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열정의 결과(5)
“아! 그게 마음에 안 드시면… 뒤에 다른 것도 많아요. 열 개를 써왔거든요. 여기, 여기…”
이 작가는 조금은 다급하게 노트를 넘기며 다른 글들을 보여주었다. 우현이 한 번 더 읽어보며 뜸을 들인 걸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그게 아닌데. 일단 더 써왔다니까 그것부터 보고 말하자.
“네? 열 개요?”
“네. 멜로디에 한 가지 내용만 어울리는 건 아니니까요. 다른 사랑얘기도 있고, 또 밝은 멜로디지만 이별 얘기도 있어요. 밝은 멜로디에 우울한 내용을 얹어도 다른 맛이 나니까.”
그녀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설명을 곁들였다.
“어휴, 이렇게나 많이…”
놀란 우현은 노트를 넘기며 하나씩 읽어보았다. 중간 중간 그녀가 작업한 흔적들이 번져 새까매진 종이들이 많다.
“손님도 별로 없는 커피숍에서 할 게 딱히 없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핸드폰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 동안 써놓은 시가 꽤 있는데, 그 중 멜로디에 어울릴만한 것들을 뽑아서 음률에 맞게 단어와 문구들을 수정한 게 일곱 개예요. 그리고 대표님 만난 이후로 새로 쓴 게 세 개구요.”
설명하는 이 작가의 얼굴과 노트를 번갈아 보며 작업한 글들을 전부 읽었다. 버릴 게 없을 정도로 다 좋았다.
“그래도 일을 하면서 하기엔 빠듯했을 텐데, 정말 열심히 했네요.”
결과물과 그녀의 성실함과 열정에 모두 만족하며 새까매진 노트를 주루룩 한 번 더 넘겨 본 후 이 작가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쌍꺼풀 없는 얇은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두덩이에 핑크빛 아이섀도를 바르고 안경테에 가려져있어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그 동안은 그냥 시간 때우기로 쓴 게 대부분이에요. 그 마저도 최근엔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죠. 시집이 팔리질 않으니 다음 출판은 꿈도 못 꾸고. 그러니 ‘내가 이걸 계속 써서 뭐하나, 누가 읽어줄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만 들었거든요. 아무튼 대표님 덕분에 간만에 글에 빠져 살았네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마주잡고 특유의 차분하고 가냘픈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기분 좋게 일했다니 나도 덩달아 좋아지네요. 결과물이 좋지 않았다면 그저 기분 좋은 한 때의 추억으로 남았을 겁니다.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작사료를 드리더라도 곡에 붙이지 않을 거거든요. 하지만 글을 보니 역시 ‘숨어있는 인재’가 맞았네요. 작가님은 ‘감’이 있어요. 열 개의 글 중에 ‘솜사탕’을 먼저 들이민 것도 이유가 있겠죠. 그게 바로 ‘감’입니다. ‘솜사탕’을 타이틀곡에 쓸 겁니다.”
“정말요?”
처음으로 활짝 웃는 그녀를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 글들을 보니 이번 유니 앨범의 다른 곡에 쓸 수 있을 법한 가사들이 있네요. 멜로디에 따라 다시 수정을 하면 곡에 붙일 수 있겠어요. 내가 생각하는 몇 곡이 있는데, 어때요? 작업을 더 해보는 건?”
“아, 저야 너무 좋죠. 얼마든지요. 멜로디 듣고 새로 쓸 수도 있어요. 아님 예전에 써 두었던 것들 중 어울릴 만한 걸 다시 끄집어 낼 수도 있구요.”
“좋아요. 그리고 온 김에 유니 얼굴도 한 번 보고 가요. 녹음실에 있을 거예요.”
유니가 녹음실에 있는 걸 확인한 후 이 작가를 데리고 녹음실로 향했다.
“어머, 연예인 처음 봐요! 너무 예쁘시다!”
“하하, 저도 작사가님 처음 봬요. 원래 시인이시라구요? 저도 시를 좀 쓰는데… 대표님이 반대하세요, 히히.”
