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내가 스타로 띄어줄게-170화 (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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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기대하고 고대하던…(4)

오 피디는 자신이 억지 쓰고 있는 걸 알고는 있는지 더 이상 자리에 있지 못하고 떠났다. 이렇게 되자 대본리딩은 흐지부지 됐고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됐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건 강소연이 이 작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걱정 말라고 다독여 줬다는 것? 뭐, 이 작가한테나 다행이지 우현에게는 아무 감흥도 없었다.

“하아… 미쳐 버리겠네.”

오 피디가 떠나고 지여울 제작 피디는 복도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했다.

“저 친구 진짜 뭐예요? 뭘 믿고 저렇게 미친 짓을 대놓고 하지?”

“아빠가 방송위원회 임원이에요. 적어도 밥줄 끊길 걱정은 없겠죠.”

“이야… 대단하신 양반이네.”

“이제 어떡할까요? 재수 없게도 저희 회사에는 일 없는 피디가 없어요. 그렇다고 물론 TVM쪽에도 남는 피디는 없는 걸로 알고 있구요.”

“확실해요? TVM 요즘에 드라마니 예능이니 만든다고 피디들 꽤 많이 영입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피디들 전부 일하고 있다구요. 게다가 이런 정극 드라마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아시죠?”

막장 드라마도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작가가 써준 그대로 찍기는 해도 극적인 장면에서는 연출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막장 드라마의 짤방들 대부분 과장된 연기와 장면을 이끌어낸 연출자의 힘이 크다.

“그렇게 보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드라마가 있겠어요? 뭐, 어쨌든 입봉도 못한 초짜 피디 데리고 와서 찍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흐음… 좋아요. 제가 한번 알아보죠.”

“네? 어떻게요?”

“그냥 제가 아는 피디 하나가 놀고 있어서 그래요. 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말해 봐야죠. 그 친구가 안 된다고 하면 저도 방법 없구요.”

“그러게… 하아… 아니에요.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연락주세요. 하루라도 빨리 찍어야 하는 거 알죠?”

“그럼요. 작가님 가시죠. 가서 점심이나 먹읍시다.”

“대표님은 이 상황에 밥이 넘어 가세요? 드라마가 엎어지게 생겼는데?”

이 작가의 투정에 우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가 손 댄 작품은 엎어진 적 없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덜 마시고 얼른 갑시다. 아침부터 열 냈더니 배고프네.”

우현은 이 작가를 회사 근처로 데리고 가 스테이크를 사 먹였다. 우울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오후 늦게나 오시는 거 아니셨어요?”

경수와 민주가 의문의 눈길을 건넸다.

“큰일났다. 이 작가 드라마 피디가 날라갔어.”

“날라가다뇨? 해외로 갔다는 말입니까?”

“튀었다고. 드라마 안 하겠다고 날랐다니까?”

“예? 미친 거 아니에요? 편성까지 받은 드라마를 안 하겠다고 날랐다구요? 뭐, 대통령 빽이라도 있나?”

“아빠가 방송위원회 임원이란다.”

“아…”

단박에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인 경수는 재차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첫 방 날짜까지 잡혔는데 방송사에다가 ‘죄송한데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럴 수는 없잖아요?”

“당연하지. 너, 지금 나가서 건담 비싼 거 좀 구해와라.”

“네? 뭘 알아봐요?”

“건담, 새끼야.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건담 로봇 말이야. 알지?”

“알기야 알죠. 뜬금없이 건담을 말씀하시니까…”

“프라모델이나 피규어 중에 엄청 비싼 거 있을 거야. 시중가로 백만 원 이상 하는 거.”

“백만 원이요?”

“그것도 그렇게 비싼 거 아니야. 어쨌든 굉장히 희귀한 거 하나만 구해와 봐. 영수증 처리하고. 당장.”

그날 경수는 저녁 먹을 때쯤, 백 오십만 원이나 한다는 피규어 하나를 어렵사리 구해왔다. 해외 직구로 사야 하는 이걸 얼마나 어렵게, 우여곡절 끝에 구했는지 한참 동안이나 떠들어 댔지만 우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것을 차에 실었다.

“퇴근하고 내일보자.”

허겁지겁 출발했지만 혹여 저것이 망가지지나 않을까싶어 액셀도 세게 밟지 못했다. 도착한 곳은 경기도 양평의 한 전원주택.

띵동!

