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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열정의 결과(3)
해수 어머니는 이런 대우를 받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빵을 쥔 손을 덜덜 떨며 우현을 향해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애가 무슨 길거리 캐스팅당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하신 거 아니세요?”
“연예 매니지먼트의 입장에서 보면 전속계약을 체결한다는 게 전부 좋게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저희도 위험부담을 안고 계약하는 거죠. 저희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프로야구에서 해외 용병을 계약할 때, 계약 전에는 신체검사를 비롯해 모든 지표를 꼼꼼히 따져서 계약했을 테지만 막상 계약하고 나서 부상이라도 당한다거나 적응을 못해 원하는 만큼 활약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야구단 입장에서는 손해다.
마찬가지로 전속배우를 한명 더 둔다는 건, 그만큼 회사 입장에서 신경 써야 할 게 늘어나고 그 친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투자되는 비용도 들어간다. 그렇게 온갖 신경을 다 써줬는데 사고나 치고 연기력이 늘지 않는다면 차라리 계약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
연예계라는 곳이 타 직종에 비해 일하는 사람의 연령이 낮다보니 부모님들과의 마찰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특히 아이돌을 키우는 기획사에서 그런 경우가 잦은데 소속사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상당수의 이유가 부모님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우현으로서는 계약을 함에 있어 확실한 단서를 달아두려는 것이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해수 어머니는 자신을 무시하려는 행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요! 대한민국에 연예기획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곳이랑 계약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뭐라 하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해수의 재능이 무척이나 탐나지만 다룰 수 없는 연장이라면 쓰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사무실에 복귀하니 경수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역배우 계약 문제로 미팅 하신다면서요?”
“안 하기로 했어.”
“왜요? 그 때, 연기에 대한 재능이 굉장하다고 했잖아요?”
“그 애 엄마가 장난 아니더라고. 그래서 몇 번 거짓말로 회사 선택에 대해 태클걸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럴 수는 없다고 하네? 그래서 관두라고 했지 뭐.”
“아하… 그런 경우도 있네요? 제가 있던 회사는 아역배우가 하나도 없어서 부모들과 말을 섞은 경우가 없었거든요.”
“가끔 자식 대신에 사고치는 부모들이 있거든. 예방 차원에서 확실히 일러둬야 해. 안 그러면 뒤통수 세게 얻어맞거든. 그나저나 뭐 하고 있었어?”
“별이랑 유니한테 들어오는 일들 받고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전주에 비해 예매율이 오히려 더 오르면서 전화 오는 데가 많아졌어요.”
“예능은 무조건 거르는 거 알지?”
“그럼요. 별이 예능은 배제하는 게 원칙이고 지금 드라마 촬영 중이라 예능 나갈 시간 없는 거 알고 있죠. 그리고 예능 작가들도 별이가 지금 사전제작 드라마 촬영 중인 거 알고 있기 때문에 스케줄을 촬영 끝나고 잡자는데 일단 어찌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최대한 미뤄두고 있습니다.”
“잘했어. 드라마 끝나고 뭐가 잡힐지 모르는데 몇 달 뒤 스케줄을 무턱대고 잡을 수는 없지. 예능으로 나갈 것도 아니고 말이야.”
평소에 예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생각했다면 모를까 아예 예능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다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줄 예능 딱 하나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별이가 자신도 예능을 하고 싶다고 은근 티내왔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지, 마땅한 게 없다면 당연히 출연 불가다.
“뷰티 프로그램도 예능으로 봐야 할까요?”
“아… 그건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은 출연 힘들 것 같고, 별이가 주연으로 올라섰을 때는 나갈 만하니까.”
“알겠습니다.”
이후 경수와 업무에 관해 이야기하고 대표실에 앉아 ‘피아니스트’에 관해 올라온 기사를 훑어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경수가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임찬규 감독님이세요.”
지금쯤 대박을 맞아서 온 동네방네 불려 다니고 있어야 할 임 감독이 왜 찾아왔을까 모르겠다.
“들여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임 감독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고, 김 대표!”