유니는 우현을 흘긋거리며 다 들리는 귓속말을 한다. 그리곤 마치 원래 알던 사이처럼 여자들만의 수다를 떨다가 이 작가가 써온 가사를 붙여 노래를 한 번 불러보기로 했다.
“하아… 부끄럽네요. 열심히 쓰긴 했는데 막상 유니 씨가 직접 부른다고 하니…”
“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제대로 살려서 부를 거니까요!”
인사하자마자 유니는 자연스럽게 이 작가를 언니라고 불렀다.
하여간 붙임성 하나는 끝내준다.
유니는 몇 차례 흥얼흥얼 하더니 이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불러낸다.
“좋은데요?”
호준도 마음에 들었는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다음날, 유니의 졸업식이 있어 아침에 잠깐 회사에 들렀다가 유니의 학교로 향했다.
“우왕! 대표님 진짜 오셨네요?”
“그럼 내가 진짜 오지, 가짜로 오냐?”
“히힛.”
“여기.”
우현은 꽃다발과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헉! 이것은 졸업선물?”
유니는 눈이 반달이 되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래. 잘 써라.”
우현은 유니의 졸업식을 앞두고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인이어’를 해주기로 결정했다. 인이어는 가수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아이템이다. 인이어 없이는 무대에서 자신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노래가 엉망이 되어버린다. 이미 유니가 쓰는 인이어가 있긴 하지만 더 좋은 것으로 해주고 싶었다.
“아참, 저도 대표님께 드릴 게 있죠.”
“응?”
“쨘! 쵸콜릿이에요. 발렌타인데이잖아요. 쵸콜릿 주는 여자도 없을 대표님을 걱정하는 제가 미리 준비했죠. 우리 대표님 장가도 가셔야 하는데… 저는 자나 깨나 대표님 걱정이라구요.”
“별 쓸데없는 걱정은…”
우현은 피식 웃으며 유니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줬다.
‘그거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야, 인마. 흐흐’
유니는 꽃다발을 엄마에게 맡겨두고 일단 상자의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저 기대하는 눈빛. 아마 아주 마음에 들 거다, 짜식.
“어머머! 대표님, 진짜 예뻐요!”
유니는 소리를 질러댔다. 안 그래도 유명 가수라며 졸업식에 온 사람들이 죄다 쳐다보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방방 뛴다.
전에 떠 두었던 유니의 귓본에 맞추어서 흰색의 인이어에 핑크색 유니콘을 그려 넣었다. 누가 봐도 유니의 인이어다.
이럴 땐 시크하게 나와줘야지.
우현은 씨익 웃어준 다음 먼저 졸업식장을 나왔다. 오는 길에 유니한테 카톡 폭탄이 왔다. 너무 예쁘다며 세상에 이런 대표님이 또 있겠냐는 뭐 그런 온갖 찬사들이 이어졌다.
거기에 더불어 은하에게서도 이모티콘 쵸콜릿이 왔다. 이렇게라도 쵸콜릿을 받은 게 어디냐며 스스로 위안해본다.
유니의 졸업식이 끝나고 마침 주말이 되자 이번에는 오피스텔에서 쉬며 출근하지 않았다. 그간 쉬지도 못하고 일하느라 너무 무리했는지 허리와 다리에 통증을 느끼는 바람에 마사지를 받고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는 호사를 누렸다.
은하도 쉬었다면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 만났겠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것 같은 그녀는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여자가 아닌지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랜만에 주말을 즐겼다.
꿀 같던 주말을 보내고 출근했지만 그를 크게 바쁘게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별이는 아직 ‘예종의 여인’ 촬영에 한창이고 지나는 영화 ‘붉은 여우’를 촬영 중이다. 둘 다 간간이 얼굴을 비추고 간식이나 밥차를 보내며 신경 써주고 있다는 표시만 해주면 되는 일이다.
남은 건 유니인데, 작사가의 지원을 받은 유니의 앨범 제작 준비도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현재 가장 신경 쓰는 건 뮤직비디오 제작을 위해 감독을 섭외하는 것인데 이번 앨범 컨셉에 맞춰 가장 예쁘게 찍어줄 수 있는 감독을 물색하고 있었다.
똑똑!