“윤 피디님, 저 김우현입니다.”

오는 중에 확인 전화를 하고 왔으니 헛걸음 할 일은 없었다.

철컹…

역시나 문이 열렸고 우현은 그리 크지도 않은 그것을 조심스레 들고 안으로 옮겼다.

“뭐야, 우현이 네가 갑자기 여기 웬일이냐?”

집에서는 덥수룩한 수염의 산적같이 생긴 양반이 우현을 반겼다. 그러다가 가슴팍에 안겨 있는 그것을 본 순간 그의 눈이 하트처럼 변했다.

“이게 뭐야. PG건담 엑스트라 피니쉬판이잖아! 이거 어디서 났어?”

“형님 드리려고 가지고 왔죠.”

“날 준다고? 이걸?”

“그럼요. 일단 들어가요, 얼른. 계속 들고 있다간 나 팔다리 아파서 이거 떨어뜨릴지도 몰라요?”

“하여간 능청은… 알았어. 들어와.”

그의 집에는 온통 프라모델과 피규어 천지였다. 건담을 비롯해, 비행기, 탱크, 전함 등등…

산적같이 생긴 40대 중반의 남자는 시원한 냉커피를 타서 우현의 앞에 놓았다. 그의 이름은 윤평식, 이름은 촌스럽지만 그가 30% 이상의 시청률을 뽑아냈던 드라마만 한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연출가다.

“집에 먹을 거 없으니까 그것만 먹고 가.”

“예나 지금이나 냉정하시네. 이게 얼마짜린지나 알고 그런 말씀 하십니까?”

“너 나한테 부탁하러 온 거잖아. 이거 구하려면 최소 백만 원 이상은 줬을 텐데 그걸 그냥 줄 리가 없지. 뭔데?”

“크흠… 생긴 건 곰같이 생겼으면서 눈치는 빠르시네.”

“마누라 바람 핀 것도 몰랐는데 눈치가 빠르긴.”

“그 얘기는 또 왜 꺼내요? 알았어요. 형님, 나 한번만 살려줘요.”

“누가 네 형님이야? 꼴랑 술 몇 번 먹었다고 형님이냐?”

“꼴랑 몇 번이라고 하기에는 꽤 많이 먹지 않았습니까? 내가 형님 그 꼬장을 다 받아준 거 생각하면…”

“됐고, 뭔데 그래?”

본인 귀로 듣기 그랬는지 서둘러 입을 막는다.

“우리 작품 하나만 같이 합시다. 언제까지 이것들 끼고 살 거예요?”

“지도 하나 사들고 와 놓고는…”

“하여튼, 하나 합시다. 아무리 취미 생활도 좋지만 이거 뭐, 마법사가 골방 만들어 놓고 실험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답게 삽시다, 좀.”

“와이프랑 헤어지고 여자 본 지도 오래 됐으니 마법사 맞지. 어쨌든 그건 싫어.”

“우와… 이거 백오십만 원 짜립니다.”

“그거 우리 집에도 있어. 보여줄까?”

순간 경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 새끼가…’

“이거보다 더 비싼 걸로 사드릴게요. 헤어진 와이프 그만 잊고 보란 듯이 살아요. 애들도 이제 쪽팔린 거 아는 나이에요. 나중에 아빠가 이런 생활하는 거 보고 ‘우리 엄마 헤어지길 잘했다’ 이런 생각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 애들은 착해서 안 그래.”

“그래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피규어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거의 다 왔다.

“이거보다 훨씬 비싼 거로 해드린다니까요?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 드릴께!”

“진짜? 내가 원하는 모델로?”

순간 움찔했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말짱 헛거다.

“오케이. 대신 천만 원 이하로. 콜?”

“하아… 이거 평화롭던 삶에 미꾸라지가 한 마리 끼어드네. 장르가 뭔데?”

“막장드라마요.”

“막장드라마라… 재밌겠네.”

“역시 형님은 뭘 좀 아신다니까.”

평식과는 술 친구를 오래 하다 보니 이렇게 존대와 반말을 섞어서 쓰는데 그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와서 들이대는 이유가 뭐야? 너 옛날 사람 찾는 스타일 아니잖아.”

역시 한두 번 술 먹던 사이가 아니라서 그런지 우현의 속을 정확히 알고 있다.

“편성까지 받아 놓은 작품에 대본리딩하는 날, 피디가 못 하겠다고 날랐어요.”

