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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이유(3)
‘예종의 여인’ 그간 촬영 진행된 내용은 이렇다.
세자빈(김별)은 다연(한지애)이 만든 음식이 독특하고 맛있자 세자(송민기)와 만나는 자리에 그 음식들을 내어오라 명한다. 세자 역시 새로운 음식에 호기심이 생겨 세자빈과의 만남 이후에 음식 만든 사람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세자는 다연을 만나게 되고 조선의 여인과는 다른 말투, 행동, 생각을 가진 다연에게 매료되어 간다.
세자가 음식을 칭찬하며 모처럼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드디어 세자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며 들떴던 세자빈은 나중에서야 세자가 다연을 마음에 두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에 격분한 세자빈이 다연의 뺨을 때리고 몰래 고문까지 한다.
그간의 내용에 기본적인 사극 PPL은 이미 들어갈 만큼 들어간 상태다. 한복과 장신구, 고가구와 고미술품, 전통 음식과 궁중 요리 등.
“내가 벌써 현대 시대의 브랜드들도 넣을 만큼 넣었다구. 서빙고 촬영할 때 안 넣어도 될 현대 회상씬 넣어서 ‘제펠 냉장고’ 나왔지. 그리고 다연이랑 세자랑 음식 만드는 장면에 ‘상어떡볶이’랑 ‘교동치킨’ 나오게 했잖아. 그리고 또… 아, 뭐 이미 찍은 거 말해서 뭐해.”
보통의 드라마라면 그저 화면에 잠깐 나오게만 해도 된다. 배우의 손에 핸드폰만 들고 있게 해도 그 자체가 PPL이 되는 거다.
하지만 사극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정말 등장해서는 안 되는 상품들은 사극에 PPL요청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종의 여인’은 다르다. 현대와 조선시대가 다 나온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PPL의 품목이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송민기와 한지애가 주연이니 자꾸 PPL이 들어오나 보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어깨춤을 출 일이다.
“그런데요?”
“아니 글쎄, ‘오션나라’알지?”
“네, 워터파크 잖아요.”
“거기 PPL이 들어왔잖아. 미친 거 아니니? 무슨 사극에 ‘오션나라’야?”
윤 작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럼 또 다연이가 현대에서 워터파크 갔던 장면 회상씬을 넣어야 하는 거예요? 조선시대에 ‘오션나라’라는 말도 쓸 수가 없잖아요. 회상씬 영상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조선시대에 현대문물이 갑자기 등장할 수는 없으니 꼭 영상으로 내보내야 하는 거라면 현대에서의 삶을 회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그럴만한 내용이 아니잖아. 서빙고씬 때 냉장고 생각하는 건 요리와 관련된 거니까 개연성이라도 있지. 워터파크는 개연성이 없다구. 뭐, 세자랑 다연이랑 계곡에서 물놀이라도 해야 해? 그게 말이 되냔 말이지! 물놀이를 한다고 쳐도 거기서 갑자기 워터파크를 떠올린다는 것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잖아. 작품 망칠 일 있나.”
“네, 그렇죠. 까다롭네요.”
“게다가 요구사항이 더 웃겨. ‘오션나라’ 광고문구 ‘하태하태’를 꼭 넣어달라는 거야! 진짜 제정신들이 아닌 거지.”
윤작가는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했다.
“네에? 그걸 도대체 어디다가 넣어요?”
“내 말이 그 말이잖아. 그것뿐만이 아냐. 워터파크니까 여름에 홍보가 돼야 할 거 아냐? 그러니 여름이 가기 전에 방송 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뒷부분 대본 수정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찍어놨던 부분을 다시 찍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어휴, 그러네요. 앞으로 촬영할 부분들은 날씨가 쌀쌀해질 때쯤 나가게 될 테니. 어떡하죠?”
“아니, 지 피디도 너무하지. 돈을 많이 받아오더라도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어디에 어떻게 들어갈 정도는 되겠다, 싶은 걸 따와야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지만 덜컥 ‘하태하태’를 넣어주겠다고 하면, 뭐, 작가는 아무렇게나 막 쓰면 되나? 작품은 엉망이 되고?”
“하아… 지 피디라고 어려운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어쩔 수 없었나 봐요. 진정하세요, 작가님.”
