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감기엔 모과차(1)
“누구길래 그렇게 힘을 주세요?”
“강소연이요.”
“네? 강소연이요?”
별이의 첫 영화 데뷔작인 최철성 감독의 ‘밀실’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그녀. 탁월한 연기력과 아름답고 우아한 외모로 톱스타에 반열에 올라있지만 흥행 운이 없어 은하에게 한 때 놀림을 받기도 했다.
“어때요? 캐스팅 죽이죠?”
“그렇네요.”
이름값만으로 보면 환상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강소연이 드라마를 찍었던 게 도대체 언제 적이던가? 아마 10년도 더 넘었을 거다. 영화를 해도 원톱 주연만을 고집할 정도로 자존심 강한 그녀가 드라마를 한다니… 그것도 지상파도 아닌 종편을 말이다.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니까요.”
“마이더스에서 확정 시켰어요?”
“네. 강소연 씨랑 미팅 약속 잡았어요.”
“아…”
분명 대박 캐스팅인 게 맞긴 하지만 이제 두 번째 작품을 쓰는 이주희 작가를 생각한다면 걱정부터 된다. 배우의 힘이 너무 세면 작가를 잡아먹으려는 경향이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
“왜요? 싫으세요?”
“아니에요. 잘 됐네요.”
“그렇죠? 하하!”
잘 됐다는 말은 강소연이 캐스팅돼서가 아니라 이주희 작가가 캐스팅 권한을 자신에게 전부 넘겨줬기 때문에 한 말이다. 미팅 자리에 나가서 알아볼 생각이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종편에서 하는 막장 드라마를 선택했는지.
지여울 제작 피디를 보내고 난 뒤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오늘은 지나가 촬영하는 액션 영화인 ‘붉은 여우’가 마지막 촬영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밥차나 간식을 쏘면서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마지막 촬영에는 얼굴을 비춰주어야 한다.
현장으로 가면서 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목소리가 듣고 싶기도 했고 묻고 싶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바빠?”
“아니야, 방금 끝났어.”
맞다. 이 시간은 피부과에서 관리 받을 시간이라고 했다. 조금만 빨리 전화했으면 전화를 못 받았을 텐데 타이밍이 좋았다.
“혹시 강소연 이야기 들은 거 있어?”
“그 언니가 왜?”
“아니, 이번에 우리 소속 작가인 이주희 작가 신작 들어가는데 강소연이 캐스팅 미팅에 나오겠다고 들었거든.”
“뭐? 그 언니 드라마 찍어?”
은하도 처음 듣는 이야기 같다.
“너도 몰랐어?”
“몰랐지. 매니저한테도 들은 게 없는데? 그 언니가 드라마를 찍는다는 정보는 회사에서 안 퍼질 리가 없는데? 뭐지?”
“흐음… 아무래도 결정난 게 아니니까 회사에서도 말하지 않나보다.”
“그렇겠네. 그 언니 성격에 기사 나갔다가 안 됐다는 말 나오면 본인 잘못이 아니더라도 쪽팔려 할 걸?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구나?”
“아니야. 목소리도 듣고 싶었고…”
“칫! 알았어. 일단 끊어, 매니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응, 알겠어.”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다니 더 궁금해지긴 한다. 아니면 그 때 작품이 잘 되면 자신과 같이 일해 보겠다는 말의 연장선상인가? 어쨌든 만나봐야 알 것 같다.
마지막 촬영 현장은 경기도 외곽의 짓다 만 아파트 건설현장. 차가운 콘크리트 더미만 둘러싸고 있는 삭막한 곳이지만 지금은 수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로 인해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다.
“오셨어요?”
손에 핫도그를 쥔 진명이 우현을 반긴다.
“입에 케첩 묻었다. 다들 좋아해?”
“그럼요. 안 그래도 출출할 시간이지 않습니까? 대표님도 하나 드세요.”
이미 며칠 전에 간식으로 프랜차이즈 핫도그와 음료수를 예약시켜 놓았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다.
“난 됐다. 지나는?”
“지금 유정완 감독님이랑 무술감독님하고 액션 시퀀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뭐, 일방적으로 교육을 받는 거지만요.”
“잘 하고 있어?”
“액션이요?”
“응, 연기야 원래 기본 이상은 하잖아.”
“그렇죠? 하하. 저도 놀란 게 우리 지나가 이 정도까지 액션을 해낼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진짜 독하게 마음먹었는지 남자들이나 하는 액션까지 척척 해냈습니다. 진짜 한국판 킬빌이 나올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 오늘 촬영이 마지막이긴 한 거야?”
