서 진짜… 쪽팔려서 피부병이라고 하지 않고 감기라고 둘러댄 거예요.”
군대에서 입는다는 그게 혹시 판초우의를 말하는 건가? 그걸 강소연한테 씌웠다고? 이 인간이 미쳤구나.
“아… 참, 미안하게 됐어. 그런데 너도 그 때 우리 조감독을 너무 몰아붙였다고. 걔가 일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쪼아대?”
“그럼, 안 쪼아대게 생겼어요? 시청률은 개똥만큼 나오지. 그런 주제에 대본은 촬영 두 시간 전에 주지. 대사라도 적으면 말도 안 해. 빗속에서 무슨 만담을 하겠다고 대사를 수능 지문처럼 주는데 내가 안 빡치냐구요?”
“나도 그건 이해해. 알지? 그 때 나 성수림, 그 성 작가랑 무지하게 싸운 거. 쪽대본 준다고 허구헌날 전화로 싸웠잖아.”
“그건 알고 있어요.”
“그렇지? 나도 그 날 너한테 준 대사 보고 기겁했잖아. 이걸 외우고 하라는 건가? 프롬포터에 쏘라는 건가? 막 이러면서 말이야. 자, 한잔 받어. 응?”
소연은 평식이 주는 술을 쪼르르 받아 마셨다. 이제 분위기가 한창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이 열리기 전까지는…
“김 대표님 회사에 은하가 들어간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