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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열정의 결과(2)
해수라면 전에 별이의 사전제작 드라마인 ‘예종의 여인’ 촬영장에서 봤던 아역 남자배우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전속계약 이야기를 꺼냈다가 시원하게 까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네. 안녕하세요.”
“다름 아니라 우리 애가 자꾸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네요, 호호호. 머리가 너무 똑똑해서 공부를 시키고 싶은데 저렇게 하고 싶다고 하니 막을 수가 없네요.”
“아… 그러세요.”
뭔가 느낌이 왔다. 왜 지금 전화했는지 말이다.
전에는 정말 연기를 시키지 않으려고 하나보다 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이가 그토록 원하면 보통 들어주기 마련인데 종종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는 법이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왠지 자식을 손에 쥐고 휘두를 것 같은 인상이어서 아무리 설득해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아 쉽게 포기했었다.
“흐음… 한번 시작하면 공부에 집중하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공부와 병행하도록 지원해줄 수 있음에도 슬쩍 떠봤다. 자신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에휴, 어쩌겠어요.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있겠어요?”
속으로는 ‘왜요? 이기실 것 같은데?’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왜 이제야 전화가 온 건지 알았다. 바로 별이 때문이다.
별이와 은하가 출연한 ‘피아니스트’는 평론가들의 호평 속에 출발하더니 포털의 관객 평점도 8.5를 기록하며 상업성과 작품성을 둘 다 인정받았다. 또한 1월 중순에 개봉한 이후로 현재까지 300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피아니스트’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유은하와 김별에 대한 언론의 주목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무명이나 다름없는 별이를 충무로 떠오르는 스타에 올려놓은 파인 엔터의 김우현 역시 연예계 내에서 암암리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가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작은 규모의 기획사라 다른 소속사에 비해 대우가 그리 좋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이지만 한 번 더 튕겼다. 사실 그 때 해수 엄마에게 까이면서 배우라는 직업을 딴따라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짜증이 났었는데, 지금은 자신을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중소기획사 사장처럼 봤기 때문에 거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또 짜증이 났다.
“그, 그래요? 뭐, 그래도 실력이 있으시다고 정평이 나있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대형기획사에서 연락하는 것도 뿌리치고 전화 했으니까 잘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역시나 그 때 의대를 보내야 하니 연기를 시킬 생각이 없다고 씨부린 건 그냥 거절하기 위한 변명이었던 거다. 이거 뭐, 변명을 너무 그럴싸하게 해서 사기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레 점심 괜찮으세요?”
“모레면 토요일이네요? 좋아요. 그 때, 우리 아이도 데리고 갈게요. 학교 안가는 토요일에 약속 잡으시고, 참 센스 있으시다. 오호호.”
저 방정맞은 웃음소리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연기는 저 아줌마가 아니라 해수가 할 것이기에 참았다. 의외로 저런 부모 밑에서도 예의 바른 아이가 나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진명이 바로 물어왔다.
“무슨 내용이 그래요? 들어보면 전속계약 관련된 것 같은데 어째 대표님이 받기 싫어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응, 아역배우인데 부모님이 마음에 안 드네.”
“아… 그런 경우 많죠. 그래도 부모님이 마음에 안 들면 양반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내가 진짜 예전 파인 엔터 있을 때 어이가 없어서…”
“아하하! 남자친구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해서 거절한 그 친구요? 아, 진짜 그 때 대표님하고 계약했으면 지금 그 지경은 안 됐을 텐데…”
전에 은하를 한창 키우고 있을 때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를 발견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의문을 표하던 그녀를 억지로 테이블로 앉혀서 계약을 하려는데 글쎄 그녀가 부모님도 아닌 남친한테 상의해 봐야 한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나중에 그녀는 남친과 상의해봤는지 그 당시 파인 엔터보다 큰 회사에서 데뷔했는데 몇 번 우여곡절을 거듭하다 결국 그 아까운 얼굴을 가지고 제대로 뜨지도 못 한 채 마약에 손대며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그 때는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나랑 계약했어도 마약에 손을 댔을지도 모르지.”
“설마요.”
“인기가 없다고 유혹에 쉽게 빠지는 인간들은 인기가 있어도 유혹에 쉽게 빠진다는 걸 알았거든. 그러니 결국 안 되는 것들은 안 되는 법이야.”
“네. 오늘도 하나 더 배웠습니다.”
저 영혼 없는 말이 부하직원이 직장상사하게 하는 굉장히 식상한 멘트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까?
“넌 일단 나보다 경수한테 가서 배워라.”
“경수요? 경수가 저 보다 더 재능이 있습니까?”
자신에 비해 까마득한 후배인 경수를 언급하자 화들짝 놀란 얼굴이다.
“응, 넌 걔한테 좀 배워야 여자를 만나겠다. 너 모르지? 걔 장난 아니야. 내가 너라면 걔를 형으로 모신다.”
“헐… 그 정도 입니까?”
“가서 인사하는 것부터 새로 배워. 아예 ‘나는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서 걸음걸이부터 말하는 것까지 다 새로 배워라.”
“말도 안 돼… 어떻게…”
뒷말은 듣지 않아도 ‘그런 얼굴로…’가 확실했다. 진명은 패닉에 빠졌는지 한참동안 멍 때리다 다시 정신을 차리며 아까 못다한 말을 했다.
“어쨌거나 우리 지나, 요 몇 달간 지옥훈련 했습니다. 액션스쿨 다니는 스턴트우먼이 슬쩍 알려줘서 알았는데 저 몰래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울었답니다.”
