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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기대하고 고대하던…(3)
“왜? 모르는 사람이야?”
“응, 난 들어본 적 없는데? 그 전에 뭐 하던 친구래? 그 전부터 계속 다큐 찍었던 친구야?”
“아니, 그 전에 무슨 예능을 했었다고 하던데 왜 지금 다큐 하고 있는지는 안 물어봤어. 그냥 오빠를 안다고 하길래 당연히 안면이 있겠구나 했지.”
“흠… 생각이 안 나는데…”
“오빠 한 번 만났던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잘 안 잊어버리잖아. 그럼 아예 안 만났던 사람인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날 알지? 예능 쪽에 일 했었다니까 혹시 예전에 유니가 복면노래왕 나갈 때 나를 봤었나? 됐어. 뭐, 오다가다 봤겠지.”
“칫, 괜히 말 꺼냈네. 어쨌든 난 오빠만 믿을게.”
은하가 오기만 하면 천군만마나 다름없지만 괜히 모든 이목이 은하에게만 집중될까봐 내심 신경 쓰이긴 했다. 아직 별이가 주연으로 확정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반대로 은하 덕분에 회사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더 많은 협찬, 그리고 더 많은 캐스팅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무작정 거부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결국 자존심 문제인데… 끝내 그 자리에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구렁이 담 넘듯이 은하의 이적이 확정되어 버렸고 남은 건 그녀 회사와의 계약관계 정리뿐이었다.
“여기, 어제 부동산 돌면서 괜찮은 집 몇 개 찍어왔습니다. 전세로 계약하실 거죠? 아니면 월세?”
“당분간 월세로 지내자. 데뷔하고 난 다음에 거주지를 옮겨야 할 수도 있거든. 흐음… 이거 괜찮다. 가격도 적당하고. 공인중개사한테 약속 잡자고 해. 1년 계약으로 하자고 꼭 얘기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차량 인수는 어떻게…?”
“리스로 해야지. 신차 나올 때까지는 그 차 계속 타고 다니라고 해. 어느 정도나 걸린데?”
“한 달 정도 걸린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 작가는 어디쯤이래?”
“10분 전쯤에 통화하니까 거의 다 오셨다던데요? 어?”
밖에 민주의 음성을 들리는 걸 보니 이 작가가 도착했나보다.
“나는 나갈 테니까 일 보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 하고.”
“알겠습니다.”
이 작가는 오늘 대본리딩 있다고 어찌나 꾸미고 왔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을 하고 있었다.
“긴장했어요?”
“아휴, 전에도 한번 해봤는데 오늘은 더욱 떨리네요.”
“긴장 말아요. 어차피 연기는 손 댈 것 없는 사람들이니까 가볍게 인사하고 홍보 사진 정도만 찍는다고 생각해요.”
원톱으로 강소연이 끌고 가는 드라마인데다 그녀를 받쳐주는 주연급 연기자들도 하나같이 쟁쟁하다. 그러니 진짜 연기 실력을 가늠하는 자리라기보다는 ‘내 남편의 여자’ 홍보를 위한 자리라고 보는 게 더 타당했다.
이 작가를 데리고 방송사에 도착하니 벌써 수많은 제작진과 배우들이 와 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10분이나 일찍 왔잖아요?”
“그래두요. 하다못해 강소연 씨도 도착한 것 같던데… 들어올 때 봤던 하얀색 밴이 강소연 씨 차 맞죠? 전에 미팅할 때 본 것 같은데.”
“기억력 좋네요. 어! 마침 와 있었네. 가서 인사합시다.”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강소연이지만 이 자리의 주인공은 이주희 작가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기 위함이다.
“안녕하세요.”
“어머, 작가님 오셨어요?”
“이주희 작가님 오셨습니다.”
역시나 제작진들이 이 작가에게 시선을 모은다. 이 작가도 분위기를 알고 일부러 강소연에게 간단히 눈인사만을 하고는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녀의 옆자리는 피디인 오해성이 앉게 될 자리였다.
오해성 피디는 30대 중반의 피디로 상당히 젊다. 하지만 이미 로맨틱코미디를 두 편이나 성공시켜 젊은 나이임에도 벌써부터 TVM을 이끌어 갈 차세대 피디로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피디 치고는 상당히 깔끔하게 생겨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고 들었다.
“작가님 오셨어요?”
한창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오해성 피디가 급히 달려와 앉았다. 이 작가는 30대 초반이고 오해성 피디는 30대 중반이니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 같다.
“아, 네. 좀 늦었죠?”
“네, 조금 일찍 준비하시지 그러셨어요?”
이 작가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다음부터는 빨리 움직여야겠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본 우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캐릭터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뭔가 오늘 대본리딩이 쉽게 흘러갈 것 같지 않다.
정확히 약속시간에 이르자 오해성 피디가 소리쳤다.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내 남편의 여자’를 맡아 여러분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갈 오해성 피디라고 합니다.”
미처 사람들이 다 앉기도 전에 저렇게 자기소개를 해버리니 다들 서둘러 자리를 찾아갔다.
이 작가는 일부러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하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내 남편의 여자’를 쓰게 된 이주희입니다. 첫 작품이 잘 돼서 더 부담이 큰데 열심히 해서 더 큰 대박 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후 강소연을 시작으로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의 인사가 끝났다. 그 동안 우현은 계속 오해성 피디의 얼굴만을 주목했다.
‘하기 싫은가?’