우현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윤 작가를 진정시키는 일밖에 없다. 당장에 우현에게도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고, 이미 계약된 PPL을 거부할 수도 없다. 결국 작품에 PPL을 녹여내야 하는 작가의 몫인 거다.
어찌됐건 지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정도 사안에 대해서는 항의를 해줘야 다음에도 이런 어이없는 PPL을 받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제펠 냉장고도 오버예요. 아무리 회상씬을 넣어준다고 해도 엄연히 사극입니다.”
“저도 알죠, 대표님. 하지만 제작비를 생각해주세요. 윤 작가님 회당 원고료만 해도 얼마예요? 게다가 남녀주인공 출연료랑 사극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지금도 촬영시간 조금만 길어져도 손이 벌벌 떨린다구요. 특히 이거 사전제작이라 남들 한 달 걸릴 촬영을 한 달 반은 잡아먹어야 하니 저희라고 오션나라 받고 싶었겠어요? 저도 윗선에서 하태하태 집어넣으라는 얘기 듣고 토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번에는 정말 죄송해요. 딱! 이번만 넘어가주세요. 저도 다시는 이런 PPL 안 받을게요.”
“후… 알겠습니다.”
어차피 전화한다고 오션나라를 뺄 수도 없는 일이기에 이쯤하기로 했다.
윤 작가랑 통화한 김에 얼굴도 비출 겸 ‘예종의 여인’ 촬영장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언제 한 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다음날, 캔커피 두 박스를 사들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한창 촬영 중이어서 별이와 감독에게 인사하는 건 잠시 미루고 상준에게로 향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응. 차 뒤에 캔커피 있으니까 돌려.”
“네.”
“혹시 대본 다 가지고 있니?”
“별이 거는 이번 회 것만 있고, 제가 보던 거는 차에 다 있습니다.”
“어, 네가 보던 거 다 가지고 와봐.”
“네.”
우현은 대본을 가지고 다시 차에 탔다. 현대 문물 PPL 들어간 부분들을 빠르게 찾아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나오는 것들은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궁금했다.
[다연 : 세자저하, 이곳 교동에 닭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하께 맛있는 닭요리를 맛보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세자 : 그래? 닭죽 같은 것이냐?
다연 : 아니옵니다. 닭을 기름에 튀길 것입니다.
세자 : 구미가 당기는 구나, 어떤 맛일지. 수라간 나인들에게 기름을 준비하라 명하겠다.
…
다연 : 이것이 닭튀김이옵니다.
세자 : 정말 맛있구나. 이곳 교동에서 만든 닭튀김이니 이것을 ‘교동닭튀김’이라 하면 되겠구나.]
[다연 : 히익! 이것이 무엇입니까?
수라간 나인 : 포항에서 진상되어 올라온 상어다.
다연 : 상어라구요? 세상에…
수라간 나인 : 저하께서 상어고기를 좋아하신다.
다연 : 이 떡은…?
수라간 나인 : 후식으로 가래떡을 꿀에 찍어 드시곤 하시지.
다연 : 혹시 이 가래떡, 제가 요리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수라간 나인 : 그러려무나. 저하께서 네 요리를 좋아하시니.
…
세자 : 이것이 무엇이냐?
다연 : 떡볶이라고 하옵니다. 떡과 고기, 야채에 장을 넣고 볶았습니다.
세자 : 과연 특이하구나. 그동안 떡은 후식으로만 먹었는데 이렇게 해놓으니 상어고기와 같이 먹어도 될 만큼 근사한 요리가 되었구나, 하하.]
대놓고 PPL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랴. 모두 현대 회상씬으로 넘겨버릴 순 없지 않은가.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도 PPL인줄 뻔히 알면서도 드라마를 보다가 교동치킨과 상어떡볶이 주문을 하게 될 거다.
당연히 해당 업체에서도 영상으로 쓰윽 스쳐 보여주고 지나가는 것보다 저렇게 해주면 훨씬 좋아한다. 윤 작가가 이렇게 써주는 능력이 있기에 사전제작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PPL이 들어오는 걸 거다.
[다연 : 저하, 서빙고에서 얼음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자 : 그래, 나도 들었다.
다연 : 주먹 만한 얼음 한 덩이만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세자 : 많이 더우냐?