“네, 벌써 여기서 오늘만 삼일 째 촬영이고 지금 찍고 있는 씬도 이미 몇 번이나 찍었던 거 다시 재촬영 하는 거라서요. 한번 더, 한번 더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유 감독이 오늘을 넘기지 않을 거라고 말했으니까 오늘 내로 촬영 마무리 지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제작비 오버됐다고 제작사 측에서 울상이래요.”
“그거야 그네들이 대출을 땡기든 해서 막겠지. 우리는 신경 쓸 필요 없고, 지나 다치지나 않는지 그거나 신경 쓰면 된다.”
“후우… 그것 때문에 요새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우리 지나도 그래요. 온 몸에 멍이 안 든 데가 없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누구한테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대요. 뭐, 사실 맞기야 맞긴 했지만… 어쨌든 이거 끝나고 지나 몇 달 쉬어야 합니다.”
“그래라. 내가 언제 찍기 싫다는 거 억지로 시킨 적 있냐? 쉬고 싶으면 마음껏 쉬라고 해. 우리 회사 그렇게 급하지 않다.”
“아니, 뭐, 대표님께서 억지로 시켰다는 게 아니라… 혹시 지나가 이거 끝나고 바로 다른 작품 하겠다고 하면 좀 말려 달라는 거죠.”
“알았다, 인마. 쓸데없는 걱정은… 그리고 사람이면 이거 찍고 바로 딴 거 하자고 하겠냐?”
“그렇겠죠?”
이후 진행된 촬영은 밤 10시를 넘겨서야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기념촬영을 야밤에 모두 모여 조명을 환하게 켜 놓은 채로 찍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오늘 회식 빠지는 사람 있으면 안 됩니다! 모두 차로 이동할 테니까 30분 안에 정리 끝내주세요!”
조감독이 돌아다니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유정완 감독은 며칠 씻지도 못했는지 머리는 잔뜩 엉클어져 있었고 수염도 덥수룩했다.
“아, 김 대표님 오셨어요? 아까 핫도그 잘 먹었습니다. 밥차랑 간식을 자주 보내주셔서 제작비 세이브했다고 제작사에서 엄청 좋아하더라구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어떻게, 작품은 잘 나올 것 같나요?”
“후반 작업을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제가 생각한대로는 나온 것 같네요. 만족했습니다.”
“그런가요? 하하하!”
빈말을 잘 하지 않는다는 유 감독이 만족한 촬영이었다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나머지 가장 중요한 영화 흥행은 이제 하늘에 달렸겠지만 느낌이 좋다.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네? 무슨 축하…?”
“유니 씨가 대표님 소속사라면서요? 쉬면서 스태프들이 하는 이야기가, 모든 음원차트 줄 세우기 하셨다고 하던데요?”
“아하… 감사합니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면 까메오라도 부탁할 걸 그랬습니다.”
“다음에 작품 찍게 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까메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드라마에도 까메오로 잠깐 나왔었거든요.”
“오… 정말요?”
“네. 물론 본격적인 연기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연기력이 필요 없는 부분으로 살짝 나오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유 감독님 작품이면 저희가 영광이죠.”
“알겠습니다. 꼭 기억해두죠.”
눈을 반짝이며 묘한 웃음을 짓는 걸 보니 언젠가 한번은 연락할 것 같다. 뭐, 회사 입장에서는 환영이니 기꺼이 이용당해 줄 용의가 있다.
그날 밤 12시에 시작된 회식은 다음날 8시가 돼서야 끝났다. 원래는 유지나와 수고했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려했는데 분위기가 먹고 마시고 죽자는 상황이라 안주만 축내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지나도 힘들었는지 술 몇 잔에 쓰러져 새벽 6시에 일어나 다시 술을 먹으며 자리를 지키다 진명에게 업혀 집에 들어갔다.
하필 밤새고 출근한 날이 바로 은하와 약속을 잡았던 금요일이다. 아침에 해장국집에서 해장하고 사우나에서 내리 6시간을 뻗어있다가 오후 4시가 넘어서 어슬렁거리며 회사에 나타난 우현은 직원들 눈치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인 11시보다 조금 일찍 은하 동네 포차에 들어섰다.
이곳은 은하가 우현의 볼에 입맞춤을 했던 운명의 장소. 파란색 접이식 간이테이블 4개, 그대로다. 두 테이블에 손님들이 있고 예전의 그 구석 자리는 비어있다.