“미친 놈이네?”

“아빠가 방송위원회 임원이래요.”

“아… 그럴 수 있지.”

“뭘 또 납득하고 그래요? 어쨌거나 막장드라마 못 하겠다고 깽판치니 어쩌겠어?”

“어린 놈이지?”

“그렇죠. 30대 중반이니까…”

“아직 인생을 덜 살아봐서 그래. 사실 드라마는 진짜 인생 못 따라와. 삶이 더 막장이거든. 막장만큼 재밌는 게 없는 건데…”

“제 말이 딱 그 말입니다.”

“흥! 웃기고 있네. 너 막장 싫어하는 거 내가 모르냐?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거 하는 거야? 막장은 유은하 스타일에 안 맞을 건데? 맞다. 이거 유은하도 하는 거냐? 나 걔 피곤한데?”

평식은 우현이 폐인 생활을 하기 전에 야인으로 돌아갔었기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거다.

“사실 형님이 형수님하고 헤어지고 이곳 내려와 산 지 얼마 안 돼서 저희 회사 망했어요.”

“유은하가 있는데 망했다고? 걔 혼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데?”

“어쨌든 그랬어요. 그래서 한동안 폐인 생활 좀 하다가 제가 회사 차렸어요. 제가 대표로 있죠, 하하.”

“뭐야,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해? 아… 이거 피곤한데?”

그는 마음에 안 들거나 내키지 않는 것들도 전부 피곤하다고 표현한다.

“불러 달래도 그렇게 안 부를 거면서… 어쨌든 이주희 작가라고 꽤 능력 있는 젊은 작가 하나 있어요. 내가 전속계약 했는데 이번에 드라마 하나 쓰자고 했더니 막장을 들고 왔네? 그런데 이게 좋은 거예요. 막장인데 재밌어.”

“네가 재밌다고 하면 진짜 괜찮은가 보다?”

“형님 제 성격 알죠? 제가 아무리 친하고 같은 식구라고 해도 작품은 날림으로 평가하지 않잖아요. 이거 진짜 괜찮아. 그런데 똥오줌도 못 가리는 얼빠진 놈이 진수성찬을 걷어차네? 그거 같이 드십시다. 형님은 앉아서 그냥 먹기만 하면 돼.”

“먹다 체하는 건 아니고?”

“자꾸 이렇게 간부터 볼 거예요? 어쨌거나 일단 이 수염 좀 어떻게 합시다. 아무리 봐도 문명의 혜택을 거부한 사람 같아. 좀 씻구요. 내일 점심 지나서 스케줄 잡을 테니까 내일은 나랑 같이 점심 먹어요.”

“너는 내가 아무런 스케줄도 없어 보이냐?”

“없잖아요, 있어요?”

“없기는 한데… 그래도 있을 수도 있잖아.”

“알겠으니까 일단 근처 미용실 가서 머리도 좀 깎으세요. 형님 예전에는 스타일 좋았는데…”

이렇게 한동안 달래고 그의 집을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 8시가 훌쩍 지난 후였다. 그의 집에서 저녁이라도 얻어먹으려 했지만 한사코 먹을 거리도 없고 미용실 가야 한다며 우현을 쫓아냈다.

배고픔에 뱃가죽을 부여잡고 오피스텔로 향하며 지여울 제작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점심 때 오늘 그 장소로 모이라고 해 주세요.”

“어머, 피디 구했어요? 누군데요?”

“윤평식 아시죠?”

“윤평식이면… 어? 설마 ‘엄마가 울잖아’의 윤평식요?”

“네, 맞아요.”

“그 사람 MBS 피디 아니에요?”

“몇 년 전에 그만두고 시골 내려가서 청승떨고 있었어요. 어쨌든 윤평식 피디 정도면 만족해요?”

“대만족이죠! 그럼 내일 모이라고 다시 연락 돌릴게요. 기자도 부르고요. 아, 근데 주연이 강소연 씨라고 말 했죠?”

“아니요. 말 안했습니다.”

“네? 안했어요?”

“당연하죠. 말했으면 그분이 하려고 했겠어요? 일단 앉혀놓고 기자가 카메라 들이대면 그냥 하게 돼있어요. 하나하나 설득하려고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그래도 되나…? 그 때 그 사건 있지 않았어요?”

“애들도 아니고… 이제 잊어야죠. 원래 작품 하다보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정들기도 하고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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