다연 : 네. 더우니 제가 시원한 얼음 후식을 만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세자 : 하하, 역시. 네 요리는 언제나 환영이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
세자 : 이게 얼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다연 : 얼음을 갈아보았습니다. 그 위에 팥과 인절미를 얹어보았습니다.
세자 : 얼음이 눈처럼 변하였구나. 참으로 신기하다. 정말 입안에서 눈 녹듯 녹는구나. 이것은 얼음이 눈으로 변한 것이니, ‘얼음 빙’자에 ‘눈 설’자를 더해서 ‘빙설’이라 부르면 되겠구나.]
[다연 : 내가 진짜 조선시대에 온 건가?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꼬르륵… 꼬르륵…
다연 : 아, 배고파. 벌써 밤이 됐네. 먹고 잘 만한 데가 어디있지?
두 명의 상인이 지나간다.
상인 1 : 어두워져서 큰 바위 넘기는 힘드니 오늘은 그만 쉴까나?
상인 2 : 여기 어뗘?
상인 1 : 그래, 오늘은 이 주막에서 하루 묵음세.
다연이 그들을 따라간다.
다연 : 래미암(來美巖)주막? 나도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다.]
대사로 숙박앱과 아파트 PPL을 다 넣어버렸다. 윤 작가도 어지간히 힘들었나보다. 그래, 다 넣어주마, 뭐 이런 심정으로 쓴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휴식시간이 되었는지 별이가 다가왔다. 우현은 차에서 내려 별이와 캔커피를 하나씩 손에 들었다.
“대표님, 대본 보고 계셨어요?”
“응. 윤 작가님이 어떻게 썼는지 궁금해서. 그동안 보질 못했거든. 촬영은 잘 되니?”
“네. 며칠 전에 한지애 선배님 뺨 때리는 씬 찍을 때 힘들었던 거 빼고는 좋아요.”
“후후, NG 많이 냈어?”
“세 번이요. 한 번에 잘 해야지, 하고 엄청 다짐했는데 안됐어요.”
“뺨 때리는 거 처음이라서 그렇지. 그것도 요령이 있는데, 자주 때려봐야 요령도 생기는 건데 그럴 일이 없으니. 괜찮아, 한지애 씨도 다 알거야.”
“그래도… 한 번에 끝내겠다고 처음에 세게 때렸거든요. 하아… 그런데 ‘다시’라는 소리 듣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다구요. 그러고 나니까 다음번엔 또 너무 약하게 때려서 또 NG가 나고…”
“그랬겠네. 짐작이 된다.”
“그 날, 저한테 뺨 맞아서 볼은 벌겋게 되고 또 고문 당하는 씬 촬영하느라 여기저기 멍들었대요. 죄송해죽겠어요.”
별이는 진짜 미안한지 울상이었다.
“하하, 네가 직접 고문한 것도 아닌데, 뭘.”
“세자빈이 지시한 거니까 괜히 제가 한 것 같은 거 있죠. 저 때문에 멍든 것 같고.”
그때 상준이 다가왔다.
“재촬영을 해야 한대. 대본이 바뀌었다네. 여기 수정본, 방금 나왔대. 대표님 것도 가져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우현은 윤 작가가 '오션나라‘ PPL을 처리했음을 직감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별이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한지애 선배님 고문 당하는 거 다시 찍어야 하나 봐요! 하필 여기가 수정이네.”
‘오션나라’ PPL은 한지애 고문씬에 낙점이 되었다. 별이는 이미 멍이 많이 든 한지애가 다시 촬영을 해야 한다는 것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고 우현은 PPL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바뀐 내용은 세자빈이 한지애를 고문할 때, 물고문을 추가한 거다.
[상궁 : 마마, 이 년이 정신을 잃었사옵니다.
세자빈 :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기절을 해? 내, 시원하게 정신이 들게 해주마. 물을 붓거라!
상궁 : 명 받들겠습니다. 하 별관! 물을 부으라신다.
나인 : 이보게, 하태! 하태, 물을 가득 가져와서 시원하게 부어주어라!
하 별관은 나무로 만든 통에 물을 가득 담아 와서 다연에게 들이붓고 다연은 힘겨워하며 정신을 차린다.
세자빈 : 시원하겠구나.]
수정된 대본을 보던 우현은 어이가 없어 먹던 커피를 뿜어버렸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