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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기대하고 고대하던…(5)
사실 쫄렸지만 아무것도 아닌 척했다. 솔직히 윤평식 정도의 피디를 당장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막말로 애들도 아닌데 막상 얼굴 보면 어물쩍 넘어갈 거다.
날이 지나 출근한 우현은 아침부터 피곤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아니, 우리 소연이는 그 피디 이름 듣고 깜짝 놀라서 밤에 잠을 못 잤대요. 대한민국에 그 많은 피디들 중에 하필 왜 윤평식입니까? 우리 소연이랑 무슨 일 있었는지 몰라서 그래요?”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소연과의 일화는 평식과의 술자리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강소연과 윤평식과의 일화는 연예계(정확히는 연기)에 발을 담근 인사들 중에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때는 바야흐로 10년 전, 강소연이 윤평식이 연출하는 드라마를 찍게 됐다. 그 때 강소연은 연예계의 떠오르는 샛별일 때라 막 주인공을 따 내 처음으로 원톱 여주로 활약하게 되었다.
문제는 강소연의 성격이 떴다고 더러워진 편은 아니었다는 거다. 즉, 원래부터 성격은 알아주는 편이었는데 윤평식 피디는 성격이 나쁘다기 보다는 좀 괴짜스러운 면이 있었다. 어쩌면 촬영장에서 둘이 화끈하게 붙게 되는 건 필연이라고 봐야 했다.
지금부터는 평식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
“내가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꽤 괜찮은 연출자거든. 얼마나 괜찮냐면 밤 12시를 넘겨서 촬영한 적이 거의 없잖아. 나도 자정 넘어가면 굉장히 피곤하거든.
그런데 그날따라 비가 오질라게 쏟아지는 바람에 촬영이 자정을 넘길 수밖에 없었어요. 대본은 늦게나와, 비는 쏟아져, 졸음도 쏟아져, 내가 아주 피곤했다고.
내가 딱 그랬지. ‘딱 한 씬만 찍고 들어갑시다!’ 이러면 보통 감사하다고 90도로 절하면서 하하호호 신나서 촬영하는데 고것이 쌩하니 째려보더니 ‘정말 한 씬만 찍는 거 맞죠?’ 이러는 거야.
이야… 놀랄 노자 아니냐? 그래도 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지. 왜? 예쁘니까. 예쁘면 성격 좀 나빠도 용서해 줄 만하지 않냐? 마음에 안 들면 째려 볼 수도 있지. 그래서 나도 더 피곤해지기 전에 서둘러 끝내려는데, 고것이 우리 조감독한테 지랄지랄 하는 거야.
힘들고 피곤해 죽겠는데 담요도 제대로 안 챙겨놨다는 거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우리 식구 욕은해도 남이 우리 식구 욕하는 건 못 참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나도 빡이 돈 거야. 그래서 그랬지.”
그랬다. 그렇게 강소연은 NG라는 명목 하에 같은 장면을 서른 번 넘게 찍게 됐고 감기가 걸려 하루를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그 후로 다시는 드라마를 찍지 않았다.
강소연이 드라마를 멀리하게 된 일등공신이 바로 윤평식 피디인데 그가 다시 그녀의 복귀작을 연출하게 됐다니 그녀나 그녀의 회사가 기함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마이더스는 새로 바뀐 피디를 데리고 온 게 우현이라는 말을 듣고 아침부터 바로 전화를 건 거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성은 확정됐고 첫 방 날짜도 나왔는데 엎어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라고 그 얘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끌고 나가려고 한 거죠. 소연 씨 좀 잘 달래주세요. 아시죠? 윤평식 피디, 그 사람 한동안 산 속에서 도 닦은 거.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 미치겠네. 지금 소연이 머리만 세 시간째 하고 있습니다. 미용실 사람들 쥐 잡듯이 잡고 있다구요. 이러다 오늘 누구 하나 집으로 보내겠어요.”