“대표님, 경수입니다.”
“그래, 들어 와.”
“지금 밖에 누가 오셨는데요? 민주씨가 그러는데 우리 작가님이시라는데… 되게 젊은 여성분이에요.”
경수는 아직 윤해연 작가와 이주희 작가를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간 몇 번 회식을 진행하긴 했지만 작가들은 어지간해서는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습성이 있어 회식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오시라고 해. 너도 들어오고. 인사해야지.”
“아, 네.”
잠시 후 경수와 이주희 작가가 대표실로 들어왔다. 이 작가는 그간 쉬면서 차기작을 구상한다고 했는데 잘 쉬었는지 예전보다 혈색이 좋고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일단 여기 인사해요. 여기는 박경수라고 매니저 일도 하고 회사 업무도 보고 있어요. 인사해라. 이분이 바로 이주희 작가님이시다.”
경수는 이 작가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곧바로 대표실을 나갔다. 인사만 하려고 부른 것이라는 걸 아는데 눈치 없이 자리에 끼면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잘 돼서 그런지 사람이 늘어나네요. 보기 좋아요.”
“다 이 작가님 덕분이죠.”
“제 덕분은요. 고작 작품 하나 했을 뿐인데요. 지금 생각하면 16부작을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마지막에는 정말 영혼까지 털리는 것 같았는데 막상 마무리 하고 나니까 또 쓰고 싶은지 계속해서 머릿속에 아이디어들이 떠돌아 다녀요.”
“다행이네요. 드라마 한번 하고나면 진이 빠져서 다시는 안하겠다고 도망다니다 1년은 지나서야 멘탈이 회복되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죠. 그리고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돌아다닌다니 그것 보다 좋은 일은 없죠. 오늘 사무실까지 오신 거 보면 그 아이디어들을 잘 요리해 오셨을 것 같은데… 기대해도 되는 부분인가요?”
이 작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에요. 집에만 있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나와 봤어요. 물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긴 하지만 막 이걸로 차기작을 하겠다고 결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기대는 하지 말아 주세요.”
“하하하, 알겠어요. 부담스럽게 안 할게요. 뭐가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아, 그게요…”
그녀는 이후 혼자서 고민해왔던 여러 가지 소재들을 풀어놓으며 우현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소재는 미래 시대의 SF물부터 30대 중년의 치명적이고 농도 짙은 멜로물까지 다양했는데 본인도 생각이 많은지 다양하기는 하지만 뭔가 틀이 잡히진 않았다.
사실 이주희 작가의 장점은 소재의 독특함이나 플롯의 완벽함이 아니라 대사와 상황의 재기발랄함인데 그녀는 차기작을 전보다 더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분명했다.
“으음… 사실 소재에 관해서는 정답이라는 게 없어요. 어떤 소재를 쓰느냐보다 어떻게 끌고 가느냐가 훨씬 중요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작가님은 남들보다 훨씬 유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소재의 신선함은 결국 한계가 있는데 작가님의 글은 소재를 뭘로 하든 기본 이상의 필력을 보장하는 것 같단 말이죠.”
“으응… 결국 머리를 비우라는 말인가요? 그래도 소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냥 아무 소재나 막 정하고 쓸 수는 없어요.”
“당연하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껏 세상에 없는 가장 독특한 이야기를 써야지!’ 하면 새로운 것에만 너무 힘을 주기 때문에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을 테지만 다시 글을 쓰려고 하면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상당한 재능이 있는 친구니 그 과정을 겪고 나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
“오늘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저녁이나 같이 해요. 뭐 좋아…”
“대표님!”
밖에서 경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우현을 찾았다.
“응? 뭔데? 들어와 봐.”
경수는 문을 열고 들어와 잠시 이주희 작가의 눈치를 살피고는 우현에게 귓속말을 하려 다가왔지만 말렸다.
“됐어. 우리 식구인데 뭐… 뭔데 그래?”
“그게… 왜, 전에 계약하려던 친구 있잖습니까? 아역 배우.”
“해수? 걔 이야기는 왜 꺼내는데?”
“스카이 엔터랑 계약했다는데요? 해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