울 것 같은 얼굴로 걸어 들어온 임 감독은 소파에 몸을 던지듯 파묻었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지금쯤 술 마시면서 돈 계산 하느라 한창 바쁠 양반이…”
“마누라가 진짜로 이혼하재.”
결국 그렇게 됐나 보다. 작품이 잘 되면 혹시나 잘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마음이 떠난 것 같다.
“잘못했다고 빌지 그랬어요.”
“빌었어!”
“진짜로요?”
“아니… 거의 빌 것처럼 말했지.”
“에휴… 어쨌거나 형수님 마음이 떠났다 봐요. 어쩔 수 없죠. 그나마 지금은 영화가 잘 됐으니까 홀아비 티는 덜 나겠네요.”
“놀리는 거야? 하아… 이제 자식새끼 얼굴 볼 때도 허락 맡아야 한대.”
“그러게 왜 그 때 이탈리아를 가서 그래요? 일단 다시 가서 빌어요. 괜한 자존심 부리지마요. 얼른 가요, 얼른!”
임 감독을 내쫓다시피 보내고 유니 앨범 타이틀 곡을 고심했다. 두 곡 다 멜로디도 좋고 유니와 잘 어울리기도 해서 어느 것을 타이틀로 정해도 무방하지만 그래도 한 곡을 정해야 하니.
사실 두 곡 다 반응이 좋을 것 같다는 감은 있다. 하지만 우현의 예리한 감각은 처음 들은대로 세 번째 곡이다. 분명 히트곡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니와 호준의 의견도 참고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두 곡을 더 들어보겠다고 말한 거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의 검증을 위해서도. 우현이 택한 검증 방법은 계속 들어보자는 거다. 며칠 동안 계속 들어보아도 역시 우현의 감이 맞다. 일반 소비자의 입장에서 들어볼 때도 세 번째 곡이 자주 들어도 질리지 않고 더 쉽게 입에 멜로디가 붙는다.
다음은 작사.
며칠 후 우현은 파주의 한적한 커피숍에서 그 커피숍 앞치마를 두른 한 여성과 마주앉았다.
“안녕하세요. 메일 보냈던 파인 엔터 대표 김우현이라고 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보이시네요.”
“네, 안녕하세요. 이조은날이에요. 화장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다니니 나이보다 어려 보이나 봐요. 20대 후반이에요.”
그녀는 맨 얼굴이 조금 민망한지 양 손바닥으로 볼을 살짝 가린다. 보통의 20대 후반 여성답지 않게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단발머리를 하고 렌즈가 아닌 안경까지 쓰고 있어 정말 어려 보였다.
“하하, 그렇군요. 제가 작가님 시집을 보게 됐는데 시도 기억에 남지만 작가님 성함이 더욱 기억에 남더군요. 이름부터 예술가답습니다.”
예전 대형 쇼핑몰에서 유니 팬싸인회를 했던 날, 대기 시간이 길어 쇼핑몰 내 서점에 들렀더랬다. 어슬렁어슬렁 베스트셀러들을 한 번씩 뒤적이다 옆에 있던 한국문학 코너로 들어가게 됐다. 크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훑고 지나다가 시집 몇 권을 빼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닌데 우현은 베스트셀러보다는 그 아래에 묻혀있는 것 중에 표지가 마음에 드는 걸로 집었다. 왠지 그렇게라도 베스트셀러의 그늘에 묻혀있는 책들을 한 번쯤 펼쳐주고 싶었다.
“네, 어려서부터 많이 들은 얘기예요. 그런데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저에게 시를 의뢰하신다구요?”
작고 가냘픈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분위기는 꾸미지 않은 외모와는 달리 마냥 어린 느낌은 아니었다. 시인이라 그런가?
“음… 정확히 말해서 시가 아니라 작사를 의뢰하는 겁니다.”
빼어 든 몇 권의 시집 중 한 권이 우현의 눈길을 끌었다. 여성의 입장에서 세상을, 사람을, 사랑을 서술하는 느낌이 잘 표현되어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도 잘 어필할 수 있는 젊은 감각을 가졌으되 저급하지 않은 세련된 문장을 쓰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작사요?”