많이 유해졌다고는 해도 그 성격 어디 안 가나보다. 그래도 머리를 하고 있다는 말에 안심이 된다. 아예 안 올 거면 전화기 꺼 놓고 튀었겠지.
“막상 보면 우려하는 것처럼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큰소리 떵떵치며 전화를 끊었지만 내심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경수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조미희 작가 미팅 잡혔는데요?”
별이의 차기작을 위해 미친 듯이 알아보다 걸린 시놉이 바로 조미희 작가의 ‘사랑해도 될까요?’다. 당연히 미팅 전에 주연을 조건으로 내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연락이 왔다.
현재 ‘예종의 여인’ 시청률이 고공행진하며 별이에 대한 주가도 나날히 올라가고 있었다. 별이 때문에 본다는 남자 시청자들도 있을 정도다.
특히 예능에는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비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 혼자 나온대?”
“연출자도 같이 나온답니다. 정훈영 피디라고 하던데요? 예전에 ‘기사와 공주님’ 연출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훈영… 그 때 그 ‘기사와 공주님’이 시청률 20% 넘었었지? 괜찮은 사람 붙였네. 이제 지상파에 능력 있는 피디들도 몇 안 남았을 텐데.”
조미희 작가의 ‘사랑해도 될까요?’는 지상파인 KBC에서 자체 제작하는 드라마다. 당연히 미니시리즈고 자체 제작이기 때문에 외주 제작에 비해서 편성문제는 쉽게 진행될 거다.
“남자 주인공 얘기는 있어?”
“아직…”
“흐음…”
일단 주인공이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캐릭터고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상대 배역이다. 드라마는 일단 남자 주인공이 멋있어야 주 시청자의 눈을 끌 수 있는데 특히 주인공과의 케미가 살수록 남녀 주인공 모두가 돋보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나이 차이와 연기력이다.
아무리 연기력이 대단한 배우라고 해도 여주와 나이차이가 너무 나면 몰입도가 확 떨어진다. 이모뻘이니 삼촌뻘이니 하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거다.
특히 남자 나이가 너무 많으면 여주의 매력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뭐가 부족해서 저런 나이 많은 남자에게 절절 메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두 번째로 연기력이 떨어지면 일단 극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지고 캐릭터가 멍청해 보이는 효과가 나타난다.
평상시에 말이 어눌하고 표정이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 뭔가 이상한데?’라는 느낌을 받을 텐데 그걸 TV에서 보고 있으니 아무리 실장님이고 회장 아들이라고 해도 그냥 멍청한 놈 같아 보이는 거다.
남주가 멋있어도 모자랄 판에 멍청해 보이기 시작하면 그 드라마는 망한 거다. 때문에 여주로 드라마를 들어갈 때는 상대 남주가 누가 되는지 유심히 봐야 한다.
“알았어. 언제로 잡혔는데?”
“내일 바로 보자는데요? 원래 오늘 저녁에 괜찮냐고 하길래 오늘 대본리딩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잘했어.”
“오늘도 이 작가님이랑 같이 가시는 거죠? 오늘은 오랫동안 가 계셔야 할 텐데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아, 애들은 숙소에 다 입주 했어?”
이미 시간이 늦었기에 서둘러 계약을 했었다. 빈 집이었고 집주인이 여자아이돌 연습생들이 온다는 말에 집청소를 깔끔하게 했다고 한다.
“오늘 다 입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전까지 연습 없구요. 숙소 근처에서 점심 먹고 오후부터 연습입니다.”
“그래? 그럼 너는 회사에 있지 말고 애들 입주 잘 하고 있는지 보러 가. 문제 있으면 해결해 주고.”
경수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희 작가가 왔는데 그녀는 어제만큼이나 긴장된 표정이었다.
“편하게 생각해요. 편하게…”
“그 피디님은 좋은 분이시죠?”