그의 표정을 설명하자면 마치 식탁 앞에 앉아 반찬 투정하는 7살 아이 같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짜증난다는 그런 표정. 순간 열이 확 올라왔다.
“그럼 대본 읽을까요? 씬 1-4부터 읽죠.”
말하는 것도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기계적인 말투다. 그런 그의 태도 때문에 모든 연기자들이 전부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확 엎어?’
마음 같아서는 확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때 마침 이주희 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필사적인 눈빛으로 우현을 말렸다.
가까스로 참고 이후 진행상황을 보는데 30분 정도까지는 무난하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강새벽 씨! 거기서 왜 그렇게 대사를 쳐요? 그게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걸 알게 된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잖아요?”
주인공의 친구로 나오는 강새벽은 30대 초반의 여배우로 예쁘기는 하지만 아직 주연급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연기력만큼은 누가 뭐라고 하지 못할 만큼 인정받고 있는데 오해성 피디가 난데없이 그녀의 대사를 끊고 나오니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순간 쪽팔리고 당황스러워 입술을 깨물다가 오 피디를 향해 항변했다.
“여기 나오는 인숙이라는 캐릭터는 항상 남편에게 순종하는 스타일이잖아요. 남편이 바람을 폈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그렇게 성격이 급하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말하는 게 인숙의 성격 맞는 것 같은데요? 안 그런가요,
작가님?”
사실 대본 리딩에 피디가 참여하기는 해도 분위기를 리드하는 건 작가다. 그 캐릭터를 제대로 분석하고 왔는지는 작가보다 피디가 더 잘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현은 지금까지 수많은 대본리딩을 지켜보았지만 이처럼 어이없는 일은 처음이었다. 강소연만 신경 쓰고 왔는데 그녀조차도 짜증나는 얼굴로 오 피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저는 글을 쓸 때 새벽 씨와 같은 생각으로 썼으니까 그대로 연기 계속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주희 작가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되니 대놓고 피디와 작가의 생각이 달라지게 된 거다.
우현은 급히 조감독을 불러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자를 내보내고 지여울 제작 피디를 호출했다.
“지여울 제작 피디 어디 있어요? 여기 안 온 거 아니죠?”
“아…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전화 할게요.”
그녀는 1층에서 잠깐 회사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우현의 말에 놀라 급히 올라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오기 전에 상황이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래가지고 시청자들 눈길을 잡을 수 있겠어요? 속만 터지지? 처음부터 확 질러 줘야 느낌이 살죠.”
“잠깐 쉬죠. 작가님 저 좀 볼까요?”
더는 참기 힘들어 앞으로 나가 이주희 작가를 불렀다. 오 피디의 얼굴은 구겨졌고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서로 눈치만을 보는데 지여울 제작 피디가 올라왔다.
“왜 그러세요?”
“오해성 저 친구 왜 저래요? 맡기 싫은 거 억지로 맡겼어요?”
“잠시만요.”
그제야 분위기를 읽어낸 지 피디가 얼른 오 피디에게 달려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동안 그러더니 지 피디가 오 피디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뭐야? 저 새끼?”
“그러게요. 드라마는 이제 두 번째라서 그런가요? 도무지 적응 안 되네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누구 오 피디랑 같이 일해본 사람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스태프 중에는 그와 일해본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저런 사람이 아니에요. 얼마나 젠틀하고 사람을 잘 이끌어 주는데요? 지금 저는 몰래카메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아… 저렇게 경우 없는 친구가 아닌데…”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갑자기 심경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이나 사라졌던 지 피디가 돌아왔다.
“죄송해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뭐예요?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데요?”
“그게… 실은 원래 맡기로 했던 피디가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대타로 오해성 피디한테 맡겼거든요. 그런데 오 피디는 막장 드라마 하기 싫다고…”
“아… 그래서 지금 첫 날부터 꼬장 부리는 거예요?”
“오늘만 그러다 말 거예요. 한번만 넘어가 주세요.”
그럴 수는 없다. 막말로 오늘만 그럴지, 촬영 내내 저럴지 누가 알까?
“못 넘어가요. 피디를 새로 세우든지 아니면 여기 와서 사과하라고 하세요.”
“대표님, 지금 와서 누구를 세우겠어요? 편성도 확정됐고 첫 방 날짜까지 나왔어요.”
“1, 2주 늦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이 작가님 벌써 7회까지 대본 나왔구요. 이대로 가다가는 중간에 드라마 엎어집니다. 그 꼴 보시려고 그래요? 저는 못 봅니다.”
“대표님…”
“솔직히 말해봅시다. 저 친구 누구 빽이라도 있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강소연 앞에서 꼬장을 부려요? 기자들도 있는데? 이 작가는 지 들러리야?”
“하아…”
지여울 피디도 머리를 감싸쥔다.
“빽이 아니라 그냥 오 피디 성격이 그래요.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려고 하거든요. 그래도 마음에 들어서 추진했던 건 정말 잘하는 친구기 때문이거든요. 오죽하면 해외에서 하는 드라마 상도 탔었다니까요? 단지…”
“막장이 싫으면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죠.”
그 때, 오해성 피디가 씩씩거리며 지 피디에게 다가오더니 소리쳤다.
“나, 안 합니다. 피디 새로 구해보시든가 알아서 하세요. 우리나라가 이딴 작품이나 만드니까 미국 드라마를 못 쫓아가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해주려는데 지여울 제작 피디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오 피디 면전에 집어 던졌다.
“뭐? 야! 너 이러고 나가면 이 바닥에서 발 붙이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미친 새끼 아냐? 이거!”
“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