안경을 한 번 치켜 올리며 토끼눈으로 우현을 바라본다.
“네. 혹시 가수 유니라고 아세요?”
“네, 알아요. ‘그 양반 같은 자식’…”
“네, 저희 회사 소속 가숩니다. 그 친구가 앨범을 준비 중인데, 그 중 타이틀곡의 작사를 이조은날 작가님께서 맡아주셨으면 하구요.
“…”
그녀는 말없이 우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심성이 많아 보이는 그녀이기에 즉답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마 유명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갑자기 유명 가수의 타이틀곡 작사를 해 달라 하니 놀랐을 거다.
우현은 대답을 재촉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돌렸다.
“이 커피숍에서 일하시나요?”
커피숍 앞치마를 슬쩍 쳐다보았다.
“네. 어찌어찌 책을 내기는 했는데, 돈은 거의 못 벌거든요. 제가 쓰는 시가 완전히 문학적인 것도 아니고 해서 진짜 시인들처럼 의뢰를 받아 시를 써서 돈을 벌기도 힘들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꼭 자신은 진짜를 흉내 내는 짝퉁이라는 듯이 말한다. 순수예술만이 진짜 예술이라는 인식이 많으니 그러는 것일 게다. 물론 돈벌이가 안 되는 건 말 할 필요도 없다.
우현은 그 상황이 이해가 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 쓰면서 작사도 계속 해보는 게 어떤가요? 제가 볼 땐 몇 년 안에 이런 커피숍 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
안경 너머로 껌뻑이는 눈이 순순해 사뭇 귀엽다.
“후후,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커피숍에서 일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제가요? 작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해보면 되죠. 아직 20대인데, 당연히 해보지 않은 일이 더 많죠. 여기, 제 명함입니다. 마음 정하면 연락주세요. 아, 오래 기다리기는 힘듭니다.”
그녀는 명함을 들어 자세히 본다. 그저 평범한 명함인데. 명함을 자주 받아보지 않은,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많이 해보지 않은 티가 난다.
그런 그녀를 남겨두고 우현은 일어났다. 결정은 그녀가 하는 거니까.
“저, 저기! 할게요.”
돌아서려는 우현을 조금은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벌써 결정했어요?”
조금 의외다. 조심성이 많고 사회생활 경험도 적어 보여 아마 쉽게 결정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명함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쥔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거라면 하고 싶어요. 아니,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거라면 하고 싶어요.”
앞의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한 모금 더 커피를 마셨다.
“편하게 말해요.”
어떤 내용인지 우현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녀 스스로 말하기는 힘들 거다.
“나이는 30대를 향해서 가는데 벌어놓은 돈도, 딱히 정해진 직업도 없어요. 회사에 취직도 해봤어요. 그런데 성격이 이래서인지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할뿐더러 일도 잘 못했어요.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잘 못하겠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하는 걸 저만 바보가 된 것처럼 못했어요.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죠. 그래서 이렇게 커피숍 알바예요.”
“이해가 되는군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하고 살아야하는지, 돈은 어떻게 벌어야하는지… 제 인생에서도 바보가 된 것 같아요. 그저 ‘글을 쓰면서 살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꿈만 있는데 살아보니 그게 절대 소박한 꿈이 아니더라구요. 너무 큰 꿈이었던 거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 소박하지만 큰 꿈을 꾸며 살죠.”
“그런데 저에게 글을 쓰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 저한테는 거부할 여유가 없어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저는 크게 기대하지는 않아요. 그저 여기서 일하는 만큼만 벌어도… 그래도 글을 쓰면서 돈을 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요, 돈 얘기는 빼고. 저는 그저 작가님의 진로를 약간 변경하는데 조언을 한 셈 치죠.”
“그런데… 왜 전가요? 다른 유명한 시인들도 많잖아요.”
“후후. ‘숨어있는 인재 발굴’이라고 해두죠. 제 특기거든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작곡된 멜로디를 건네주었다. 작사와 관련한 몇 가지 사항을 알려주고 그녀와 잠시 더 이야기를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