“정말? 진짜 고생했네.”
사실 농땡이 피지 않고 제대로 훈련하면 남자도 울고 싶어지는데 여자가 멀쩡하다는 게 더 이상하다. 그렇게 고생한 만큼 현장에서도 티가 나는지 액션 장면이 시원시원하고 박력있다.
“그럼 수고해. 나는 이만 갈 테니까.”
“넵! 들어가십쇼. 대표님이 와 주셔서 우리 지나도 힘이 많이 됐을 겁니다.”
“흠… 너도 그러지 마. 별이도 지나도 한 가족인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 비즈니스 같잖아.”
“아하하!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자주 오세요.”
“그래, 노력해볼게.”
사무실에 돌아온 우현을 기다리는 것은 수많은 광고 제안들인데 대부분이 별이에 관한 것이다. 근래에는 유니가 별이보다 훨씬 많은 매출을 기록하며 파인 엔터의 소녀 가장으로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별이가 ‘피아니스트’로 떠오르며 유니의 자리를 위협하려 했다.
물론 유니는 앨범만 발매되면 그까짓 광고 몇 개는 상대도 안 된다며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말과는 달리 ‘피아니스트’의 관객 수가 많아질수록 그녀가 녹음실에 처박혀 있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며칠 뒤 우현은 해수 어머니와 미리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거기에는 그녀뿐 아니라 해수, 그리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도 같이 나와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해수야 뭐해? 인사 드려야지?”
“안녕하십니까?”
양손을 배꼽에 모으고 인사하는 것이 귀여워 볼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니 앞의 아줌마가 마음에 안 들어도 자연스레 입가에 호선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잘 지냈니? 아저씨가 누군지는 알아?”
“알아요. 전에 조감독님이 말씀해주셨어요.”
“오… 정말? 조감독님이 아저씨 험담하지는 않았어?”
“아니요. 아저씨가 별이 누나 스타로 만들었다고… 완전 대단하다고 했어요.”
엄지를 치켜드는 폼도 너무 귀여워 마구 끌어안고 부비부비 하고 싶다.
“진짜? 조감독님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네. 그런데 이 분은…?”
“안녕하세요. 해수 삼촌되는 양병규라고 합니다. 누나가 바쁠 때는 제가 해수랑 같이 촬영장에 가거든요.”
딱 봐도 대학생인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래도 아르바이트 대신 하는 것 같았다.
“사실상 매니저죠. 오호호.”
“아… 그렇군요. 일단 앉아서 얘기 할까요?”
해수를 배려하기 위해 만난 곳이 바로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그렇기에 적당히 음식을 먹으며 해수의 눈치를 살폈다.
“해수는 아저씨랑 같이 일하는 거 어때? 좋아?”
“네.”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으며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해수를 보니 그의 엄마를 보며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가는 것 같다.
“어째서?”
“윤희 누나가 그랬어요. 아저씨 회사가면 좋을 거라고. 그리고 별이 누나랑도 친해요.”
별이랑 부딪치는 씬은 없었는데 촬영장에 있다 보니 친해졌나보다. 그것 참 기특한 것.
“연기하게 되면 공부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저 공부 못해서 괜찮아요. 어차피 울 아빠가 공부는 형이 할 테니까 연기나 하라고 했어요.”
역시나!
“어머! 얘는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러니… 오호호. 애가 겸손해서 그래요. 아시잖아요? 어찌나 머리가 좋은지 대본을 몇 번만 봐도 다 외워서는 NG 한번 안 낸다니까요?”
“나 NG 낸 적 많은데…”
“얘! 어른들끼리 말할 때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니?”
“힝…”
“하하하, 괜찮습니다. 일단 해수는 좋다고 하고 어머니도 좋다고 하니 계약할까요?”
“으음… 사실 얼마 전에 SN 엔터에서 우리 해수한테 미래의 김수연이니 하면서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아, SN 엔터는 아시죠?”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알고 있죠.”
“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애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으니 뭔가 계약조건이 모자라면 남들이 흉본다고 하더라구요,”
SN에서 연락 왔다는 건 100% 거짓말이다. 만약 진짜로 그쪽에서 해수를 눈독 들였다면 아무리 우현의 회사가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절대로 연락하지 않았을 거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지원해드릴 수 있는 조건에 한계가 있습니다. 대형기획사와 계약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녀는 우현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우물쭈물했다.
“아, 꼭 그 쪽이랑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전에 저와 얘기했을 때랑은 조금 다르네요. 그때는 뭐든 해줄 것처럼 하시더니.”
“그 때, 전속계약 얘기할 때 생각하던 조건과 지금 생각하는 조건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어머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대형기획사들 수준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린 거죠.”
“그래도 조금 서운하네요.”
“서운하시면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전속계약을 하실 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소속 아티스트와 계약할 때마다 조건으로 세우는 거니 해수만 차별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뭔데요?”
“계약은 해수 어머니와 하겠지만 아티스트의 스케줄과 작품 선택, 향후 방향 설정은 저와 해수가 결정합니다.”
사실 거짓말이다. 별이나 유니와 계약할 때 저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 그 때는 그녀들의 부모님이 해수 어머니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말에 해수 어머니가 발끈했다.
“저는 해수 엄마예요. 당연히 내가 조언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럼요. 해수 어머님이시니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겁니다. 조언은 받아들이지만 결정은 제가 합니다. 싫으면 계약 안 하시면 됩니다.”