물론 좋은 사람이다. 우현에게는…
“당연하죠. 전에 조금 문제가 있긴 했는데 그건 가면서 알려줄게요. 일단 갑시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기에 가면서 강소연과 윤평식 과의 악연을 설명해줬다. 당연히 이 작가의 안색은 극도로 안 좋아졌다.
“그럼 오늘도 싸우는 거 아니에요?”
“둘 다 프로예요. 어제는 좀 미친놈이었고 소연 씨나 윤평식 피디나 적어도 싸울 때는 일이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싸우거든요.”
“어쨌거나 싸운다는 말이잖아요?”
“에헤이… 싸운다기 보다는 의견대립 정도죠. 뭐, 그러다 심해지면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긴 하지만 말했다시피 어제처럼 깽판을 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둘이 어떻게든 잘 화해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둘이 애들도 아닌데 우리가 왜 화해시킵니까? 억지로 화해시킨다고 해도 화해가 될 인격체들이 아니에요. 저 둘은 서로 알아서 지지고 볶게 두면 됩니다.”
“후아… 대표님은 항상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하시네요. 아,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놀라워서요.”
“하하하! 그래요? 별로 놀랄 일은 아닙니다. 둘의 프로 정신을 믿는 거죠.”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약속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다행인지 아직 강소연과 윤평식 피디는 오지 않았다.
“일찍 오셨네요?”
역시나 지여울 제작 피디의 얼굴은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고 양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이건 휴대용 선풍기, 이건 방석, 이건 담요, 이건 간식거리…”
“하긴 사람은 먹을 걸 주면 가장 온순해지긴 하니까…”
“소연 씨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럴 거예요. 이미 10년이나 지난 일이고… 어? 오셨어요?”
어제와는 다르게 머리와 수염을 말끔하게 정리한 윤평식 피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빨아 입었는지 의심스러운 청바지와 칙칙한 남방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 정도는 넘어가기로 했다.
“어, 내가 좀 빨리 왔나?”
“아니에요. 안 그래도 해줄 말도 있고…”
“해줄 얘기? 어제 다 하지 않았어?”
“나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깜빡했더라구요.”
“네가 깜빡할 놈이 아닌데? 아… 벌써부터 피곤해지려고 하네.”
“뭘 듣지도 않고 엄살부터 피고 그래요?”
“그치? 나도 이상한데 왠지 네 표정과 알 수 없는 기운이 날 피곤하게 해.”
마누라 바람 핀 것도 몰랐다는 양반이 이런 눈치는 또 귀신이다.
“크흠… 여주가 강소연이에요.”
“뭐? 누구?”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잔뜩 찌푸린 미간과 크게 확장된 동공은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픈 반응이 분명하다.
“형님이 NG 30번 내게 해서 다시는 드라마 안 찍게 만들었던 그 여자, 강소연이요.”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이것 봐, 뭐? 밥상 다 차려놨으니까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된다고? 내가 먹다 체할 것 같더라니… 아우, 다리가 확 무거워지네. 여기 의자 없냐?”
“일단 저기에 앉아 봐요.”
간의 의자 하나를 주자 털썩 앉은 그는 황당한 얼굴로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걔나 나 여기에 꽂힌 거 알고 있냐?”
“어젯밤에 알았죠. 참고로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답니다.”
“걔는 내가 연출한다고 하면 안 하려고 할 텐데?”
“10년도 더 지난 일이잖아요? 그 때는 서로 잘못했으니까 툭툭 털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죠.”
“지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것 보게?”
당연하지.
“그럴 리가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뒤통수 너머에서 들리는 여자목소리. 뒷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쫘악 돋았다. 빨리도 왔네.
“어, 오랜만이네. 소연 씨.”
뻘쭘하게 인사하는 윤평식 피디를 보고 급히 몸을 돌리니 새벽같이 일어나 미용실 사람들을 초죽음으로 만들어 놨다는, 완벽한 모습을 한 강소연이 있었다.
“저도 오랜만이네요, 윤 피디님.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 시골에서 좋은 거라도 드셨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