자연스레 우현은 흐뭇한 기억이 있는 그 테이블에 앉았다.
벌써 추억이 된 것 같네, 훗.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오뎅탕이요!”
이모가 금세 소주와 오뎅탕을 내어오고선 우현에게로 스윽 몸을 기울인다.
“유은하 남자친구, 맞지?”
뜨헉!
“예에? 아, 아닌데요…”
말은 아니라고 하는데 우현 스스로도 얼굴에 티가 다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아유, 아니긴, 뭘. 비밀로 해줄게. 내가 물장사만 몇 년인데, 척보면 딱이지.”
이모는 다 알고 있으니 발뺌해도 소용없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린다.
“아, 아니라니까요. 진짜 아니에요.”
젠장, 젠장.
우현이 양 손바닥을 펼쳐 흔들어댔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아이구, 알았어, 알았어. 나 혼자만 알고 있을게. 조금 있다가 유은하 올 거지? 여기 잔 하나 더.”
이모는 잔 하나를 맞은 편 자리에 놨다.
때맞춰 이모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은하가 들어온다.
망했네.
“오빠, 일찍 왔네?”
“거봐. 내가 은하 씨 잔까지 놔뒀어. 둘이 좋은 시간 보내, 호호.”
은하는 어리둥절해 하며 자리에 앉고 우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연애할 때 본인들은 완벽히 숨겼다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더니. 진짜인가?
“다 들켰네.”
“뭐가?”
“저 이모가 나더러 유은하 남자친구랜다. 아니라고 했는데 다 안대, 아휴.”
“당연히 알겠지.”
“뭐?”
“저번에도 이모가 일부러 자리 비켜준 거야.”
“진짜?”
“오빤 작품 보는 눈은 최곤데, 일상생활 눈치는 꽝이야. 큰일이야, 큰일. 쯧쯧.”
놀란 토끼 눈을 한 우현을 앞에 두고 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아, 진짜 조심해야겠다. 사진이라도 찍히면 큰일이잖아. 가만, 그런데 어째 넌 몸을 사리는 거 같지가 않다?”
“‘사즉생 생즉사’ 몰라? 안 걸리려고 오버할수록 더 걸리는 거야. 괜히 몸 사리면 더 오해 받는다구. 그리고 오빤 원래 내 매니저였잖아. 핑계 댈 거리도 있고.”
거기서 이순신 장군님의 명언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여튼 나보다 더 대범하다니까.”
“이렇게?”
은하가 생글거리며 손으로 턱을 괴더니 입술을 내밀고 뽀뽀하듯 쪽쪽 거린다.
“얘가, 얘가 미쳤나봐.”
얼른 손바닥으로 은하 얼굴을 가렸다.
“헤헤, 오빠 놀리는 거 재미있어.”
“얼른 먹고 일어나자. 저 이모, 너무 신경 쓰이고. 넌 위험하고.”
소주 한 병과 오뎅탕을 얼른 먹어치우고 여전히 능글맞게 웃는 이모를 피해 테이블에 돈을 놓고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잠깐 걸어 은하네 집 근처에 세워둔 우현의 차에 탔다. 조용히 은하 얼굴 보기에는 차만한 장소가 없다.
잠깐 얘기하다가 대리 불러서 가야지.
잔잔한 노래 리스트를 플레이 시키고 그동안 못 다한 얘기들을 쏟아놓았다. 유니 신곡 얘기며 우희연, 강진벽, 민씨 형제 얘기까지. 아까 포차에서는 빨리 나오려고 얘기를 거의 못했기 때문에.
새벽 1시가 넘어가자 은하가 일어나려 한다.
“우리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요즘 스케줄이 계속 빡빡해서.”
“어, 어…”
“오빠, 조심해서 들어가.”
아쉽다, 이대로 헤어지기엔… 너무.
“집에 라, 라면 있어?”
아… 결국 라면 드립을 날리는구나. 실패하기만 해봐라.
“라면? 나 라면 안 먹는 거 알잖아.”
경수 이 새끼, 백전백승이라더니.
“어? 아, 그렇지. 너 라면 안 먹지.”
“그런데 갑자기 웬 라면?”
“쿨럭. 꽃샘추위라서 그런가. 기침도 나오고 으슬으슬 춥고 그러네. 감기인가? 쿨럭 쿨럭.”
발 연기 시전하시고.
“푸훗. 라면은 없고, 좋은 모과차 있는데… 감기엔 모과차가 좋대.”
“어, 어… 라면은 개뿔. 감기엔 모과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